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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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우물가에 넋을 놓고 있던 정애는 미영이 마루에 나오는 소리를 듣고, 정신이 들었다. 우물 속은 고요했고, 순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애는 악몽을 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하고 미영이 나온 방을 살폈지만, 순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상이 있는 방으로 가서 불상 앞에 무릎 굶고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드려,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뱉어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웠던 어머니를 자기 잘못으로 죽음을 맞게 했던 자신 속에 있던 귀신인지 불덩인지 알 수 없는 존재는 그날 아침 정애 몸에서 나가고 없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미영이 있는 방으로 갔지만, 미영의 흔적은 없었다. 정애는 순간 미영도 자기 몸에 붙어 있던 어두운 존재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그때, 어디선가 미영의 인기척이 들렸다. 벽에 문고리가 없는 미닫이 벽장 문이 보였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미영의 연필 쓸리는 소리. 정애는 벽장문 앞에 다가가 미영이 크레파스로 문고리 대신 그려 놓은 어떤 문양에 손을 뻗었다. 순간, 안에서 미영이 먼저 문을 열었다. 정애는 미영이 지난밤에 일을 알지 못하게 해야 했고, 순득의 시신이 떠 오르기 전에 영재와 숙희에게 미영을 부탁하고 와야 한다는 다급함으로 미영을 데리고 집을 빠져나왔었다.




영재와 숙희는 종종 정애 면회를 다녀가며 미영의 근황을 전해 주곤 했었다.

“이불에 오줌 싼다고 언니들이 구박을 좀 했나 봐. 며칠 전에는 글쎄 화장실 변기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자고 있는 거야. 석진 아빠 불러서 미영이 안아다 방에 눕혔더니, 자기 오줌 싸면 희옥 언니도 싫어할 거라고 욕실이 깨끗해서 자도 괜찮다고 하는 거야. 우리가 오줌 싸도 괜찮다고 진정시키는데, 한참 걸렸어. 다음 날 둘째 희옥이를 따로 불러서 용돈 올려 준다고 잘 꼬셔서 밤에 한 번씩 미영이 화장실 좀 데려가라 타일렀더니, 좋다는 거야. 희옥이도 등치만 언니지, 우리가 웃겨서….”

숙희는 미영이 언니들의 냉대를 그런대로 견뎌 보려는 의지가 있다고 했었다.


미영은 아침마다 순득의 쌍스러운 욕을 들어도 순득의 진심을 보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어느 날 순득이 미영에게 물었었다.

“할미가 맨날 욕이나 퍼붓고, 맛난 과자도 못 사 주는데, 그래도 할미 집에 살 거야?”

그런 순득의 물음에 미영은 순득 품을 파고들며 순득 입안에 사탕을 넣어 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느 해에는 순득이 살던 동네가 홍수가 나, 집마다 물을 퍼내느라 다들 화가 난 사람들밖에 없었다. 구석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미영의 종이 속 그림에는 집마다 고인 물이 집마다 쌓인 곡식 포대로 그려 놓았었다. 사람들은 미영의 그림을 보고 그림의 떡이라도 좋다며 한바탕 웃었던 적이 있었다. 정애는 그런 미영을 보며 세상의 그늘보다는 빛을 찾으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라 생각했었다.


“미영이가 학교 대표로 나간 전국 미술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잖아. 얼마나 기특하던지…. 미영이는 그림도 잘 그리지만, 글도 참 잘 쓰는 것 같아.”

“형님이 어릴 때 딱 미영이 같았어요. 핏줄은 못 속인다더니…. 근데, 미영이가 그림이나 노트에 새기는 문양인지 글잔지 뭔가 자신만 알고 있는 암호 같은 표시가 있던데 정애는 알고 있나?”

숙희와 영재는 미영이 자기 것이라 여기는 소지품에 어떤 문양을 표시해 두는 습관이 있다며, 그 문양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었다. 정애는 어떤 모양인지 알 것 같았지만, 뜻은 알지 못했다. 미영은 글자를 알지 못했을 때부터 자기만 알아볼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그림일기를 쓰듯 써 놓은 것들이 많았었다. 어느 날 정애가 미영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런 모양은 글자야? 문양이야?”

아무도 자기 글자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정애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듯하더니, 손가락으로 문양을 짚어가며 말해 주었었다.

“하얀 것들은 하얀 것끼리, 파란 것들은 파란 것끼리, 빨간 것은 빨간 것끼리만 놀면 심심해요. 이것 보세요. 하늘에도 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과 노랗게 빛나는 해님이 같이 있어야 하늘이 예뻐요. 우리 담장에도 흙이랑 돌덩이와 깨진 기와장이 같이 있어서 벽이 튼튼해요. 스님 얼굴에도 모양이 다른 눈, 코, 입이 있어야. 예쁜 얼굴이 돼요.”

정애는 미영의 설명에도 미영이 그려놓은 문양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저 자기만의 문자 모양을 만들어 사용하는 미영이 놀라웠다. 겨우 다섯 살 어린아이가 세상을 관찰하고 자기 언어로 기록할 수 있는 미영은 분명 특별해 보였었다.


석진의 사고 이후 혼자 면회 온 영재는 미영을 생모에게 보냈다는 말을 꺼내며 잠시 말을 잊지 못하고 두 눈이 붉어졌었다. 미영을 보내고 집 곳곳에 미영이 표시해 둔 문자가 눈에 띌 때마다 가슴이 무거워진다고 했다.

할머니 당부로 마당 화단에 물을 주며, 약한 물줄기로 물을 뿌려 줘야 하는 봉숭아꽃 아래 화단 벽돌에, 무더운 여름이면 세숫대야에 차가운 물을 받아 뒷마당 지붕 처마 끝에 앉아 발을 당구고 책을 보던 미영은 자신이 앉았던 돌에도, 언니들의 냉대가 참아지지 않아 혼자 숨어서 울던 헛간 나무 기둥에도, 숙희가 빨래를 빨아 널던 뒷마당 빨랫줄 올리는 기다란 장대에도, 장독대 옆 감나무에도, 대문 한쪽 구석에까지…. 미영은 그 집에 스며들기 위해 자신의 흔적을 구석구석 새겨 놓았었다.




정애는 출소 이후 절에 들어와 가장 낮은 곳에서 험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숙희 죽음은 영재 사고 소식을 접하고 장례식을 찾았을 때 알게 되었고, 정애는 옛 기억을 회상하며 숙희와 영재의 성불을 빌었다.

정애가 약방집 식모로 왔을 때, 숙희와 영재는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분가해 따로 살며 자주 오가고 있었다. 덕재 아내는 덕재의 예측할 수 없는 독특한 성격과 문란한 생활로 늘 신경이 곤두서 예민했고, 덕재에 대한 화를 어린 정애에게 풀 곤 했었다. 어느 날은 덕재가 식사하고 남긴 상에 올려진 고기 몇 접을 그냥 먹었다고, 어떤 날은 학교에서 좀 늦었다고, 입은 옷이 더럽다고, 덕재가 주머니에 있는 동전이 성가시다고 정애에게 준 것을 받았다고, 먹다 남은 과일을 먹었을 때도 그냥 버렸을 때도…. 그녀는 정애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고, 정애와 마주치면 뭐든 꼬투리 잡아 사나운 말로 몰아세웠었다. 그날도 자기가 벗어 놓은 삐뚤어진 구두를 제대로 다시 놓지 않았다고 정애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참다못한 숙희가 정애에게 방에 가서 숙제하라고 보내며, 그녀에게 한마디 했었다.


“형님, 정애 저 어린아이가 무슨 죄라고 허구한 날 애한테 화풀이하세요? 형님 어려운 마음 온 식구가 다 알아요.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고생하고 있는 힘없고 약한 정애 같은 아이에게 그러시면 나중에 벌 받아요.”

“동서가 뭘 안다고 그래? 정애야, 정애야.”

숙희 말을 개의치 않고 그녀는 정애 이름을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고, 겁에 질려 다시 뛰어나온 정애를 숙희가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날 숙희는 정애를 데리고 읍내 시장에 가서 예쁜 원피스와 구두를 사 주었고, 길거리 찐빵도 같이 먹었다. 늦은 저녁에 집에 데려다주며 숙희가 말했었다.

“정애야, 힘들어도 학교는 꼭 다녀야 한다. 집안일 많다고 학교 못 가게 하면, 작은 사모님이 학교는 꼭 가라고 했다고 말하고 그냥 학교로 가 버려 알았지?”


살아야 할 생(生)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영재와 숙희를 위해 정애는 일 년여간 무언 수행으로 그들의 업을 조금이나마 자신이 짊어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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