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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었는데, 더 좋은 길을 찾았다.

주말 아침 10km를 걸으며 깨달은 것.

by 송곳독서

‘이젠 뛰지 않고 걸으리라’ 다짐한 이유


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을 좋아하고, 체육보다는 공부를 택하는 학생이었다. 응? 공부? 재수 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햇볕에서 뛰어노는 것'과 '실내에서 공부하는 것' 두 개의 선택지가 있으면 공부하는 것을 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입시제도에서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는 것은 사치라 느껴지니 말이다.


정적인 나의 삶은 사관학교를 가면서 180도 바뀌게 된다. 아침마다 달리기 하고, 의무적으로 팔굽혀펴기를 해야 했다. 매일 체육 수업이 있었다. 축구, 농구, 테니스, 수영, 웨이트 트레이닝까지 다양한 운동을 했다. 가끔은 '사관학교가 아닌 체대를 다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삶과 자신에게 ‘자신감’이 생긴다. 처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공부보다 운동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4년간의 생활이 나를 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언젠가는>이라는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그저 젊음을 믿고 구두 신고 달리고, 군화 신고 달리고, 가끔은 어쩔 수 없이 뛰었다. 장교로 임관을 한 후에도 일 년에 한 번 있는 체력검정을 위해서 꾸준하게 뛰었다. 20대가 지나고 30대가 되자 조금 무리해서 달리고 나면 무릎에 통증이 찾아왔다. 지금은 오래 걷거나 서 있을 때는 무릎보호대가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전역을 하면서 다짐했다. 이제부터는 '절대로 뛰지 않고 걸으리라'라고. 그렇게 3년의 시간을 뛰지 않고 쉬엄쉬엄 걸었다. 그만큼 삶의 속도도 여유로워졌다.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이영미 작가님


3년이 지나자 천천히 걸어 다니는 삶이 심심하다고 생각할 무렵, 두 권의 책을 만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이영미 작가님의 <마녀체력>이라는 책이다. 글쓰기를 위해서 이 책을 읽었지만, 달리고 싶어 질 줄은 몰랐다.


<루틴의 힘>이라는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루틴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제력 이야기.
저는 소설 쓰기 모드에 돌입했을 때 새벽 4시에 일어나 5~6시간 동안 작업합니다. 오후에는 10킬로미터 달리기나 1500미터 수영을 한 다음, 책을 읽거나 음악을 감상하지요. 밤 9시에는 잠자리에 들고요. 이런 루틴을 변화 없이 매일 지속합니다. <루틴의 힘>, 95쪽


우연처럼 에세이 쓰기 수업에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그에겐 달리기 자체가 삶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지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 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요구된다. (중략)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121쪽


<마녀체력>의 저자인 이영미 작가님은 13년 동안 출판사 에디터로 살다가 고혈압과 스트레스 그리고 저질 체력만이 남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운동을 하기로 다짐한다. 마흔 살부터 시작된 운동은 그녀를 트라이애슬론 15회, 마라톤 풀코스 10회, 미시령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마녀 체력으로 만들어 주었다. 책의 소주제 4개를 이으면 하나의 문장이 되는데, 이게 이 책의 핵심이다.

내 몸이 서서히 강해지는 동안 하나둘 행동이 바뀌고 이런저런 생각이 변하면서 그리하여,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다.

길을 잃었는데, 더 좋은 길을 찾았다.


책을 읽었으면 실천으로 옮겨야 진짜 독서다. 운명처럼 다가온 2권 책은 나를 다시 뛰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2주 차.


1주 차는 가볍게 9km.

목적지는 사진이 멋있게 나오는 한강!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교를 목적지로 정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서 혼자서 음악을 들으며 1시간 반 정도를 많이 걷고 조금 뛰었다. 오랜만에 달리기의 상쾌함을 느꼈다.


2주 차는 10km.

이번 주는 대교의 반대편을 가기로 했다. 지난주엔 서울 도심 쪽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었으니, 2주 차는 반대편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로 했다. 그래서 반대편 길을 향해서 뛰었다.


대교에 도착하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이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 횡단보도가 나와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없었다. 횡단보도가 있을 장소를 지나쳤다. 관리되지 않은 수풀들이 인도를 침범했고, 쓰레기도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보이는 표지판.

혼자서 생각했다. “응. 올림픽대로로 가는 건 아니야. 난 그저 다리를 건너면서 일출 사진만 찍을 계획이야.” 그렇게 계속해서 뛰었다. 조금 더 뛰다 보니, 여기는 대교로 가는 길이 아닌 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인도는 이어졌다.


여전히 뛰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돌아갈까? 아님 계속해서 가볼까? 어디든 길은 이어지겠지.”라는 섣부른 판단 후에 계속해서 뛰었다. 한 5분 정도 걸었을까? 인도가 없어졌다. 하하. "역시 길을 잘못 왔다고 생각했을 때는 빠른 결정이 시행착오를 줄이는데 좋다."를 생각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금 더 걸었다.


얼마뒤에 놀랍게도 서울 둘레길 표지판을 발견했다. "역시! 역시 길은 이어지는 거야. 도로가 있는데 사람이 가는 길이 없을 리가 없지. 포기하지 않길 잘했다." 생각하면서 반가운 마음에 둘레길 인증사진을 찍었다. 눈 앞에 보이는 길로 바로 내려갔다.(사실 이 길은 반대편 길이었다.)


내 키높이 정도 되는 낮은 굴다리가 나왔다. 누가 봐도 사람이 다니지 않을 길이었지만,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는 생각에 별 의심 없이 걸었다. 굴다리를 건너자 자전거 전용도로와 산책로가 나왔고, 이렇게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역시 길은 이어진다’를 마음속으로 외치며!


새로운 길을 찾았다는 즐거움에 더 신나게 걸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에 찍은 둘레길 지도가 생각났다. 둘레길은 산을 가로질러서 집 근처로 가는 길이었는데, 이 길은 올림픽대로를 따라가는 집과는 멀어지는 길이었다. 그때서야 지도에서 알려주는 길과 반대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다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나 길은 연결된다는 생각에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처음 보는 새로운 길을 돌고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딱 10킬로미터.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진을 찍었지만, 소소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 1.

'이 길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들때, 서둘러 포기하고 원래 목적지로 돌아가는 것이 계획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깨달음 2.

다른 길을 계속해서 가다 보면 더 좋은 새로운 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매주 서울의 새로운 장소를 10킬로미터씩 걷고 뛰어볼 계획이다. 글감도 찾고 체력도 키우는 일석이조가 아닐까. 그리고 다짐해본다.

이젠 다시 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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