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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소 날 영재가 보내준 차를 타고 약방 집으로 와 하룻밤 머물고 산으로 들어갔었다.
정애는 오랜 세월 정해진 공간에 갇혀 있었던 터라,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세상에 현기증을 느꼈고, 그런 정애를 배려하듯 운전기사는 천천히 차를 몰기 위해 시골 국도로 가고 있었다. 석철과 은숙이 사는 도시를 지날 때, 영재 차를 발견하고 석철이 차를 가로막았고, 차 속에 낯선 이가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물러났다. 운전기사가 말했다.
“저런 사람 집에서 미영 학생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팔과 다리는 어쩌다….”
“오늘처럼 어른 차만 보면 저렇게 뛰어든다니까요. 우리 차 보고 뛰어오다 다른 차선에서 미끄러져 오는 차를 못 보고 사고가 났지 뭐예요. 사고도 어른 책임이라고 돈을 얼마나 뜯어 갔게요….”
운전기사는 은숙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 구멍가게 앞, 평상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은숙을 가리키며 또 말했다.
“수술할 때만 해도 얼마 못 산다고 했었는데, 사람 명줄은 알 수가 없어요.”
정애는 석철과 은숙 모습을 보며 전생(轉生)의 멍에가 보이는 것 같아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삼십여 분을 더 달려 영재 병원이 있는 소도시에 도착했을 때, 높고 큰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서 영재 병원 건물은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정애는 옛 풍경을 떠 올리고 있었다. 그때는 약방집 3층짜리 병원 건물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변에서 가장 높고 화려했어요. 병원 건물 중심으로 장터와 오밀조밀 모인 약초 가게와 약초꾼들의 노점상이 즐비했고, 그들을 위한 식당과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들로 왁자지껄했었다. 가끔 약방 심부름으로 장터에 나오면 길거리 약장수의 우스꽝스러운 광대 공연을 보다, 심부름을 깜빡하고 정신을 놓고 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봄날 장터에는 시골 할머니들이 산과 들에서 캔 한 움큼 한 광주리씩 가지고 나온 봄나물 향이 약초 냄새를 덮었고, 여름에는 흰 연기를 뿜어내는 모기 약차가 읍내 골목을 다니며 아이들을 끌고 다녔었다. 가을에는 수확한 곡식이 풍성해 곡식을 찧어 떡을 쪄서 각지에서 몰려든 약초꾼과 약방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간식으로 나누었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약방 집에서 차떼기로 산지에서 사 온 배추를 장터에 풀어 주면, 주변 상인과 동네 사람들이 장터에 모여 김장을 하고 뜨끈뜨끈 한 두부와 돼지고기 편육으로 잔치를 했었다. 차갑고 딱딱한 겨울에는 장터에 장작불을 피워 가마솥에서 끓여낸 시래기 국밥으로 상인들 추위와 객지에서 온 손님들의 기다림이 얼지 않도록 했었다. 장터는 약방 집으로 인해 늘 넉넉한 인심이 넘쳤었다. 사람들은 약방 집 어르신을 존경했고,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온 동네가 그를 위해 곡을 했었다.
정애는 어르신이 이른 새벽마다, 아내의 하얀 고무신을 우물가에서 손수 깨끗하게 씻어 물기를 털어 내고, 마른 수건으로 정성껏 닦아 주춧돌 위에 살며시 두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근엄하고 무뚝뚝한 어르신이 아내 고무신을 만질 때만큼은 부끄럼 많은 소년이 되어, 얼굴 가득 주름이 수줍은 너울을 쓴 것 같았었다. 정애가 한 번씩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에 시달려 일어나지 못할 때도 덕재와 영재는 정애 열병을 다스리지 못했지만, 어르신은 침(鍼)으로 정애 열병을 단숨에 잡아주곤 했었다. 집안에서는 어르신 내외 일을 며느리들이 했고, 정애는 잔일을 도우며 가끔 병원으로 심부름 갈 때도 덕재와 영재에게 전하면 되었기에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기억은 없었지만, 정애는 어르신 성품이 인정스럽고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애는 달라진 약방 건물 주변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덕재 부부 묘를 찾아 용서를 구하고 싶어, 바로 산으로 들어가지 않고 영재가 보내온 차를 타고 왔다. 집 앞 커다란 대문 앞에서 정애는 멈칫했다. 오갈 때 없는 자신을 거두어 준 집 안에,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한, 정애는 흙바닥에 큰절을 올리며 눈물을 한참 흘리고서야, 대문을 넘을 수 있었다.
대문 턱을 넘어 들어선 집은 횅했다. 석진의 죽음 이후 숙희는 집안일도 놓아 버렸고, 약방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도 뜸해져 무채색으로 덮인 집안 분위기와 숙희 얼굴이 닮아 있었다.
정애는 덕재 부부 묘를 찾아 한탄(恨歎/恨嘆)의 세월을 탄식했고, 영재에게 부탁해 봉안당(奉安堂)에 모셔 놓은 순득의 유골함을 찾아 산속 양지바른 곳에서 바람결에 유골 가루를 날려 보내주었다. 순득은 동네 할멈들과의 수다에서 당신이 죽으면 몸뚱이도 뼛조각 하나도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바람 타고 공기 속에 스며들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떠나고 싶다고 했었다.
영재 승용차를 타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걸어서 들어온 산은 느리고 무뎌서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복잡하고 분주한 시끄러운 도심 속에 미영이 체구에 딱 맞는 작은 방안에 잠들어 있었다. 출소 후 미영을 만나지 못했고, 숙희와 영재의 연이은 죽음으로 미영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던 정애는 느닷없이 미영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미영의 핸드폰 번호라도 알아볼 생각으로 희영에게 연락을 취했다.
“어쩐 일이세요?”
희영은 정애가 미영을 집에 들인 사람이라 정애에게도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미영이 소식을 좀 알고 싶어서요.”
“걔 며칠 전에 돈 필요하다고 전화 왔길래,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요.”
“무슨 일이 있다던가요?”
“글쎄요, 별로 알고 싶지 않아 물어보지 않고 전화 끊었어요.”
“그러면 미영이 핸드폰 번호라도 좀 알려 주겠어요?”
“번호 지워버렸어요.”
“어디든 찾아보면 연락처가 있지 않을까요?”
“스님, 스님도 이제 우리 집과 연을 끊으시지요. 부모님도 안 계시는데…. 저는 사실 미영이가 스님 아인 줄 알았어요. 큰아버지와 스님이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동생들은 몰랐지만, 저는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이 좀 있었거든요. 근데 미영이 생모가 따로 있는 걸 알고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님 옥바라지를 왜 하셨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어요. 우리 집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미영이도 이제 어른이잖아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산 정리하면서 도대체 이 사람 저 사람 미영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 집 곳간을 축냈더라고요. 앞으로는 스님도 연락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정애는 희영과 통화하고부터 느낌이 더 좋지 않았다. 미영이 희영에게 전화했을 정도면 분명 좋지 않은 상황일 거라 짐작이 되었지만, 미영을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며칠의 시간을 보내며 작은 방에서 잠들어 있는 미영 모습과 주변이 점점 선명해지고 또렷해지는 꿈을 계속 꾸고 있었다. 그때 미영이 감옥으로 보낸 몇 통의 편지를 떠 올렸고, 편지 속에 적힌 핸드폰 번호를 찾아냈다.
첫 면회를 다녀간 미영은 예쁜 그림이 그려진 편지를 몇 통 보내왔었다. 그동안 어리고 사는 게 정신없어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다며 죄송했다는 미영 편지 속에 출소하면 꼭 찾아 달라며 자기 핸드폰 번호를 남겨 주었었다. 정애는 자신이 덕재를 죽이지 않았다면, 미영의 삶이 조금은 달랐을 것만 같은 죄책감으로 미영에게 답장도 연락도 하지 못했었다. 편지에 적힌 번호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미영의 핸드폰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부르 스르르 부르 스르르….
조용한 바람에 섞여 날리는 연약한 빗물은 위태하게 스러질 듯 기울어 두서없이 군데군데 부서진 시멘트 벽돌 담장을 무채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담장 아래 이름 모를 무성한 잡초마저 생령(生靈)을 놓아 버린 듯, 이슬 먹을 기운 없이 널브러져 있다. 어디서 어떻게 존재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는 깨진 플라스틱 용기는 마당 흙더미에 묻힐 듯 말 듯 내동댕이쳐 있고, 가는 바람결에 녹슨 강철 지붕 끝자락의 움직임만이 작은 아우성이 되어 모든 고요에 노크하듯 인기척을 불러 본다. 그리고 소리….
“스님, 스님, 스님...”
미영이 버려졌던 재개발 동네 무너져 내리는 집이 보였고, 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복된 불길한 꿈을 계속 꾸면서 정애는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기억을 살려 그 집을 찾아 나섰지만, 그곳은 고층 아파트가 들어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순득의 집도 찾아가 봤지만, 우물은 울창한 잡초만 무성했고, 집터를 묻어버린 거대한 흙더미만 있었다. 편지봉투에 적힌 주소를 찾았지만,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미영을 찾지 못하고 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待合室)에 앉아 있을 때, 중앙에 켜져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익숙한 그림과 문자들이 보여 정애는 화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폈다. 미영의 흔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