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깝게 지내던 언니의 메신저 프로필이 사라졌다. 나를 차단한 것이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술만 마시면 반복되던 실수들, 기억도 못 한 채 웃어넘기던 날들. 처음엔 이해했다. 두 번째도 그냥 넘겼다. 친구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세 번째쯤 됐을 때 처음으로 말했다.
“다음부턴 그렇게 많이 마시지 말자.”
비난이 아니었다. 계속 만나고 싶어서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대화 대신 종료를 선택했다. 화보다는 허탈함이 앞섰다. 그리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비슷한 짓을 한 적 있지 않을까, 하고.
요즘 관계에는 가성비가 적용된다.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가벼우면 좋은 사람.
괜히 피곤해지면 정리해야 할 사람.
이 공식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유튜브엔 “이런 친구는 당장 손절하라”는 영상이 넘쳐나고, 댓글엔 끊어낸 사람들의 후기가 가득하다. 관계를 끊는 건 결단력이 되고, 붙잡는 건 미련이 되는 시대.
물론 손절이 필요한 순간은 있다. 사과 없는 무례함, 반복되는 상처를 견디는 게 미덕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다른 지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빨리 종료 버튼을 누르게 된 걸까.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미 텅 빈 상태다. 직장에서, SNS에서, 하루 종일 자극에 반응하다 보면 저녁의 나는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상태에서 갈등이 생기면 대화로 풀 여력 같은 건 없다. 차단이 빠르고, 읽씹이 간단하다. 에너지를 덜 쓰는 쪽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해는 간다. 그게 요즘의 생존 방식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나씩 덜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사라진다. 쓴소리 하는 사람, 나와 결이 다른 사람, 가끔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주는 사람들이 필터링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만 남는다.
아늑하고 편안한 세계.
그 안에서 나는 단단해지는 대신, 조금씩 좁아지는 건 아닐까.
내가 누군가를 효율의 기준으로 정리했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계산 위에 올라가 있을 것이다. 내가 지쳐서 말수가 줄어든 날, 예민해서 분위기를 망친 날, 그날의 나는 어딘가의 손절 목록에 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관계가 쉬워진 게 아니라, 관계를 포기하는 게 쉬워진 것 같다.
오늘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메시지 창을 닫았다.
종료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다가, 잠깐 망설였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별 다를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