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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얽히고설켜 있던 자기 인생 속에 있었던 사람들을 덜어내고 보내며, 외로움을 잊기 위해 주어진 일에 더 열심을 냈고, 회사 조직에 충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월급 통장에 압류가 들어왔고, 살던 집도 법원으로부터 압류 절차에 들어간다는 통보를 받았다.
석철은 정아가 태현을 데려와 살림을 차렸다고 했을 때, 탐탁지 않았으나 석철과 은숙을 자기 부모라 여기고 보살피겠다는 자신만만한 큰 소리를 믿었었다. 은숙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가끔 찾아와 아들 노릇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비도 꾸준하게 보내왔었다. 하지만, 은숙 장례를 치르고 태현이 자기 부모를 모시고 살기 시작하면서 보내오던 생활비도 끊고, 얼굴 비치는 일이 없어졌다. 은숙이 죽고 혼자 남은 석철은 정아에게 빌붙어 살 요량이었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는 정아는 석철을 보살필 여력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몇 차례 정아를 찾아가 행패를 부렸지만, 소용없었다.
석철은 빈 술병이 나뒹굴고 집 살림살이가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황폐한 집안을 둘러보며 은숙을 떠 올렸다. 사고로 팔다리를 잃고, 혹 은숙이 무허가 요양원이나 노숙인 구금 시설에 버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은숙은 불편하고 흉해진 석철 몸을 닦고 씻기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었다. 석철은 그런 은숙을 떠보기 위해 물었었다.
“병신 된 서방 씻겨서 어디다 갔다, 버리려고?”
“인간아,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답게 좀 살아. 나 아니면 누가 당신 거두겠어? 내 몸도 이래서 언제까지 당신 봐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이 당진 몸이라도 거두고 살아야지.”
석철은 은숙 사망 신고접수 서류가 들어 있는 누런 봉투가 눈에 들어왔고, 봉투 속 서류를 꺼내 은숙을 바라보듯 보았다. 은숙 장례를 치르고 사망신고를 접수하고 화장터에 가서 화장하는 비용을 낸 미영의 카드 영수증과 신분증 사본이 같이 들어 있었다. 사실 미영은 은숙을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약방 집 아이로 불리며 자라서인지, 이상하리만큼 약방 집사람들 분위기를 고스란히 풍기고 있었다. 미영에게 언제부터인가 석철은 자기도 모르게 미영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었다. 사진 속 미영은 왜 이리도 단단해 보이는지…….
석철은 이웃들조차 동네 흉가로 여기는 빈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며 외상 술이라도 얻어 허기짐을 달랠 곳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도 석철에게 동정(同情) 어린 시선조차 주지 않았었다. 그때 길거리에서 신용카드 발급 영업하는 여인이 처음으로 석철에게 관심을 주며 말을 걸었다. 그 여인의 조력으로 미영의 이름으로 여러 장의 신용카드를 만들어 수십억 원의 대출을 받았지만, 그 여인은 돈만 챙겨 달아나 버렸다. 석철은 카드 돌려 막기를 하다 카드 빚을 갚기 위해 카드깡에 사채까지 끌어다 쓰면서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잠적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미영은 석철 행방을 찾기 위해 정아를 만났다. 정아는 태현에게 구타당해 성한 곳 없는 몸으로 미영 앞에 나타났다.
“너 이게 무슨 꼴이야? 태현이가 이랬어?”
“상관하지 마, 그 사람 술만 안 마시면 괜찮아.”
미영은 정아 모습에서 은숙을 보는 듯해 답답했지만, 정아는 그런 태현이 술만 아니면 뭐든 최선을 다하는 좋은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
석철이 여러 번 정아를 찾아와 돈을 요구했고, 정아는 태현 몰래 몇 차례 이웃에서 돈을 빌려주었지만, 석철의 요구가 잦아지고 술주정으로 동네를 떠들썩하게 하면서 태현에게 들키고 말았다. 태현은 석철에게 무자비한 주먹을 휘둘렀고, 석철은 병원 치료를 받던 중, 태현이 자기를 정신 병원에 보내기 위해 절차를 밟는 것을 알게 되어, 행방을 감추었다고 했다. 이후로 정아에게도 소식이 없다고...
미영은 자신의 동의 없이 발급된 신용카드와 대출은 자기 책임 의무가 없다고, 자기가 인지하지 못한 빚으로 월급과 집 압류에 대해 부당하다며 여러 금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치열하고 긴 공방 끝에 패소하고 말았다. 미영은 살던 집과 몰고 다니는 차를 처분했고, 회사 월급도 고스란히 압류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석철이 행방을 숨기고 다니면서 미영 회사 이름을 팔아, 미영 이름으로 사채를 쓰면서 사채업자들이 미영 회사까지 들이닥치고 말았다. 미영은 석철을 경찰에 신고도 해 봤지만, 석철의 행방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아무 때나 미영을 찾아와 험한 언행으로 미영을 괴롭히는 사채업자들로 인해 미영의 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더는 버틸 방법이 없어 회사에 사표를 내야 했다.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 수입이 끊어진 미영은 별수 없이 법원에 파산 신청과 동시에 파산 선고를 받았고, 모든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석철은 태현의 주먹이 무서워 정아 주변에 다가가지 못했고, 태현이 자기를 찾아내 정신 병원에 강제로 넣어 버릴 것 같아 시골집으로도 가지 않았다. 석철은 미영의 이름으로 사채를 얻어 노름방을 전전하다, 카지노 주변 거리 부랑자로 떠돌았다. 추운 겨울 석철은 제대로 먹지 못해, 거리에 쓰러져 보호 기관으로 보내졌고, 여러 검사 결과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석철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정아에게 전해졌지만, 정아는 태현의 눈치를 보며 석철을 부양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며 석철을 외면했다. 석철은 햇살이 내리쬐는 하얀 병동 침대에 누워 딸 정아가 아닌, 미영을 떠 올리며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와 한없는 회오(悔悟)의 눈물을 머금은 채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미영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실이 막막했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야 할 생명이었던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 이유를 알게 될 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의 꿈틀거림을 거부하지 않았다.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자신을 믿었다.
희영이 미국 유학길을 떠날 때, 숙희는 슬퍼하지 않았었다. 넓은 세상에서 큰마음을 품는 사람이 되어 오라고 했었다. 미영은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자신도 숙희가 들려주었던 넓은 세상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지금이 그 마음을 먹을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영은 한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바닥부터 시작하기 위해 해외로 나갈 생각을 하고 상구를 찾아갔다. 상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빌려준 돈 일부라고 갚아 달라 말했고, 상구는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아둔 몇백만 원을 먼저 미영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집 보증금을 정리하는 대로 미영에게 빌려 간 돈을 돌려주겠다 약속했었다. 미영은 상구 말을 믿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