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 여기저기서 자조와 우울의 거대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 해 달력이 마침표를 찍을 때면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서 후회와 자책으로 우울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라는 기정사실은 화룡점정 연말 블루를 완성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서 동시에 집단 절규를 하고야 만다. 거리두기 시국에도 우리는 이처럼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응?)
늙음과 노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일까, 한 살이라도 어린 게 좋다는 사회적 세뇌의 결과일까. 사실 둘 다라고 생각하지만, 한국사회는 유독 나이에 집착하는 사회문화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한다. 다른 나라는 안 살아봐서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살아보지 않아서 문화는 잘 모르지만, 다른 나라에 관해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 있다. 전 세계적으로 1월 1일이 된다고 해서 동시에 요이땅 나이를 먹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무이하다는 점이다. 알겠지만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이 계산법은 태어날 때를 0살로 산정하고 생일을 맞이할 때마다 한 살을 먹는, 이른바 '만 나이'다. 한국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만 나이를 사용한다. 병원 진료를 받을 때 평소 사용하는 생활 나이보다 1~2살 적게 기록된 진료기록차트의 숫자를 보고 몰래 흐뭇해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널리 쓰이는 것은 '한국식 세는 나이'다.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고 해가 바뀔 때마다 한 살을 더하는 방식.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진 세는 나이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로 사용되었지만 이제는 모두 만 나이 셈법으로 기준과 사용을 바꿨고, 세는 나이를 활용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거기에 법적으로 사용되는 또 하나의 나이, 현재 연도에 출생연도를 뺀 나이를 일컫는 '연 나이'가 있다. 연 나이는 출생연도에 따라 일괄 적용해야 하는 병역법, 청소년보호법 등에 활용되는 셈법이다. 이 기준으로 2022년 1월 1일이 되면 생일이 지나지 않았더라도 '연 나이'만 19세라면 술과 담배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법적으로 사용되는 나이만 해도 2개인 셈인데, 거기다가 글로벌 나이(법적 나이)와 일상나이가 다른 덕분에 한국인은 같은 나이를 여러 번 먹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일단 1월 1일이 되면 다 함께 사이좋게 '세는 나이'를 먹는다. 한국식 진짜 새해인 음력 설날이 오면 떡국을 먹으면서 또 새삼 나이를 먹는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생일을 맞이하면 글로벌 셈법으로 나이를 한 살 다시 먹는다. 같은 나이만 세 번을 되새김질하며 먹는 셈이다. 떡국을 세 그릇 먹는다고 나이를 세 살 더 먹는 건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나이 먹는 기분을 느끼니, 한국 사람들이 유독 한 살 차이에도 민감한 까닭 중 하나는 자기 나이를 일깨워주는 이벤트가 너무 많아서 아닐까...라는 주관적이지만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져본다.
어쨌든 법적 나이와 일상 나이가 다른 데서 오는 불편함, 뭐든지 앞서 나가야만 자부심을 느끼는 K시민답지 못하게 세계 유일의 세는 나이 사용국이라는 인식 등이 뒤섞여 연말이면 타종행사만큼이나 관습적이고도 상습적으로 '만 나이 표준화' '세는 나이 완전 폐지' 여론이 솔솔 올라온다.
법적 나이와 일상 나이가 달라서 발생하는 비용이 있다면 그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표준화가 필요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만 나이를 사용한다면 한 살 적고 많은 것에 그리 연연하지 않은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아, 그렇게 되면 나이 대신 태어난 연도로 통성명과 서열 정리를 하려나?
한국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실례지만 나이가...?"라는 질문 후 호칭 정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한 살이라도 어리면 형님, 오빠가 되고 '일방적인' 반말을 할 수도 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다=윗사람'이 상식으로 통한다. 1~2월생이 초등학교를 1년 빨리 입학하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이들은 몇십 살을 먹고도 여전히 "너는 빠른이잖아" "너 때문에 족보가 꼬였다"를 내뱉으며 혼잡지역 교통정리관처럼 명확하고 깍듯한 나이 서열 정리에 심혈을 기울인다.
나이는 인간이 태어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차곡차곡 상승곡선을 만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치다. 그런데 어떠한 정성도, 노력도 들어가지 않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왜 그렇게 집착하고 위와 아래를 나누고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걸까(그렇다고 '내 노력의 결과'라는 이유로 성적이나 자산을 까면서 서열정리 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나이에 유난인 분위기가 '만 나이 표준화'와 함께 좀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연말을 맞아 세는 나이 이야기를 써본다. 만 나이 셈법이 자연스러워지면, 새해마다 반복되는 "또 한 살 먹는다"라는 집단 자조의 분위기도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나이는 잘 아껴뒀다가 1년에 딱 한 번, 생일에만 먹으면 되니까.
달콤한 생일 케이크와 함께라면 1년에 한 번 먹는 나이도 조금은 달콤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