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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세상 속 수많은 불빛을 보면서, 어디에도 자기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희미한 불빛 하나 찾을 수 없는 이 세상이 무척이나 고독하고 외로웠다. 자신이 오고 싶어 온 세상이 아니었다. 은숙의 뱃속에 방을 만든 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순득의 집도 약방 집도 자신이 선택한 환경이 아니었다. 다시 은숙과 석철의 집으로 가야 했던 미영은 가고 싶지 않아 했지만, 석택권이 없었다. 스스로 시작했던 서울 생활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살아 낼 방법을 찾아가며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하게 열심을 냈었다. 미영은 닥친 현실이 참혹하고 서러웠다. 더 슬픈 것은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이 슬픔을 표현할 수 없는, 철저히 고립된 존재로 버려진 자신의 처지가 가혹하고 비참해 가슴을 쥐어 잡고 분노했다. 자신의 처절함과는 상관없이 세상 속 불빛의 움직임은 멈춤이 없었고, 사람들의 움직임은 자신들의 불빛을 찾아 분주했었다.
정아가 떠난 것은 사람에 대한 결핍을 견디지 못해, 사람의 온기를 얻을 수 있는 불빛을 찾아 뛰어나간, 나름 세상 속을 향한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구는 미영을 통해 울타리 없는 고단하고 외로운 인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 독선의 울타리가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떠나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하는 울타리 속 불빛이 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상구는 회피를 선택한 자신의 비겁함에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희영은 미영과 분리되어야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미영의 존재는 밑 빠진 독이었고, 외면할 수 없는 흉터 같은 것이었기에…. 처음부터 없었던 존재처럼 분리해, 철저한 단절을 통해 자기 집안과 가족을 보호해야 한다, 여겼을지도 모른다. 미영은 그간의 일을 떠 올리며 서서히 꺼져가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 세상에 남아 살아가려면 어떤 울타리 가운데 사람들 속에 있어야, 저 불빛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영은 그제야 깨달아갔다.
미영은 자기 존재가 만들어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생명을 만드는 이에게 간곡하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불씨를 피울 자리는 없으니 보내지 말아 달라고…. 미영의 슬픔은 세상으로부터 영영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세로 80센티, 가로 60센티 정도의 ‘0’ 호실은 생명이 호흡하기 전으로 돌아가 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며칠의 공간 적응이 끝나고 얼마 동안은 고르지 못한 호흡으로 잠깐씩 정신을 잃었지만, 호흡이 약해질수록 깊은 잠이 길어졌다. 무의식 속으로 깊이 빠져들수록 추위와 굶주림에서 편안해졌고, 세상의 소리와 냄새가 점점 멀어지고 미영은 비로소 ‘0’ 호실에 완전하게 정착했다.
개성 넘치는 젊음이 복작 북적이는 거리에는 곳곳에 별스럽고 재미있는 그라피티가 즐비했다. 작은 공터에서는 악기와 춤이 어우러진 공연이 거리의 생동감을 더욱 들썩이게 했다. 뉴스에서 젊은이들의 공연 문화가 자리 잡아가면서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는 대학가 거리를 소개하고 있었고, 정애는 그 속에서 미영의 문양을 발견했다.
코스모스가 하늘산들 거리는 시골길에 점잖은 자가용 한 대가 달리고 있었다. 뒷좌석 창문을 빼꼼히 열고 밖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생긴 모양이 기이한 형체를 한 생명체들이 모여, 즐겁게 춤을 추며 서로의 불빛을 먹고 나누고 있었다. 소녀는 그곳에 뛰어들어 그들의 춤과 표정을 흉내 내며 그들 속에서 그들이 가진 불빛을 나누어 달라, 이 무리 저 무리를 돌아다니며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소녀에게 불빛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소녀는 기다림을 선택한 듯, 멀찍이 물러나 그들 중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눈 깜박임조차 멈추고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컴컴한 어둠 속에 혼자 남아버린 소녀는 없어진 세상을 찾아 허둥대며 어둠을 헤집고 다닌다. 자기 눈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찾아 헤매고 다니는 소녀를 그들은 밀어내고 피해버렸다. 소녀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몸을 이끌고 쉴 곳을 찾아 들어선 곳에서 거대한 여자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 ‘0’ 호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애는 여행용 캐리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은 스토리가 있는 그라피티 마지막 끝에 놓여 있는 캐리어를, 그라피티 결론을 연출하기 위한 소품이라 여겼다. 그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속에 무엇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정애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 역시 그라피티를 그린 작가의 연출이면 만지거나 훼손시킬 경우, 고소를 당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다며 캐리어를 못 만지게 했다.
정애는 확신했다. 그라피티 속에 미영의 문양이 군데군데 적혀있었고, 캐리어에는 미영의 영문 이름 이니셜 ‘M’이 적혀있었다. 캐리어 속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라피티를 그린 작가가 미영이 확실했으므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정애의 간곡한 호소로 경찰이 캐리어를 열었다. 그 속에 둥글게 태아 형태를 한 온전하게 보존된 미영의 육신이 드러났다. 캐리어 속에 있었던 미영은 캐리어 방 ‘0’ 호실 방을 내어준 ‘M’이었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이색적이 나라, 조용한 시골 마을 미영의 집.
미영은 아침 커피를 내리고, 빵을 잘라 토스터에 넣었다.
흐르는 차가운 물에 사과 하나를 씻어 식탁에 잘라 놓고, 냉장고에 있는 버터와 치즈를 꺼냈다. 햇살이 드리우는 창밖을 보며, 미영은 지난날을 생각했다.
미영은 40일 가까이 깨어나지 못하고, 의료 기기에 의존해 겨우 호흡만 할 수 있었다.
미영은 긴 꿈을 꾸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덕재, 영재와 숙희, 은숙까지 미영을 내려다보며,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살아야 합니다.”
“이 아이는 꼭 살아야 해요.”
“이 아이가 살아나면, 세상의 빛이 될 거예요.”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미영이 깨어났을 때, 정애가 고운 미소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일어났니?”
영재 장례식에서 영재 변호사가 정애에게 명함을 내밀며, 사무실 방문 요청을 하였다. 정애는 명함에 나와 있는 서울 도심 사무실을 찾았었다.
“어른께서 집안 식구들 모르는 유산을 좀 남기셨습니다.”
“제게요?”
“네, 스님 몫으로 일부 남기시고, 나머지는 미영 학생에게. 사실은 큰 어른, 덕재 어른 아들 몫으로 할아버지께서 신탁해 둔 재산이 좀 있었는데, 그 손주 사망하고 정리를 못 하고 있었거든요. 어른 돌아가시기 전에 형님 몫으로 되어 있던 재산 정리하면서, 그 손주 몫으로 되어 있던 것을 미영 학생 몫으로 정리했습니다.”
“제 몫도 미영이에게 줬으면 합니다.”
“어른께서 스님 성정을 아시고, 스님께서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된다고 분명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출소 후 잠시 들렀을 때, 영재와 숙희가 덕재 유산 일부를 정애에게 주겠다고 했었다.
“정애야, 어릴 때부터 식모살이했는데, 일한 대가도 제대로 못 주고, 고생만 시켰지? 형님 몫으로 되어 있는 거 정리해서 지금이라도 보상을 좀 해 주고 싶은데.”
“절에 사는 제게 무슨 돈이 필요하겠어요? 미영이에게 주세요.”
“장례식에 미영 씨 올 줄 알았는데, 연락도 안 돼서!”
“제 몫을 지금 당장 찾아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필요하실 때 수령 하시면 됩니다.”
정애의 극진한 돌봄을 받은 미영은 자신이 그려 놓은 그라피티를 살펴보았다.
자기 눈이 없어진 소녀는 자신을 찾고 있는 그 누군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스스로 가려버린 어둠이었다.
영재가 정애를 통해 남겨 준 유산으로 미영은 따뜻한 나라로 떠날 수 있었다. 정애를 여러 번 초청했지만, 정애는 산을 찾은 이들의 무성한 얘깃거리를 들어줄 누군가는 있어야 한다며 사양했었다. 정애는 바다에 보내 달라고 말했었다.
“미영아, 나는 산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바다가 참으로 무서웠단다. 울룩블록 작고 큰 등선을 따라 굽이굽이 높고 낮은 고개가, 사시사철 다른 모습을 하는 산에는 우리 인생처럼 웬 사연이 그리도 많은지…. 내가 너에게 들려주고 보여 주었던 산은 언제나 다채롭지 않더냐…. 그런데 이제는 숨이 좀 차구나! 네가 떠난 바다 건너 세상 이야기를 듣고 떠 올리면서 바다도 끝이 있어 사람 사는 곳이구나 했단다. 산은 돌을 골라 땅을 다져가며 길을 찾아야 하는 비포장도로라면, 바다는 잘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같더구나. 그 먼 길을 비행기를 타고만 있으면 싱~ 미끄러지듯 막힘없이 가는 곳이니 말이다. 나는 바다에 뿌려다오 이제 숨 가쁜 산에서 내려와 바다를 타고 어디든 가고 싶구나.”
정애는 절을 찾아오는 사연 많은 인생의 슬픔과 함께 있었고, 그들의 외로운 고통 옆자리에 다소곳하게 머물렀다. 정애는 마지막 날까지 평소와 다름없이 사찰 이곳저곳을 돌보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잠든 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다. 미영은 정애 마지막을 예측이라도 한 듯, 한국에 잠시 나와 있었고, 정애를 닮은 겸손한 ‘0’ 호실 관을 만들어 안장하고 화장해 정애 뜻대로 바다에 뿌려 주었다.
바다를 날아가는 정애가 말하고 있었다.
“미영아, 우리가 온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주어진 생을 다 살아야 ‘0’ 호실 통로를 통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단다.”
오늘은 아이들과 재활용 용기로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을 만들기로 했다. 작업실 테이블 상자 안에 여러 날 모아 씻어 말려 놓은 플라스틱 재활용 용기가 가득 담겨 있다.
피터는 생후 20개월쯤 한국에서 입양해 온 아이였고, 줄리아는 다섯 살 때 길에 버려져 입양됐다. 올리브는 두 번의 파양으로 상처가 많은 아이였지만, 미술치료를 통해 치유되고 있었다. 안젤라는 무서운 파도를 넘어온 난민이었고, 토니는 교통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장애아였다. 미영이 운영하는 아트스쿨은 피부색도 나이도 다양한 아이들이 모이는 치유 공간이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