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시티
서울 강남 가로수길, 애플 매장 건너편에는 흥미로운 건물이 하나 있다. 얼핏 보면 그저 멋진 유리 커튼월 건물처럼 보이지만, 살짝 고개를 들어보면 유리 패널로 감싸지 않은 철근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을 설계한 이영환 이웨스건축 대표는 이를 두고 "'언피니시드'(마무리하지 않은) 건축"이라고 표현했다. 건물 외관에 마치 마무리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둔 것처럼 내부 역시 수많은 용도를 마음껏 담을 수 있도록 했다. 내부에 기둥을 두지 않아 전시컨벤션 공간으로 적합한 동시에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구획을 나누고 바꿔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외부에 노출돼 있는 철근은 그래서 언제든 필요에 따라 공간 용도에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세상에 외치는 상징이다.
이 대표는 "이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는데, 용도를 확정해 짓는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빠른 변화에 대응해 언제든 새로운 용도가 툭 튀어나올 수 있는 '팝업시티' 시대를 드러내 보이는 전초기지인 셈이다.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 양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집이 바로 그런 트렌드를 담아내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이제 집은 더 이상 거주만을 위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1~2인 가구의 라이프스타일, 사람과 공간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의 등장은 집의 용도를 주거에 한정시키지 않는다.
건축 기반 스타트업 블랭크는 오는 3월부터 주거 구독 서비스인 '유휴멤버십'을 시작하려 한다. 문승규 대표는 "귀촌을 위해 잠시 살아본다든지, 서울에 기반을 두고 지방에 파견을 간다든지, 한 달여 논문을 쓰러 간다는 식으로 여행이 아니라 짧게 거주하려는 수요가 꽤 있다고 보고 있다"고 했다. 이 멤버십에 가입하면 서울과 지방의 지정된 집에서 원하는 기간만큼 거주할 수 있다.
공유주택 등과 같은 다양한 주거 모델 서비스를 내놓고 있는 미스터홈즈의 시선 역시 거주와 숙박 간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트렌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홈즈가 제안하는 '멤버십 주거' 서비스가 바로 그런 트렌드를 잡아내려는 시도다.
이태현 대표는 "공유주택 홈즈에서 살고 있는 분들 중에는 유튜브 작업 등과 같은 일을 하면서 출근을 하지 않는 분이 꽤 있다. 이분들은 집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이들은 여행도 좋아하지만, 집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도 중요하게 여겨 집과 숙박 중간쯤에 있는 모델을 선호하는 수요가 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온라인 영상 회의 기술의 진화나 변화된 인식 등에 따라 최근에는 집에서 일을 하는 사례도 점점 늘고 있는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3D프린터 등장에 따른 상상을 보태면 공업 용도와 주거 용도의 결합까지도 떠올릴 수 있다.
미국 건축 비평가 니나 래파포트와 건축가 임동우는 2018년 진행한 '도시생산주거'라는 테마의 전시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생산 행위는 용도 지역 설정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일상이 될 수 없었고, 노동자를 도시에서 내쫓는 결과를 초래했다. 마이크로 프로덕션(소규모 생산) 시스템은 도시의 활력을 주도하는 촉진제로서 주거 영역과 함께 융합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도시형태학자인 콘젠은 1960년 논문에서 도시 형태의 네 가지 구성요소인 '토지 이용' '건축물' '필지 패턴' '가로 패턴' 중 제일 쉽고 빨리 변화하는 것은 건축물과 그 건물에 담기는 용도(토지 이용)라고 설명했다. 가장 변하기 어렵다는 가로 패턴마저도 아파트 개발로 인해 손쉽게 변화하는 상황에 토지 이용의 변화무쌍함을 말한다는 것이 부질없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밀레니얼 라이프스타일과 플랫폼 기술 간 결합은 같은 공간에서 새로운 용도가 끊임없이 '팝업' 하고 튀어나오게 만들 정도이니, 이제 도시 형태에 대한 고민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매일경제 주말 칼럼 '도시와 라이프'에도 실린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