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유전인가요?
요즘 아들이 레고도 어벤져스도 배트맨도 아닌 포켓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시절 포켓몬 빵을 사 먹던 기억이 있는데요. 그 포켓몬이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인기가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1년 전에도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지금 인기가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포켓몬 카드를 동네 문구점에서 판매하다는 소문을 확인하고 몇 번 가봤지만, 갈 때마다 포켓몬 카드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사장님께(무인 문구점이에요!) 포켓몬 카드가 입고되는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알려준 그 시간에 아들 손을 꼭 붙잡고 포켓몬 카드를 사러 갔습니다. 카톡 이모티콘처럼 가볍고 경쾌한 리듬으로 말이죠.
20분 정도 전에 문구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저희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형님 두 명, 엄마손을 꼭 붙잡고 온 아들보다 한 살 많은 형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3등으로 도착했죠. 3등이면 순위권이니 괜찮다고 안심했습니다. 10분 정도 지나자 아이들에게 임무를 부여받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달려온 엄마 아빠도 보였습니다. 사장님이 저에게만 특별히(?) 알려준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빠 이야기
어릴 적 카드 좀 수집해봤습니다(하하). 좀 심할 정도로 말이죠. 제가 초등학생 때는 <슬램덩크>와 <드래곤볼>이 인기였습니다. 특히나 <슬램덩크>를 좋아했던 저는 문구점에서 파는 카드를 정말 열심히 모았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동전을 넣고 돌리면 카드가 한 장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동전을 몇 개를 넣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100원이나 200원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소 100장은 넘게 가지고 있었는데요. 이런 카드를 100장 정도 모으면 희귀템에 욕심을 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저 한 장 한 장 모아가는 게 소중한 즐거움이었다면, 100장 정도를 넘어서면 나에게는 없는, 친구들에게도 없는 카드를 가지고 싶은 욕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는 학교 가까이에 있는 문구점이 아닌 집에서 멀리 떨어진 문구점을 찾아 원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원정까지 가서 카드를 뽑아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라리 하나의 기계에서 꾸준하게 뽑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머니는 공부는 하지 않고 하나씩 카드를 모아가는 아들의 모습이 분명 걱정스럽게 바라보셨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러다가 말겠지’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적정 선을 지키지 못하고 카드도 사고, 슬램덩크 만화책도 사고, 비디오도 열심히 빌려서 보았습니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하는데, 저는 결국 그 선을 넘었나 봅니다. 부모님이 분명 경고를 하셨을 텐데 그 신호를 확인하지 못하고 제 수집은 계속되었죠.
결국 어느 날 학교를 다녀와보니, 그동안 모든 용돈을 투자해 하나 둘 사서 모은 보물과 같은 만화책과 카드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부모님께 얼마나 혼나고, 또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속에 작은 꿈은 나중에 어른이 되면 <슬램덩크> 만화책 전권을 사서 서재에 모아놓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그 꿈을 이루었죠.
아들 이야기
수집하는 것도 유전일까요? 아내에게 슬쩍 물어보니, 자기는 어릴 적에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처남은 그러지 않았냐고 억지 질문을 했지만, 역시 그러지 않았다는 답변만 돌아오네요.
아들이 어릴 적의 저처럼 포켓몬 카드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주에 포켓몬 카드를 기다리던 중 아들이 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포켓몬 카드를 기다리며 10분 정도 지나자 지루함이 찾아왔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바로 제 손을 당기면서 이야기합니다.
‘아빠,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해요!’
갑자기 포켓몬 카드가 올 수도 있으니 경계심을 놓지 말라는 이야기겠죠. 이 말을 듣는데 아들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어릴 적의 제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말이죠. 이왕 시작했으니, 제대로 해보라는 의미에서 포켓몬 앨범도 사주었습니다. 아들은 그곳에 반짝이는 V카드와 Vmax카드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포켓몬을 모르는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아 보이는 반짝이는 카드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도 좋아했던 반짝이 카드죠.
아이의 따스한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행복은 금세 끝난다. 그럴 줄 알았으면 부지런히 시간을 내고, 지치도록 누렸어야 했는데. 아들내미라 그런가, 안아 보거나 손잡을 일이 길 가다 지폐 줍는 행운만큼이나 드물어졌다. 그래도 슬며시 희망을 품어본다. 10년쯤 흐르면, 나이 들어 느릿느릿해진 엄마를 애틋하게 바라봐 주겠지. 시간이 걸려도 기다려 주겠지. 10년쯤 더 세월이 가면, 백발이 된 내 손을 꼭 쥐고 다시 산책할 날도 오겠지.
마녀체력(이영미작가님), <걷기의 말들>, 45쪽
이렇게 시작한 수집에 아빠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려고 합니다. 포켓몬이 어떻게 진화하는지, 카드에 있는 다양한 숫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포켓몬이 센(?) 녀석인지 등 어릴 적에 카드를 모으던 설렘으로 아들과 함께 모아보려고 합니다. 당근 마켓에 보니 일부 희소한 포켓몬은 비싼 가격에도 거래되던데요. 뭐 이러다가 초등학생 형님들과 경쟁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이 순간이 아들과 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