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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구 아버지는 상구에게 미영이 처한 상황을 듣고, 모든 것이 미영의 탓이라 말했다. 그리고 미영의 돈을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그 애가 우리 집과 엮이면서 가게가 엉망진창 됐어. 내가 말했지? 걔는 부정 탄 재수 없는 애라고….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왜 돈을 돌려줘?”
그는 상구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집을 정리한 돈을 미영에게 돌려주지 않고, 다른 도시로 이사해 버렸다. 상구는 그런 아버지 행태에 대해 미영에게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아버지를 따라가지도 않았지만, 미영에게 연락을 취하지도 않은 채 홀로 도심 고시원으로 숨어버렸다.
낯선 나라에서 언어도 문화도 다른 환경이었지만, 미영은 셰어하우스에 방 한 칸을 얻어 미술 과외를 시작했다. 한인사회에서 미영 미술 과외 수업이 알려지면서 한국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지만, 상구가 보내주기로 한 돈이 와야 장기 체류를 위한 학교 등록을 할 수 있었지만, 상구는 소식을 끊었고 돈을 보내오지 않았다. 미영은 짧은 비자 기간이 끝나 한국에 입국할 수밖에 없었고 상구를 찾았지만, 상구의 행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미영은 캐리어를 앞에 두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멍하니 도로를 바라보았다.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은 쏟아 내지 못하고 굳어 얼어 버린 자신의 눈물 같았고, 눈 속을 오가는 차들은 미영의 눈물을 외면하고 스쳐 가는 차가운 바람이 되어, 매서운 추위를 만들어 미영 마음을 더욱 꽁꽁 얼게 했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어 무엇 때문에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해쳤는지 알 수 없었다. 미영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동이 틀 때까지 도로 버스 정류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버스 첫차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나온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미영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미영은 잠시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일으켜 캐리어를 끌고 대로변 인도를 걸었다. 정해놓은 곳 없이 그냥 걷고 걷다, 짙은 커피 향에 이끌려 들어간 커피숍에서 뜨거운 블랙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 녹아내린 몸이 녹듯 굳었던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옆에 있던 외국인 여행객 몇 명이 미영에게 다가와 또 물었다.
“당신 괜찮아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미영은 어설픈 한국말을 어렵게 하며 관심 가져 주는 외국인에게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그 여행객이 찾고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안내하며 미영도 그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렀다.
그리고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몇 되지 않는 학교 때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응, 미영이구나. 잘 지내지? 사는 게 전쟁이다. 돈 때문에 남편하고 매일 싸우고 애들은 클수록 말을 안 들어. 남들은 내가 남편 벌어다 주는 돈 쓰면서 전업주부로 산다고 하면 팔자 좋다고들 하는데, 나는 미영이 네가 부럽다. 내가 직접 돈을 벌어야 쓰는 것도 마음 편하고 바깥일을 해야 뭔가 하는 티가 나는데, 집안일은 생색이 안 난다니까….”
“미영 선배,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방송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더니 학교 후배들은 다 잊었죠? 신문에 난 연예인 이야기 정말이에요? 선배는 멋진 연예인 들도 매일 보고 아무튼, 부러워요.”
“미영아, 너 회사 그만뒀다는 이야기 건너 들었는데, 좋은 집안에 시집가니? 너는 결혼해도 일은 계속할 것 같았는데, 아니야? 그럼 다른 회사 가려고? 너는 학점도 좋고 이력이 있으니까, 경력직으로 더 괜찮은 회사 갈 수 있겠다.”
“너 유학 갔다며? 언제 한국 들어왔니? 나도 학교 때 한 학기 뉴욕에 있었잖아…. 그때 그냥 계속 공부를 더 할 걸 후회돼. 언제 다시 들어가니?”
미영은 학교 지인들에게 자기 모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 그제야 와닿았다. 아니, 미영은 사실 그 왜곡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진실보다 그 왜곡된 자기 모양이 어쩌면 더 낫다고 여기고 누구에게도 솔직한 자기를 보여 주려 하지 않았었다.
약방 집 딸로 살았던 미영을 약방 집 어른을 대접하듯, 공손하게 때론 비굴하기까지 했던 사람들과 술주정뱅이 분식집 딸로 살았던 미영을 석철을 대하듯 무시했던 사람들은 같은 공간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린 미영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자신을 달리 대하는 사람들을 겪으며 누구에게도 자기 이야기를 편히 할 수 없었다. 학교 친구들은 지방에서 올라온 미영이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뭐든 잘하려고 하는 욕심 때문이라 여겼었다. 가끔 학교 앞에서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자가용을 타고 기다리는 영재와 숙희 모습은 미영이 최소한 폭력과 질병이 뒤엉킨 궁핍 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해 주는 것 같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치열하게 산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었다. 미영은 주변 친구나 동료들이 자신에 대해 깊이 알게 되는 순간 변명이나 설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었다. 왜곡된 소문을 진실인 것처럼 침묵을 선택했던 자신을 들키는 그런 날을 마주하는 날이 가장 수치스러울 것이라 여겼었다.
미영은 학교 친구들에게 지낼 곳이 없다고, 돈 좀 빌려 달라는 말 한마디 못 하고 그들 하소연만 듣고 끊었다.
다녔던 방송국에 찾아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재판 패소했다며? 어떡하니…. 그래도 미영 씨 유능한 사람이니까 다른 일 할 수 있을 거야. 애들이 클수록 돈 먹는 하마야. 나는 월급날 되면 애들한테 바로 압류당한다니까….”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는 곳 알아봤는데, 파산한 사람은 부정적으로 말하더라, 어떡하냐? 그래도 미영 씨 그림 그리는 재주 있으니까, 어디라도 받아 주는 곳이 있지 않겠어.”
“미영 씨 퇴사하고 회사로 미영 씨 찾아오는 이상한 사람들은 없는데, 따로 미영 씨 괴롭히고 그런 건 아니야? 조심해요. 그런 사람들은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하더라고….”
“미영 씨 다른 가족들하고 합심해서 잘 이겨내길 바라요.”
미영의 회사 생활은 특별히 관계가 나쁜 사람도 없었지만, 속을 나누며 깊게 교제한 사람도 없었다. 주어진 일에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 모습으로 인정받고 승진도 빨랐지만, 일 외적으로 사적 관계를 만든 동료는 없었다. 깡패 같은 사채업자들이 회사를 휘젓고 다니며 조미영을 찾기 전까지는 미영의 존재는 조용한 직장인이었다. 같은 부서 동료들은 미영의 자존심을 지켜주려는 배려와 혹 잘못 엮여 곤란해질까 하는 두려움으로 사채업자들에게 반협박당하는 미영을 다들 애써 무심한 척했었었다.
미영은 학교생활에서도 회사 생활에서도 사람과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에 시간과 마음을 할애하지 못했었다. 목적 없이 만나는 관계가 없었고, 관계 속에서 나누는 평범한 일상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미영에게는 불필요한 시간이라 여겼었다. 사적 모임에 오라는 콜은 많았지만, 미영은 그다지 자신의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고 무심히 넘긴 적이 많았었다. 회사에서도 지낼 곳이 없어 돈이 필요하다고 입을 떼지 못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