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지혜를 자산으로 남기는 사람들
오늘 점심은 내 창업을 축하해 주는 자리였다.
양재동에 위치한 국숫집을 고문님이 추천해 주셨고, 우리는 잔치국수와 열무국수, 비빔국수에 갈비만두까지 메뉴를 골고루 시켜 나눠 먹었다. 배려심이 돋보이는 추천이었고, 오래 기억에 남을 의미 있는 자리였다. 멘토이신 신동기 고문님, 웹소설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준 김학수 PD님, 그리고 Ten AI의 정원훈 대표님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먼저 김학수 PD님이 그동안 해온 교육 방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는지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로 말문을 열었다. 세 분 모두 나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었고, 2월 2일 창업한 따끈따끈 한 아크아이피(ARC IP) 첫 명함을 드릴 수 있었다.
70세, 최고령 인턴사원의 명함을 건네셨다.
고문님도 새 명함을 주셨는데 인상 깊었던 것은 새 명함과 그에 담긴 태도였다. 글로벌 IB 투자은행에서 뉴욕·서울·홍콩을 오가며 인생 1막을 밀도 있게 마무리한 뒤, 국내 사모펀드와 대기업 재무총괄, 증권사 CEO를 거쳐 또 새로운 도전이다. 김앤장 출신등 변호사 170여 명이 가파르게 성장시키고 있는 법무법인 린(유한)의 최고령 신입 인턴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현재 업계 14위인 법무법인 린을 연말 안에 반드시 ‘2위 그룹’으로 끌어올리겠다는 포부를 담담하게 말하는 고문님의 눈빛에서, 정말 될 것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우와....!!!!
끊임없이 배우고 다음 판을 설계하는 사람들
정원훈 박사님은 직접 공저로 집필한 책 한 권을 내게 건네주었다. AI 시대 문화예술 분야의 저작권을 다룬 가이드북이었다. 표지 안쪽에는 저자 사인과 함께 짧은 응원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만들어가야 할 IP 회사의 방향을 조용히 짚어주는 좌표처럼 느껴졌다. 기술이 앞서가는 시대일수록, 창작자의 권리와 맥락을 지켜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3시간을 꽉 채운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학수 PD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발행인 등록 이후 카카오페이지에 소설을 연재할 때 전자책을 텍스트로 읽을 수 있도록 ePUB 뷰어로 파일을 변환하는 방법을 정리한 링크를 보내주었다. 오늘의 점심은 창업을 축하받은 자리이기도 했지만, 끊임없이 배우고 다음 판을 설계하는 사람들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지를 실감한 시간이었다.
“노후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은퇴를 준비하라는 말은 이제 너무 흔해졌다. 언제부터인가 중년에게 던져지는 질문은 하나로 수렴한다. 그리고 그 답은 대부분 숫자로 이어진다. 연금, 보험, 자산 배분, 예상 은퇴 시점.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그 질문이 반복될수록, 하나의 질문은 점점 사라진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인가?
작년 5월 1일, 나는 자발적인 의지로 퇴사를 선택했다. 부업으로 해오던 주식 투자가 어느 정도 기본적인 생활을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도 일주일에 이틀은 일을 한다. 그 최소한의 리듬이 없었다면, 지난 9개월간 이어진 ‘나를 다시 찾는 시간’은 끝까지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마음속에만 오래 품어두었던 소설가의 꿈을 마침내 현실로 옮겼고, 결국 출판사 창업이라는 결정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은퇴를 앞둔 중년 세대는 특별한 세대다. 한 조직에서 오래 일해본 경험이 있고, 여러 번의 파괴적인 사이클을 건너왔으며, 실패와 회복을 동시에 겪어봤다. 기술은 바뀌었지만 사람과 돈, 관계와 판단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몸으로 알고 있다. 이건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살아내며 갈고닦은 경험이다. 문제는 이 경험과 지혜가 은퇴와 함께 갑자기 ‘쓸모없는 것’처럼 취급된다는 데 있다. 회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축적된 시간은 이력서 속 몇 줄로 축소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제 뭘 해야 하지?”
나는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
‘이제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가 아니라, ‘이미 배운 것 중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더 이상 시간을 팔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새로운 일을 찾는 데만 있지 않다. 오히려 이미 살아낸 삶을 어떻게 재배치하느냐에 더 가깝다. 경험을 기록하고, 판단의 기준을 언어로 남기고, 반복된 선택의 이유를 구조화하는 일. 이건 속도가 빠른 사람보다 오래 버텨본 사람에게 유리한 영역이다.
기억을 자산화하자는 말은 그래서 조심스럽다.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정제가 필요하다.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다시 같은 상황이 온다면 무엇을 다르게 할 것인지까지 담겨야 한다. 그때 비로소 경험은 개인의 추억을 넘어 타인에게도 유효한 지혜가 된다. 내가 말하는 안정적인 노후는 돈의 많고 적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경제적 기반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축적해 온 시간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상태다. “나는 이런 판단을 해온 사람이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은퇴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미래만 준비해 왔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위해, 이미 살아낸 시간을 값싸게 취급해 왔다. 이제는 그 순서를 바꿔도 좋지 않을까. 먼저 돌아보고, 정리하고, 남길 것을 선택한 뒤에 다음을 설계하는 것. 은퇴는 끝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바뀌는 지점일 뿐이다. 나는 50대를 살아가는 당사자로서,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갈고닦은 경험과 지혜를 자산으로 만들고 싶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이미 살아낸 삶을 스스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더 이상 시간을 팔지 않아도, 자신이 축적한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노후를 준비하라는 말 대신, 나는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인가? 어쩌면 그 답을 찾는 과정 자체가, 우리가 준비해야 할 진짜 노후일지도 모른다. 내가 56세에 웹소설을 쓰고, IP 출판사를 창업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