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기름값은 어떻게 보내드릴까요?

아파트 게시판에 걸린 손글씨 광고지

by 포텐셜아이즈

지하 주차장에서 연결된 엘리베이터 앞 게시판은 항상 분주하고 어떤 날은 말그대로 정신 사나울 정도로 시각 소음이다. 게시판에는 대부분 부동산 전단지나 에어컨 설치 광고 같은 것들이 붙어 있다. 형형색색 요란하게 디자인된 인쇄물, QR코드, 할인 문구 같은 것들.


“국산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 판매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이 게시판에서 유난히 한 장의 광고지가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하얀색 A4 용지 한 장. 유성매직으로 쓴 듯한 검은 글씨가 종이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인쇄물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쓴 손글씨다.

또박또박 명조체로 눌러 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첫 줄은 반듯하게 시작했지만 글씨는 내려갈수록 조금씩 오른쪽으로 기울며 올라간다. 그 작은 기울기에서 사람의 손과 호흡이 느껴진다.


게시판의 틀에 종이 윗부분이 살짝 가려져 있어 정작 제목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가려진 <참기름 들기름> 아래 시골에서 어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은 들깨와 참깨로 만든 기름을 판매한다는 글이 이어진다. 깨끗이 씻어 말려 짜낸 들기름과 참기름. 괄호에는 경북 예천 기름을 강조한다. 주문하면 문자를 남겨 달라고 한다. 그러면 퇴근 후 직접 배달해 준다고 적혀 있다.


들기름 - 25,000원

참기름 - 27,000원

볶은 통깨 350g - 20,000원

고춧가루 500g - 18,000원


이렇게 가격도 적혀 있었다. 들기름 참기름은 한 병당 가격이겠지...



“시골에서 어머니께서 직접 농사지은.”

“퇴근 후 직접 배달해 드립니다.”


나는 이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이 광고는 물건을 파는 글이 아니라 한 가족의 시간을 설명하는 글 같았다. 그래서인지 손글씨로 적힌 이 광고는 왠지 더 뭉클했다. 이상하게 물건보다 사람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

깨를 씻고 말리고 기름을 짜는 시간.

퇴근한 뒤 주문한 집을 찾아가 기름을 건네는 자녀.

그리고 어느 집 식탁 위의 그 맛을, 이 작은 종이 한 장이 담고 있었다.



이 광고에는 없는 게 많다. 그래서 주문했다.


상품 사진도 없고
브랜드 이름도 없고
리뷰도 없고
로고도 없다.


손글씨가 삐뚤어져 있어서일까.

수정편집이 없는 손글씨라서일까.

광고 문장이 어딘가 서툴러서일까.


그래서 오히려 더 잘 읽혔다.

솔직히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나는 이 광고를 머릿속에 두고는 찍어 둔 광고지 이 사진을 계속 본다. 다음 날 바로 나는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참기름 한 병을 주문했다.



요즘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앱으로 주문한다. 새벽배송, 당일배송, 로켓배송. 상품 사진은 정교하게 보정되어 있고 리뷰는 수백 개가 달려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다음 날 문 앞에 물건이 놓여 있다. 그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점점 물건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게 되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손을 거쳐 왔는지 생각할 일도 없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광고 속에 살고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 취향을 분석해 상품을 추천하고, 수많은 브랜드가 더 좋아 보이기 위해 경쟁한다.


그런 시대에 아파트 게시판 한가운데 붙어 있는 손글씨 한 장이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가 아직 우리 동네 게시판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넉넉해진다.



이 광고에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나는 이 광고지 사진을 SNS에 올렸다. 사고 싶다는 반응에서부터, 요즘 시대에 아날로그가 주는 감동과 AI가 광고를 만들어 주는 시대의 광고의 본질을 논하는 댓글로도 이어졌다.경북예천이 참깨 들깨 풀질이 좋은 지역이라는 댓글은 신뢰를 더욱 증폭시켰다. 한 광고 전문가는 광고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David Ogilvy)를 언급하면 이 광고지 카피를 극찬을 했다.


스크린샷 2026-03-11 오전 11.07.15.png https://www.ogilvy.co.kr/kr/david-ogilvy


사람들은 이 광고지에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반응했을까? (아래는 링크드인에 올린 글에 댓글이다)

본질에 충실하네요. 화려한 이미지, 세련된 폰트, 특별한 할인 공세는 없고, 행동을 바꾸는 AB 테스트 같은 의도된 형식도 없네요. 고객이 맛볼 진한 고소함 가득한 정직한 마음이 보이네요. 오길비가 살아서 본다면 진솔한 카피로 극찬했을 것 같습니다.


제품이 주려는 서비스의 핵심을 잘 전달하면서도, 제품을 살만한 고객층의 감성을 자극하는 광고네요. ㅎㅎ 신뢰도가 올라갑니다.


가족이 직접 농사지어서
깨끗이 씻어 판매한다는 점에서
신뢰가 가서 저였으면 100% 구입했을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직접 농사 지었다는 점에서
정성과 마음 그리고 제품의 품질과 자부심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포인트
들기름, 참기름은 대기업보다는 방앗간에서 만들어진 게 더 맛있습니다.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 저에게 이 아이템(?)들은 무언가 진정성 있고 경륜이 있고, 때 묻지 않은 때 묻음이 있는 전문가에게 구입하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저렇게 그저 화이트 배경에 텍스트만으로 제가 원하는 요소들을 담았기에... 바로 전화해서 사러 가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합니다.
P.S. 요새 연락처라는 말을 잘 안 쓰죠? 그래서 더 연락해 보고 싶네요.


상품에 진심일 때 가능한 진정성 넘치는 광고네요. 오래도록 혼자만 알고 먹고 싶다면 욕심일까요 ㅎㅎ


심지어 AI가 만드는 광고까지 시장에 투입되는 세상에 저런 다소 엣스럽고 글자 간 기울기도 맞지 않는 귀엽고 소박한 광고 가끔씩 접했으면 좋겠습니다


참깨나 들깨는 고온건조한 조건을 좋아하고 물 빠짐이 좋은 토양에서 잘 자라는 작물인데요.
예천이 일조량이 풍부하고 비교적 건조해서 품질 좋은 참깨들깨가 많이 생산됩니다. 그래서 기름이 맛있다고 하는 거죠.
경북 예천이라고 적혀 있어서 한마디 적어보았어요^^



이 글을 링크드인에 올리고 며칠 사이 조회수가 8천 명을 넘었다. 아파트 게시판의 작은 손글씨 광고 이야기였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다. 아마 사람들은 단순히 참기름 광고 이야기를 읽은 것이 아닐 것이다. 로켓배송과 알고리즘 추천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사람의 손으로 쓴 글씨와 ‘퇴근 후 직접 배달해 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주는 감각을 함께 떠올렸을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이미지를 만들고, 추천까지 대신하는 시대다. 그럴수록 우리는 오히려 사람의 시간과 손길이 담긴 장면에 더 오래 머무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작은 손글씨 광고는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기술이 점점 더 똑똑해질수록, 우리는 무엇을 더 인간적으로 지켜야 할까.



기름값은 어떻게 보내드릴까요?

참기름 한 병. 광고지에 적힌 대로 주문은 문자로 했다.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 집으로 가져다 주기로 했다.

그리고는 나는 너무도 익숙하고 당연하게 계좌번호를 물었다.


'물건 확인 후 보내주세요'


그런데 돌아온 문자에는 묵직한 반전이 있었다.


그 짧은 문장에서 참기름을 파는 사람의 마음이 읽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물건 하나 고르고 선택하고 대금을 주고받는 순간에도 우리는 늘 계산부터 한다.


누가 먼저 보내야 하는지,

누가 먼저 믿어야 하는지.


그런데 그 문자 한 통은 그 순서를 잠깐 멈추게 만들었다. 이 작은 거래 속에서 과연 누가 누구를 믿고 있는 걸까. 문자를 읽으며 묘하게 만감이 교차했다.





잠시 휴대폰에 이 문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거래는 단순히 참기름 한 병을 사고파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물건을 먼저 맡기고, 또 누군가는 그 믿음에 기대어 문 앞에 놓일 한 병의 기름을 기다린다.


로켓배송과 결제 시스템이 완벽하게 연결된 시대에도 어딘가에는 아직 이렇게 작동하는 작은 신뢰가 남아 있다. 생각해 보니 그 손글씨 광고가 사람들을 멈추게 했던 이유도 어쩌면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참기름보다 먼저 건네진 것은

한 사람의 정직한 마음과,

서로를 잠시 믿어 보자는 조용한 제안이었다.



참기름을 받기로 한 월요일 오전.

뭔가 문제가 생겼다.


IMG_4329.jpg



문자에는 다급합이 엿보였다.


혹시, 설마

그 광고지 속에 계신 시골어머님이 생각이 났다. 마음속이 탄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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