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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은 상구와의 이별에서 받은 상처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성장 과정으로 지금의 자신을 판단받아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어리고 약해 어떤 변화를 모색할 수 없었던, 어린 미영을 지금의 자신에게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묻는 듯한 시선과 관계의 깊이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하는 사회 속에서 지금의 모습은 과거의 대변인 격으로밖에 살 수 없는…. 그런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극심한 우울감이 밀려들며 미영은 자신이 치열하게 가꾸고 만들어 온 삶의 시간마저 아무 의미 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미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떤 몽환에 빠져드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르는, 아무것도 떠올려지지 않는….
“제발 죽어버려. 그냥 죽으라고.”
그리고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미영의 머리카락 가닥가닥 끝마다 매달려 울려댔고, 몸 구석구석 혈관을 타고 미끄러지듯 온몸을 휘저으며 노래하듯 난리 쳐 댔다. 어느 날은 작게, 어떤 때는 아주 크고 요란하게 미영에게 야단치고 패악을 부렸다. 소리는 점점 사악하게 울렸고, 사악함의 칼날은 미영의 몸에 흉하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새기고 있었다. 미영은 그 소리에 잡혀, 곧 허물어져 가는 빈집 무채색 시멘트 벽돌 아래 깔려 죽을 것 같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집에서 얼룩덜룩한 핏기 어린 오물을 입은, 사람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뭔가를 길고양이 몇 마리가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득의 인기척으로 고양이들이 주변으로 사라지고 드러난 것은 꼼지락대는 생명이었다. 순득은 급히 자신의 낡고 구멍 난 반소매 면러닝을 훌러덩 벗어 생명을 감싸고, 젖가슴을 드러낸 품에 생명을 부둥켜안고 온 길을 다시 내달려 집으로 왔다. 물을 데워 생명을 씻기고 닦으며, 밥풀을 끓여 물에 풀어 배꼽만 한 입술에 묻히기를 밤새 반복했다. 햇살이 드리우는 방안에 생명의 옹 아림이 거센소리가 되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순득은 그제야 움직임이 많아진 생명을 보고 웃었다.
미영은 꿈을 꾼 것인지 환상을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경험을 통해, 자신을 괴롭히는 그 소리를 이길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욕구가 솟구쳤다. 이불 안에서 나와 더운물로 샤워하고,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할머니, 나 죽지 않을 거야. 내 영혼이 죽길 바라는 어떤 어둠도 이길 거야.”
미영은 병원을 찾아 우울증 치료를 받았고, 멍한 미영의 모습을 깨고 나왔다.
늦은 퇴근으로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낯선 승용차 한 대가 집 앞에 있었다. 상구가 내렸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미영아, 정말 미안한데….”
1년 만에 만난 상구 모습은 불안해 보이는 초췌한 모습이었고, 승용차 안에는 상구 부모님이 타고 있었다. 상구 아버지가 운영하던 고깃집이 잘 되면서, 사채까지 끌어와 과도한 확장 투자를 했고, 덩치가 큰 가게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부도를 막지 못했다. 상구 아버지는 사업 실패 충격으로 뇌경색으로 쓰러져 마비 증상으로 거동이 불편했고, 상구는 부모님을 모시고 빨간딱지가 붙은 집을 나와 모텔을 전전하고 있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갈 곳이 없었던 상구는 가진 돈이 떨어지자, 혼자 사는 미영을 찾아왔다. 미영은 상구 가족을 보면서 은숙과 여인숙 월세방을 전전했던 시절이 떠올라, 상구에게 집을 내어주고 자신은 간단한 짐을 챙겨 회사 숙직실로 왔다.
다음날 회사 앞으로 찾아온 상구에게 미영은 그동안 모아두었던 거액의 돈을 빌려주었고, 상구는 그 돈으로 부모님과 지낼 수 있는 작은 집을 얻어 나갔다.
“미영아, 네 얼굴 볼 면목이 없다. 꼭 갚을게….”
미영은 어린 시절 언제나 자기편이 되어줬던 상구를 다시 만났을 때, 변함없이 선한 성품을 지닌 상구여서 참으로 좋았었다. 연인이 아닌 마음 따뜻한 옛 친구에게 그 정도 도움은 줄 수 있다, 여겼다. 상구가 돈을 갚지 못한다 해도, 자신이 외롭고 힘들 때 찾아와 연인이 되어, 많은 시간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상구를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