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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진 Apr 11. 2021

시간을 도둑맞은 여자

『 오십 즈음에』프롤로그

인생에서 어떤 부분만 가위로 뚝 잘라내 버린 것 같은
끔찍한 망각을 경험한 적 있으신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자꾸 잊는다. 그것도 까맣게. 흔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불현듯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오며 가며 눈으로 점찍어 두었던 식당을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지난해 이미 다녀왔다는 걸 목도할 때가 그런 경우다. 


매번 늘 가고 싶다고 여기면서 한 번은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은 식당이 있었다. 곱창전골로 유명했는데 동네 사람은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는 꽤 알아주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 소문을 뒷받침하듯 가게는 언제나 대만원이었다. 주차장은 우리가 가게를 지날 때마다 만석이 아닌 적이 없었다. 식당 문 앞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줄을 서곤 했다. 코 시국 따위가 무엇이냐. 조롱하듯 그 가게는 꾸준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동물의 내장류를 썩 좋아하지 않는 우리에겐 매번 후순위 맛집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대체로 그 가게 바로 옆 해물탕 전문점을 가거나 인근 브런치 카페를 방문했다. 그날은-내 기억에서 사라진 그날 말이다.- 작정하고 유명하다는 곱창전골 시식차 들러 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주차를 하는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익숙한 그런 느낌. 마치 데자뷔를 보는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운. 


식당 주차장에 그늘막 구조물이 있다. 제대로 된 그늘막이어서 마치 최근에 조성된 고속도로 휴게소 어디쯤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 그늘막 아래 주차를 한다면 볕이 뜨거운 날, 차 안의 온도를 비정상적으로 뜨겁게 상승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비가 온다고 해도 서둘러 우산을 펼치며 허겁지겁 차에서 뛰쳐나오거나 정신없이 차 안으로 몸을 숨기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랬다. 거기 바로 그 지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이 행위, 이 동작, 이 장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뭔가 이래 본적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운전석에서 주차를 시도하고 있던 오빠에게 그날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취지로 그런 유의 이야기를 꺼냈던 게 기억이 난 것이다.


기억에 없는 그날은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날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오빠가 후진과 전진을 반복하며 가볍게 주차를 끝내던 장면. 막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오빠가 내게 우산을 씌워 주차장으로 데려가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빠 차 트렁크에 상시 보관하고 있는, 모 기업에서 증정용으로 나누어 준, 검은색 장우산이었다.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정작 식당에서 먹은 음식과 가게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말이지 까맣게, 마치 그 부분만 칼로 깨끗하게 도려낸 후 말끔하게 이어 붙여 티 하나 나지 않은 필름 같다. 원래 거기까지만 찍고 잠시 멈춤 버튼을 누른 후 다음 장면으로 촬영한 영상처럼 그렇게 완전하게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단지 주차장에 차를 입고하면서 기억에서 사라진 그날과 같은 행위를 한 게 기억났을 뿐이다. 사람의 몸은 기억에 우선하는가. 냄새가 기억보다 먼저 사물을 인지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대로 차를 돌려 나왔다. 먹어 본 음식이니까 - 기억나지도 않으면서 - 새로운 다른 맛집을 찾아가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우린 그날 다른 메뉴를 먹었다. 그 조차 지금 기억나진 않지만. 



사라진 기억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기억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아이폰에 남아있는 사진 덕분이었다. 내가 움직이는 거의 모든 곳에 사진을 찍어두는 습관이 있다. 사진 촬영을 취미로 두고 있긴 하지만 DSLR을 들고 다니기보다는 일상에서 가볍게 스냅으로 기록하는 사진들은 아이폰으로 남긴다. 삼성 애니콜 가로본능 시절부터 폰카를 사용해 이런저런 일상을 집착적으로 찍어대다가 2000년대 초반 DSLR에 입문했지만 비슷한 시기 카메라가 우수하다는 아이폰으로 갈아타면서 업무용은 DSLR을 사용하고 일상 모든 순간은 거의 아이폰을 쓰고 있다. 여담이긴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아이폰이 생길 때마다 거의 해당 세대의 최대 용량을 가진 모델로 구입하느라 비싼 돈을 들이곤 했다. 수년 전부터는 아이클라우드를 사용하면서 용량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석연찮아서 아이폰 사진첩을 뒤졌다. 최근 1년 전 사진을 집중적으로 샅샅이 찾았다. 말이 쉽지 워낙 사진을 많이 찍어대는 나로선 - 하루에 500~1,000장을 찍을 때도 부지기수다. - 눈이 빠지게 거의 종일을 꼬박 뒤져야 했다. 스크롤, 스크롤, 백 스크롤. 종일 그것만 찾고 있을 수는 없으니 시간 날 때마다 찾느라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 인증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봤다. 정말로 그런 마음이었다. 때는 2020년 장마철이었다. 가게 입구, 실내, 메뉴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생경하기만 했다. 기막힐 노릇이다. 맛 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사진을 보고 그날의 기억이 일부 나기는 했지만 곱창전골에 대한 우리 나름의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고작 기억나는 것이라곤 '내 입맛에는 마포구 곱창전골 집보다 덜하다.'라는 정도랄까. 기가 막혔다. 다시 가서 먹어봐야 그날의 맛이란 게 기억날까. 사진을 보고 있는데도 기억나는 게 거의 없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증거랄 게 나왔음에도 사라진 기억은 더욱 미궁으로 빠졌다. 이 사건 말고도 기억을 잃어버린 하나의 사건이 더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그 조차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조차 잊고 있는 것이다. 잊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잃어버린 걸까. 문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오빠와 내가 함께 하는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국 팔도 맛집을 찾아 다니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함께 갔던 식당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하는데 가끔씩 우리가 함께 한 식당이나 카페를 내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다.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나는 자주 그에게 "정말? 거기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간 거 아니야?"하고 되묻곤 한다. 함께 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는 기억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들.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하나 둘 생기고 있다. 몸이 낡아지면 기억도 지워지는 걸까. 이 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놓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 오십 즈음에』는 그렇게 시작된 오십을 바라보는, 그리고 어느 순간 오십을 넘어서게 될 한 여자의 기록이다. 나이 듦에 관하여, 그리고 행복하게 늙어간다는 것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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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진

여행작가가 본업인 취미 소설가. 50을 바라보는 40대 후반의 삶을 기록합니다. 2019년부터 직접적으로 '노화'라 부를 수 있는 몸의 변화를 만나는 시시콜콜한 삶의 변화나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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