38mm Hamilton Khaki Field 'Murph'
2014년 말 개봉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는 아직도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는 작품이다. 시간과 차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던지, 과학적 고증이나 물리학적 이론이라던지 하는 흥미로운 주제가 많지만, 역시 전 세계의 시계 팬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해밀턴의 두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관심 있어할 것이다.
영화에 시계가 등장하거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한 브랜드와의 합작은 놀랄 일이 아니지만 해밀턴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 대작은 꽤나 기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먼저, 시계가 등장만 하거나 PPL로 얼굴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시계 자체가 영화의 주제의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다.
또한 등장인물이 시계를 차고 있는 모습이 자주 노출되거나 계속 클로즈업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계가 주인공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정말로 스크린에 비춰지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그를 반증이라도 하듯 시계 팬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두 시계를 주인공의 이름을 붙여 쿠퍼, 머피라고 부르며 아꼈고, 시계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들도 인터스텔라에 등장한 시계라고 하면 생각이 날 정도였다.
쿠퍼가 착용한 모델은 기존 해밀턴의 라인업에 존재했던 시계였지만, 쿠퍼가 머피에게 준 시계는 해밀턴이 영화를 위해 특별 제작한 단 하나의 시계로, 판매되는 모델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시계 팬들이 이 시계의 발매를 바랐다.
그런데 금방 발매될 것 같던 머피는 그렇게 영화의 열기가 가라앉고, 뜬금없이 5년이 지난 2019년에서야 2,555피스의 한정판으로 발매되었다. 그 정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제법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것은 영화의 유명세도 있지만, 디자인의 완성도 자체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밸런스 좋고 무난하면서도, 해밀턴의 밀리터리 시계들보다 훨씬 정련된 느낌의 단정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매 욕구를 부추겼다. 또한 초침에 모스 부호로 ‘유레카’라고 새겨 포인트를 준 것은 영화와의 연결 고리를 더 강화시켰다.
아마, 단 하나의 걸림돌이 있다면 42mm의 사이즈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어린 머피가 이 시계를 직접 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시계가 너무 커서였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 시계는 손목이 가는 사람들이 착용하기에 확실히 컸다. 그리고 이 시계를 구매하기 위해 해밀턴에 방문했던 사람들도 손목에 올려 보고 포기하기도 했다. 애초에 해밀턴 카키 필드 모델도 러그가 긴 느낌 때문에 실제 사이즈보다 더 커 보이는데 42미리 사이즈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자, 그렇게 해밀턴 머피는 구매했던 사람들과 영화 팬들에 의해 기억은 되지만 동양인들에겐 좀 큰 시계로 페이지를 끝내는 것 같았다.
뜬금없이 2022년 말 이 시계가 38mm 사이즈로 다시 발매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정말 별로 없었다.
- 도대체 해밀턴은 왜, 영화가 개봉된 지 7년이 지난 지금에 또다시 38미리 모델을 발매한 것일까?
의문을 뒤로하고, 좀 더 시계에 대해 살펴보자면 이 시계는 H-10 무브먼트를 탑재하고 80시간의 파워리저브를 가지고 있다. 니바크론 밸런스 스프링 업그레이드가 있었다는 말이 있었고 공개 전에는 확인되지 않았었는데 현재 영문 홈페이지 스펙에 니바크론 항목이 Yes로 나와있는 걸 보니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니바크론이면 자성에도 강하고 온도 변화에도 강하니 무브먼트도 수준급이라 볼 수 있다.
심지어 사파이어 크리스털 백을 채택해서 무브먼트가 잘 보이는 데다 스크루다운 크라운은 아니지만 100미터 방수이다. 100미터 방수인데 두께는 11mm 정도로 얇다! 스펙이나 사양만으로도 꽤 감동적인데, 전반적 디자인은 이전 42미리의 그것을 거의 정확히 다운사이즈 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초침의 모스 부호 포인트는 빠졌고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오히려 이게 더 낫다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무엇보다 사이즈가 줄면서 러그 길이도 전반적으로 줄고 아래로 잘 꺾여 있어서 15.5에서 16cm 내 손목에 완전히 감긴다는 것이 킬포인트다. 다른 분들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카키 필드 메카니컬 모델 38mm도 러그가 긴 편이라서 뭔가 손목에서 뜨는 느낌이 들었는데, 카키 필드 머피 오토매틱 38mm는 그렇지 않다. 카키 필드 스타일의 시계를 원하는데 좀 더 단정하고, 사이즈 좋은 것을 원하신다면 머피는 최상의 선택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살펴보고 나니 아마도, 해밀턴은 머피를 차세대 에이스로 밀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관련 시계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단정하고 잘 다듬어졌으나 밀리터리 필드 시계의 DNA는 가지고 있는, 차기 에이스로 차고 넘치는 재원이다. 공개된 지 하루 이틀 만에 벌써 구매 인증하신 분이 꽤 된다. 에이스로서 첫 경기 성적이 훌륭하다.
ps. 영화에서 이 시계는 어쩌면 시간과 만남, 우주와 차원, 그리고 사랑과 그리움을 말하고 있다, 적어도 내게는. 지난 몇 주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끊임없이 가라앉히며 나를 잠식하려 드는 것들과 다투었다. 테서랙트 안에서 본 현재의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시계를 들여다보면 보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마주해주는 사람들과 그리움으로 손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