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운명'을 찾으러 떠나다
뒤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다. 부쩍 삶의 방향성, 인생의 지향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20대에 진작 마쳤어야할 고민을 30대 초반 끝자락이 되어서야 하고 있다. 어딘가에서 읽고 정신이 번쩍 들어 바로 다이어리에 메모해둔 구절이 있는데 도무지 출처를 기억할 수 없다. 부정하고 싶지만 나이가 들었음을 몸소 깨닫는다. 아무튼 그 구절은 이거다.
"남들이 몰라줘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인가.
남들이 몰라줘도 재밌고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윌리엄 제임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심오한 원칙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망은 결코 스스로 충족될 수 없으며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스스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발생한다. 칭찬과 격려 대신 쓴소리를 들을 때는 의욕이 꺾이고 반발심이 들기 마련이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보상심리가 발동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고생했는데 이것밖에 안 된단 말이야? 내가 한 건 아무 의미가 없는거야?' 하는 그런 감정들. 그런데 그 감정의 바닥을 잘 들여다보면 근본 원인은 보상의 많고 적음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상심리를 유발하는 행위 그 자체의 문제다. 무슨 말인고하니, 그 일이 누군가 시켜서 한 일이기 때문에 힘들고 내가 스스로 자처해서 즐겁게 한 것이 아니기에 보상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 자처해서 즐겁게 하는 일에는 이와 같은 보상심리와 인정욕구가 크게 발동하지 않는다. 결국 근본 원인은 '행위의 주체성'에 있다.
5년 전, 오랜 시간 꿈꾸며 걸어온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새로운 이정표 앞에 서 있었을 때, 불가항력적인 상황 속에서 일단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급하게 취업을 했다. 그 당시에는 밥벌이 수단을 마련했으니 당장의 위기는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했고 나름 유망한 직종으로 취업을 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처음 몇 년은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성취감을 느꼈고 또 이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기에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몇 년은 누구에게나 있는 '초심자의 행운'이었던 것 같다. 열정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 권태와 회의가 자리잡았다. 온종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게 너무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진정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쉽게 대답할 수 없어 몹시 답답하다. 그나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래전부터 꾸준히 해오는 건 하나 있다. 바로 글쓰기. 이전의 네이버 블로그에서 브런치로 옮겨온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자유롭게 쓰고 싶어서이다. 그동안 놓쳤던 스스로에 대한 탐색과 그 결과물들을 이곳에 자유롭게 기록해나갈 예정이다. 글쓰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앞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건 아니다. 돈을 벌 수 있을만한 실력인지 검증해야 하는 단계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또 한계를 마주할 수 있으니. 다만 먼 길을 돌아 다시 원점에 선 상태에서 그래도 꾸준히 해나가는게 하나쯤은 있다는게 작은 위안이랄까.
https://youtu.be/B9m-pOERQBE?si=PB5KX0ZMhnp4mJzf
30대 초반의 끝자락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조급함을 느끼지 않는다. 앞으로 살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늦지 않았기에. 좋아하는 윤종신님 또한 스스로를 찾기 위해 50세에 모든 걸 뒤로 하고 여행을 떠났다. 약 1년 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제서야 본인을 조금 알 것 같다고. 노마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발표한 2020 월간 윤종신 12월호 - Destiny. 소개글 속에 드러난 그의 철학이 너무 멋있다.
“생각해보면 저도 조금 더 쉽게 가는 길이 있거든요. 예전 노래를 부르거나 인기 있을 것 같은 발라드만 양산하는 거죠. 통계를 봐도 제가 발라드를 해야 더 반응이 좋다는 걸 제가 모르지 않거든요.(웃음) 그런데 그건 사람들이 원하는 윤종신이지 창작자로서의 윤종신은 아닌 거예요. 사람들의 취향과 선호를 따라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맞추기만 하면 나는 어느새 사라져버리거든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거고 다행히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래서 사람들의 호불호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하고, 무엇보다도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운이 좋다면 제가 좋아서 한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도 있겠죠. 저는 그게 저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또 월간 윤종신의 정신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윤종신이 ‘Destiny’를 통해 이야기하는 운명은 태생적 운명이라기보다는 경험을 통해 발견해가는 운명이다. 일찌감치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짊어지고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면서 만나게 되는 어떤 기회들에 과감히 자신을 던져봄으로써 운명을 확인해보자는 이야기. 다양한 환경과 상황에 자신을 기꺼이 노출함으로써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 확인해보자는 이야기. 섣부르게 결정하기보다는 일단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자신의 운명을 도출해보자는 이야기. 윤종신은 자신이 가장 나다움을 느낄 수 있는 모양과 상태는 몸소 부딪쳐야만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어느 정도의 울퉁불퉁함과 뾰족함을 유지해야만 나다울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원만함과 유연함을 발휘해야만 나다울 수 있는지는 깎여도 보고 맞춰도 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30년 넘게 활동하면서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시도해본 것 같아요. 음악뿐만 아니라 방송도 해봤고 회사도 해봤고 또 다른 가수를 키우는 일도 해봤죠. 저는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고 지금도 알아가고 있어요. 나는 어떤 게 가능 혹은 불가능한 사람인지, 어떤 길이 내가 가야할 혹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인지, 내게 주어진 역할이 어떤 것이고 어느 선까지 해내야 하는지 알게 되었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기 때문에, 그랬는데도 결국 내가 아직도 하고 있는 건 음악이기 때문에, 저는 음악이 제 운명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고요. 물론 그래서 음악을 더 오래 잘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요. 자신이 어떤 운명인지는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돌고 또 돌아봐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누가 봐도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윤종신님마저도 이거저거 해보다가 이제서야 음악이 본인의 운명인 것 같다고 하는데, 나같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처음부터 단박에 운명을 찾을 수 있을까. 진정 내 운명을 찾기까지 당연히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일단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절대로 조급해서는 안된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마주하는 여러 기회들과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자. 그런데 당장이라도 회사를 나오고 운명을 찾으러 떠나고 싶은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