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더 보수적인가.
페이스북이나 브런치에 쓰는 내 글들은 다분히 정치적인 편향성 (진보적)을 띠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 글들을 쓸 때마다 많은 공감을 얻기도 하지만 종종 언프렌드 (Unfriend) 알림이 뜨기도 한다. 나의 주장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으로 다가간 결과겠지만 그들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갖지는 않는다. 서로 믿고 지향하는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다.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많은 것과 또 달리, 한국에 사는 사람들과 이곳 미국에 사는 한국인들 사이에는 묘한 이질감이 존재한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뉴스를 공유하는데, 어떤 사안을 바라보는 잣대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느낌. 비행기로 10-15시간이면 닿는 거리지만, 둘 사이에는 물리적 시차보다 더 먼 ‘가치관의 시차’가 존재한다.
흔히 미주 한인 사회를 ‘박제된 한국’이라 부른다. 요즘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한인타운에 들어서면서부터 여전히 보이는 어색하고 촌스러운 간판들, 옷차림들, 영어와 한국어가 부자연스럽게 섞인 말투들은 마치 시계를 거꾸로 30-40년 전쯤 돌려 놓은듯한 느낌은 준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이 세상을 지배하기 전인 60~90년대에 한국을 떠나온 교포들에게 한국은 그들이 비행기에 몸을 싣던 그날의 질서와 도덕으로 기억된다. 한국 본토가 역동적인 변화를 거치며 유연해질 때, 이민 사회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과거의 유교적 가치와 엄격한 위계질서를 강화했다. 이 ‘문화적 동결’ 현상은 고국을 향한 그리움이 깊을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미국 이민 생활에서 교회를 빼놓고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외롭고 고단한 이민 1세대에게 교회는 단순히 종교 시설이 아니었다. 비즈니스 정보를 나누고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며 눈치 보지 않고 김치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였다.
이 강력한 커뮤니티의 중심에는 대개 보수적인 신학이 흐른다. 매주 반복되는 공동체 생활은 보수적인 사회관을 집단의 규범으로 정착시켰다. 외부의 급격한 변화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심리가 종교적 신념과 결합하며, 한인 사회의 보수성은 더욱 공고한 성벽을 쌓았다.
흥미로운 점은 미주 한인 사회 내에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현 대통령의 반이민주의와 인종차별주의적 태도가 영 불편할 법도 한데, 왜 그들은 트럼프에 열광할까?
그 저변에는 ‘자수성가한 자영업자’의 생존 본능이 있다. 세탁소에서, 그로서리 마켓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가족을 건사해 온 이들에게, 그 대가의 일환으로 한국국적까지도 포기하고 시민권을 취득한 (Naturalized Citizen)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안전’과 ‘내 몫을 지키는 것’이다. 강력한 법 집행(Law and Order)과 감세 정책, 그리고 자국 우선주의는 이민 소수자로서 불안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오히려 명쾌한 정답처럼 다가온다. 트럼프(공화당)를 지지하는 것이 미국 시민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인 것처럼 느낀다. 또한 “열심히 일한 사람이 보상받아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보수적 정의관이 트럼프라는 인물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보수적 정서는 고국의 정치 상황을 바라볼 때도 그대로 투영된다. 이들이 현 정부나 진보 진영의 정책에 비판적이고, 단호히 빨갱이 정권이라며 손사래를 치는 이유는, 그들(진보)이 미국 땅에서 처절하게 증명해 온 ‘개인의 노력과 책임’이라는 가치를 훼손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본토의 변화를 ‘발전’이 아닌 ‘근간의 흔들림’으로 해석하는 것. 여기서 가치관의 시차는 정점에 달한다.
결국 미주 한인들의 보수성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상실에 대한 공포'가 빚어낸 눈물겨운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낯선 땅에서 소수자로 살아남기 위해 우리가 끝까지 놓지 못했던 그 가치들은, 사실 고국에 두고 온 이름 모를 그리움들을 지켜내기 위한 마지막 보루였다.
하지만 그동안 지키려 애써 온 가치들이 이미 낡은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이민자의 고립감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로 다가온다. 내가 페이스북에서 겪는 "Unfriend Alert"는 단순히 정치적 견해 차이가 아니라, 어쩌면 이 거대한 '가치관의 시차'가 만들어낸 파열음일 것이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무엇을 고수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로. 나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결국은 낯선 땅의 외로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온 동료들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과거의 엄격함이 이민 1세대를 결속시키는 힘이었다면, 앞으로의 유연함은 우리와 우리 다음 세대가 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숨 쉬게 할 산소가 될 것이다.
닻을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는 결국 항해하기 위해 존재한다. "언프렌드"의 단절보다는, 서로의 다름이 빚어내는 불협화음조차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넉넉함. 그런 유연한 가치관의 외투를 걸칠 때, 우리는 비로소 태평양 양쪽의 삶을 온전히 잇는 진정한 '디아스포라(Diaspora)'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6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