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이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다. 사실 내가 가진 아픔은 내 약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공개하려면 아주 큰 마음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픔을 이야기하려면 아주 오래전 내가 돌도 지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 사건의 발달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집 앞 골목에서 떡볶이와 어묵 등을 판매하는 포장마차를 하셨다. 집에는 갓난쟁이인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기에 늘 나를 데리고 나와 장사를 하셨다. 그렇게 평소처럼 장사를 하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를 손님이 앉는 의자에 잠시 앉혀놓고 자리 정리를 하셨고 그곳에서 발버둥을 치던 내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고가 났다. 단순 낙상사고인 줄 아셨던 어머니께서는 놀란 마음을 안고 나를 살피셨는데 오른쪽 눈 주변에서 피가 너무 나서 그 부분이 찢어졌다고 생각하셨고 급하게 근처 종합 병원으로 달려가셨다.
2. 생각보다 심각한 부상?
병원에 도착해서 응급처치하려고 하는데 이게 웬걸 눈 주변이 아니라 눈이 앵글 못에 찔려 각막손상이 망막박리부터 심각한 안구손상이 되었던 것이다. 당장 큰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엄마는 나를 데리고 부산에 모 대학병원으로 갔고 그곳에서 나는 1차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경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 어린 몸으로 전신마취수술을 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고 현재와 달리 그 당시 의학기술은 한계가 있었기에 결코 쉬운 수술은 아니었다고 한다. 부산의 병원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듣고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가셨다. 지금도 지방 어르신들은 서울 큰 병원으로 가면 지방 병원보다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시지만, 그때는 그 고정관념이 더 심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그때까지 내 눈이 실명이 될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한다. 귀한 막내딸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서울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셨겠지
3. 반복되는 수술 지쳐가는 사람들
반복되는 수술에 가족들도 지쳐갔다. 수술비도 어마어마했기에 외할머니의 도움과 엄마의 대출 등 빌릴 수 있는 곳에서 모두 빌려 가며 수술비를 마련해야 했고 그 감당은 고스란히 어머니께 돌아갔다. 평소 가정폭력과 도박,알콜 중독이 심했던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셨다. 택시기사 일을 하면서도 그 일상은 계속되었고 어머니를 향한 폭력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중요한 순간에도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모아놓은 내 수술비를 가져가서 도박하셨다. 결국, 수술비가 없던 나는 마지막 수술을 받지 못한 채 퇴원을 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승하입니다.
이번에 연재하는 브런치북은 지극히
개인적인 제 이야기인데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 누구도 평생 불행을 안고 가는 사람은 없다. 분명 인생을 살아가며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을 테지만요. 그 불행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빛도 볼 거고 언젠가는 행운이나 행복도 반드시 찾아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고 놓지 않는다면 꼭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말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쓰는 이야기 많은 관심으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그저 행복만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