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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 집 언니들을 떠올렸다. 언니들에게 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싫었지만, 미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첫째 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 미영이에요.”
“우리가 통화해야 할 일이 있니?”
“저기…. 언니, 돈이 좀 필요해요.”
“뭐라고? 돈이 필요하다고? 정말 얼굴도 두껍다. 내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동안 네가 가져간 돈 내역을 봤더니, 기가 차서…. 술주정뱅이 그 이상한 아저씨가 수시로 아버지 찾아와서 술값 받아 가고, 집사 주고 가게까지 얻어 줬더니 다 날리고, 너 대학 입학 때까지 학비며 생활비도 꾸준히 보내줬던데…. 너 어떻게 전화해서 돈 이야기를 할 수 있니? 그만큼 우리 집 풍비박산 냈으면 너는 지금 숨도 쉬지 말고 살아야 해. 다시는 연락하지 마.”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희영의 전화를 뒤로하고 둘째 희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저 미영이에요.”
“너 웬일이냐? 아버지 장례식에도 안 와서 이제 우리 집안하고 영 끝인 줄 알았는데? 큰 언니에게도 그렇게 들었고….”
“저기, 제가 상황이 좀 있어서, 돈이 좀 필요해요.”
“뭐라고? 나는 네 얼굴도 기억 안 나…. 뜬금없이 연락 와서 돈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리고 우리 집에서 그렇게 도움받고 살았으면 지금쯤은 알아서 살고 있어야 하지 않니? 못 들은 걸로 할게.”
둘째 희옥과 미영이 통화하는 사이 첫째 희영은 넷째 희애와 막내 희선에게 연락해 미영이 돈이야기 할 거라는 말을 전했고, 응대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터라 둘 다 미영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미영은 분명 거절하리라는 것도, 가슴 아픈 말을 들으리라는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같은 집에서 자매로 살았는데, 한 명이라도 자신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숙희에게서 돌려받은 상자 속 진실을 대면하면서 영재에 대한 마음도 숙희와 함께 보냈었다. 미영은 숙희와 영재에게서 부모를 느끼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는 자기 욕심이었음을 알게 된 것처럼 낙심된 마음이 아물기 전에 영재 사망 소식을 접했었다. 언제나 의무감이 느껴지는 물질로 자신을 돌보려 했던 영재에게 미영은 아버지를 느끼고 싶었던 자신을 자책했었다. 마지막 가는 순간만이라도 형 핏줄 조카, 자기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훌훌 털고 떠나기를 바라며, 영재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 영재 마음이 의무적인 물질만은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사실 희영은 미영이 돈 이야기를 꺼냈을 때 마음 한편이 뜨끔 했다. 미영은 큰아버지 덕재의 핏줄이기 때문에 변호사 희애 말로는 미영이 유류분상속권을 찾겠다, 작정하면 법적으로 상속권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했었다. 미영은 영재 호적에 올라 있었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미영이 큰아버지 덕재 손(孫) 임을 증명할 증거는 차고 넘쳤다. 종가 재산은 차남 영재의 첫째 손 희영보다, 장남 덕재의 첫째 손 미영에게 상속 권한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미영이 상속권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상속 포기 서류에 순순히 사인해 주었었다. 희영은 지금이라도 미영이 권리를 행사하려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어, 미영에게 더 모질고 차갑게 굴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미영이 잘 살아 낼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정애 전화를 받고 급히 나간 아버지와 엄마가 미영을 데리고 들어와 희영과 희옥, 석진과 희애, 희선을 불러 앉혀 놓고 미영을 소개했을 때, 희영은 미영이 본능적으로 생존 의지가 강한 아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미영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어떤 기에 눌리는 것 같았었다. 석진의 죽음 이후 툭하면 찾아와 대문 초인종을 눌러댔던 미영이 억수 같은 빗줄기가 퍼붓는 날도 온종일 대문 앞을 지키고 서서 용서를 구하던 초등학생 어린 미영을 보면서 희영은 몸서리쳐지도록 미영이 독해 보였었다. 희영의 모진 언행은 미영으로부터 처절하게 분리되고 싶은 본능에 가까웠다.
미영은 마지막으로 예전에 일했던 미술학원 원장을 찾았다.
“오랜만이네….”
환하게 웃어주는 원장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미영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난 몇 주간 어디에도 자기 답답한 처지를 말할 곳을 찾지 못했고, 자신을 거부하는 듯한 얼굴과 말만 들었던 터라 편하게 맞이해 주는 원장 모습에 눈물 둑이 터져버렸다.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 주는 원장 말에 미영의 눈물 줄기는 멈출 줄 몰랐고, 미영이 진정될 때까지 원장은 기다려 주었다. 마음을 추스른 미영이 그간의 상황을 대충 설명했고, 지금 당장 지낼 곳이 없어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장은 미영에게 현금을 있는 대로 털어 주었고, 수업할 수 있는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학원 강사로 다시 수업하기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장 아내가 찾아와 무턱대고 미영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 마구 때리며 말했다.
“내가 너 같은 년 좋은 일 시키려고 학원 차려준 줄 알아?”
원장의 외도를 의심한 아내가 그 상대가 미영이라 오해하고 미영에게 패악을 부리고 있었다. 다른 선생들과 학생들이 뜯어말렸지만, 그녀는 그날 미영을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고, 미영은 변명도 방어도 할 틈 없이, 그냥 죽음을 맞고 싶은 듯 맞고만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원장이 아내를 데리고 나가면서 끝이 난 폭행은, 미영이 그동안 견뎌내려 다잡고 있던 티끌 같은 마음마저 산산조각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그날의 폭행은 미영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서뜨리고 정신적 분열 (dissociation of consciousness)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었다. 미영에 대한 오해는 풀렸지만, 원장 아내는 그간 믿음을 주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불신으로 앞으로 미영에게 다른 마음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호소했다. 그리고 미영에게 남편이 미영을 안타까워 마음 써 주는 것도 신경 쓰여 싫다고 말하며 학원을 나가 달라 부탁했다. 지금 만나는 여자도 예전에는 원장의 제자로 학원 보조 강사였다며….
미영은 다른 학원 자리를 알아보았지만, 그날 학원 실기실에서 그녀에게 당한 폭력의 수치는 시각적 언어가 되어 지켜본 학생과 교사들의 입을 통해 미영이 원장의 내연녀라는 오해는 어느새 진실인 것처럼 말이 떠돌고 있었다.
미영은 거대한 힘을 가진 뭔가가 자신을 정해놓고,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었다. 무엇을 해도 그 힘이 막아 버릴 것 같았고, 누군가가 자신을 도우려 해도 철저하게 차단해 버릴 것 같은…. 미영은 생각하고 떠올려 보기를 반복하고 반복했다. 자신이 이런 벌을 받아야 할 만큼 지은 죄가 무엇인지. 순득에게 긴 울음을 멈추지 않고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서, 자신을 돌봐 준 영재와 숙희를 너무 사랑해서 그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종종 마음 상해 서운해했던 일, 냉대하는 언니들을 헛간에 숨어 원망하고 미워했던 일, 병든 은숙을 정아처럼 가슴으로 안타까워하지 못해서, 석철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으로 보았던 시선…. 그래도 미영은 억울하고 분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 과정에서 그런 것들만 있었던 것이 아닌데, 죽을힘을 다해 세상의 빛을 찾아보려 노력했고, 그곳을 향해 뛰어왔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라면, 세상이 이런 곳이라면 이런 세상에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미영은 쉼을 얻고 싶었다. 온몸이 늘어져 꼼짝할 수 없었고 숨을 쉴 기운도 없었다. 미영은 자신의 모든 것이 분열되어 녹아내리는 것 같은 혼란의 궁창(穹蒼) 허공에 떠다니는 글귀를 잡고 있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쉼을 얻고 싶나요?
당신만의 방을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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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그렇게 ‘0’ 호실에 입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