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죽음은 꼭 비극이었을까?

왕위는 언제나 죽음 위에서 완성된다.

by 은이영

요즘 사람들이 단종 때문에 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을 넘겼다.


자기 뜻대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어린 왕.


그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세조가 종기로 평생을 고통받았고 한명회는 부관참시를 당했으니

어쩌면 인과응보일까.


하지만 단종을 불쌍하게 보는 그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 시대, 그 나이에, 부모 잃고 떠돌다 굶어 죽은 백성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름도 없이, 서사도 없이, 드라마 한 장면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


우리는 왕좌에서 끌려내려 온 소년을 보며 울지만,

왕좌 아래서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만 명은 기억하지 않는다.


비극의 크기가 눈물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서사의 유무가 결정한다.




나는 감정의 방향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묻고 싶다.

단종의 죽음이 정말 세조의 잔인함 때문이었을까?


조선은 태종 이방원이 설계한 나라이다.

그 설계의 핵심은 단 하나였다.

왕 위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정몽주를 제거한 것도,

왕자의 난도,

사병 혁파도,

외척 숙청도

모두 같은 문법이다.


왕 위에 다른 권력이 생기지 못하게 하는 것.


신하의 권력은 왕권을 갉아먹는 암이라는 것.

이방원은 평생 그것을 도려냈다.


그런데 세종은 집현전을 키웠다.

사대부 학자들을 왕 곁에 제도적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세종 본인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통제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 씨앗은 뿌려졌다.

그리고 열두 살 단종이 즉위하던 순간, 그 씨앗이 개화했다.

황보인, 김종서.

왕은 있으나 왕이 없는 나라.

태종이 평생 막으려 했던 바로 그 세계가,

손자 대에서 복원되고 있었다.




양녕대군은 그 장면을 지켜봤다.

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사람.

폐위든 자발이든,

결과적으로 그는 아버지 이방원이 피로 쌓은 왕권을 포기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가.

신하들이 어린 왕을 둘러싸고 실권을 나눠갖고 있었다.

자신이 포기한 왕권이,

신하들에게 분산되고 있었다.


그가 수양의 손을 들어준 것은

왕위를 가져간 동생의 단순한 복수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신념과 복수심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양녕의 선택이 그랬다.

아버지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누구라도 단종을 살려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폐위된 왕은 그냥 사람이 아니다.

명분의 그룻이다.

본인이 아무리 조용히 살겠다 해도,

그 존재 자체가

"저기 진짜 왕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실제로 사육신이 그걸 증명했다.

단종이 살아있는 한,

모든 불만 세력의 집결지가 되는 구조였다.


세조가 특별히 잔인한 것이라 볼 수는 없다.

동서고금 찬탈 후의 공식이 그렇다.

왕위 찬탈의 완성은 전 왕의 죽음이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래야 구조가 닫힌다.


적통 세자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죽어야 왕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 위에 열리는 것이 왕위이다.

세조는 그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앞당겼을 뿐이다.

형태의 차이지, 구조의 차이가 아니다.




단종은 설계도의 오류였다.

태종이 설계한 왕권 중신의 나라와,

세종이 의도치 않게 심어놓은 신권의 씨앗이 충돌하는 자리에

열두 살 아이가 놓였다.

단종의 비극은 조선이라는 시스템의 내부 충돌에서 나온 것이다.


단종이 살아 왕위를 유지했다면, 조선은 달라졌을까?

아마도 달라졌을 것이다.


신하들이 실권을 나눠갖는 구조가 고착되었을 것이다.

신권이 강해진 조선 후기의 모습은

알다시피 사대부들이 꿈꾼 유교적 이상정치는 아니었다.

붕당정치, 당파싸움, 세도정치가 가속화되며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신하들끼리 권력을 독점했다.

백성들의 수탈은 심해졌다.


세조는 태종이 설계한 왕권 중심의 나라를 피로 복원했다.

그는 조선의 원래 설계도에 충실한 왕이었다.

찬탈자로 낙인찍혔지만 유능한 왕이었다.

경국대전의 기반을 만들어서 조선의 법치 체계를 확립했다.

역사는 그 잔인함을 기록하면서도,

그 위에서 계속 굴러갔다.


왕위는 언제나 죽음 위에서 완성된다.

우리가 단종 앞에서 우는 것은

그가 가장 슬퍼서는 아니다.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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