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愛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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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유난히도 춥고 외로웠던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눈부신 봄 햇살이 차갑게 닫혀버린 미영의 마음을 서서히 녹여내고 있었다. 외로움을 추위를 견뎌내는 심정으로 마음의 봄을 기다리며 일에 매달려 살고 있던 미영에게 다소곳하게 내리는 봄비처럼 사랑이 들어와 있었다.


봄비가 내리는 어느 날, 미영은 공개방송 촬영장 스케치를 위해 서울 명문대 캠퍼스를 찾아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수줍게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성큼 다가와 있는 봄 내음을 만나고 있었다.

미영이 서 있는 건물 계단 아래에 휠체어를 탄 남자가 비에 젖은 계단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쉬고 있을 때, 멀리서 남자를 부르며 뛰어오는 다른 남자가 보였다.

“형, 나하고 같이 오자니까, 모임 장소 변경된 거 모르고 왔지?”

“응 상구야 왔어. 알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왔지 뭐야. 주차하면서 아차 싶더라고….”

상구는 학교 선배로 보이는 장애인 남자를 업고 계단을 올라와 남자를 건물 기둥에 의지하게 해 두고, 다시 내려가 휠체어를 번쩍 들고 올라왔다. 미영은 상구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지만, 무심코 넘겼다.

“상구 너 연수원 생활은 어떠냐?”

“형도 알잖아요. 내가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거.”


상구는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상구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그날도 연수원 수업을 빼먹고 학교 다닐 때 활동했던 바둑 동아리 선후배들 모임 참석차 오랜만에 학교에 왔고, 미영을 만났다.

“혹시 미영이 아니야?”

상구가 몇 발짝 옆에 서 있는 미영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

“나 상구야. 너는 나보다 어렸을 때라 기억이 없나? 우리 어릴 때 같은 동네 살았는데….”

상구는 억지스레라도 미영의 기억을 찾아 올리려는 듯, 어릴 적 살았던 동네 환경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하고 있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상구 기억나….”

“기억나지? 너는 어릴 때도 그러더니 항상 말이 짧다. 내가 너보다 두 살 정도 많은 오빠지 아마….”

“아 그래요?”

“그렇게 바로 고쳐서 말하니까, 거리가 저만큼 멀게 느껴진다. 연락처나 좀 줘.”


상구 아버지는 순득의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했고, 그 동네에서는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었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하게 자랐지만, 특유의 부지런함과 몸에 밴 절약으로 판자촌 구멍가게에서 종잣돈을 모아 유통 사업을 시작해 꽤 많은 돈을 벌었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 와서 제법 큰 고깃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상구를 명문대 법대에 진학시켜 판사가 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아들 상구는 사사건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고 자주 언성을 높여 부딪치고 있었다. 상구는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어머니 사랑 속에 있었지만,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반항심을 품고 자랐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욕구를 누르며 빨리 어른이 되길 기다렸다. 어머니 간곡한 부탁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법대에 진학해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지만, 상구는 부모 몰래 다른 대학 전자공학과에 늦은 나이에 입학해 다니면서 컴퓨터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었다. 법대 시절 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바둑을 두었던 상구는 국제 바둑대회에 나가 우승한 적도 있을 만큼 꽤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졸업 후 가끔 학교 동아리 방에서 동아리 선후배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동아리 졸업생들 모임이 있어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고 운명처럼 미영을 만나게 되었다.


다섯 살 미영이 상구네 가게에 와서 사탕을 고르고 있었고, 일곱 살 상구는 아버지 성화로 매일 해야 하는 학습지를 풀고 있었다. 미영이 사탕과 캐러멜이 있는 주변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상구 아버지는 사탕 하나 고르는데 뭐가 그리 오래 걸리냐고 닦달했다. 미영은 꿋꿋하게 고민할 만큼 하고서야 작은 사탕 봉지 하나를 집어 들고 나와 말없이 동전을 올려놓고 갔다.

“아이고 어린 게 어른이 무슨 말을 하면 얼른 고르고 갈 것이지. 무당집에서 자라서 그런가 조막만 한 게 기(氣)가 세다니까….”

가게에 오는 동네 아이들은 상구 아버지가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면, 상구 아버지 눈치를 살피며 급히 골라 계산하고 나갔고, 누구도 그의 타박에 맞서는 듯한 행동과 표정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미영은 달랐다.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가게에 올 때마다 누가 가게를 지키고 있던, 어떤 상황이든 흔들림 없이 머물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없을 때는 그냥 나가는 날도 있었다. 상구는 아버지 숨소리에도 눈치 보며 긴장하고 사는, 새가슴인 자신에게는 없는 강단(剛斷) 있어 보이는 미영이 대단해 보였고 좋았다. 그런 미영이 한 번씩 눈물을 쏟을 때면, 큰 댐이 허물어져 갇혀 있던 물이 한꺼번에 범람하는 것 같은 거대한 슬픔이 느껴져 상구도 담벼락에 기대어 미영 눈물 소리에 풍덩 빠져버렸었다. 어느 날 사라진 미영이 궁금해 미영이 살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면, 동네 어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재수 없는 집이라며 쫓곤 했었다. 학교에 가고 사춘기를 겪으며, 아버지와 충돌이 생길 때마다 미영이 생각나곤 했었다.


상구는 장애인 선배를 보며 뛰었지만,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한 여자를 보는 순간, 문득문득 떠 올랐던 미영의 모습이 실제로 눈앞에 보인 순간이었다. 미영에게 남자답게 보이고 싶어 부축해서 도움을 줘도 되는 선배 형을 등에 업고 계단을 올랐고, 휠체어도 번쩍 힘을 줘 들어 올렸다. 상구는 미영을 다시 만난 날부터 자기 인생에 확신 같은 것이 생기는 확고한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미영과 함께라면 태산 같은 아버지 힘에서 벗어날 것만 같았었다.




미영과 상구는 여느 연인들처럼 매일 긴 시간 통화를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연인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손을 잡고 키스를 나누고 서로를 깊이 알아갔었다. 미영은 미술학원을 정리했고, 방송국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잘 만들어 가고 있었다. 상구도 적성에 맞지 않는 사법연수원을 그만두고, 게임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상구는 미영과 교제한 지 3년 가까이 되어 갈 때, 미영에게 평생 같이하고 싶다며 프러포즈했다. 미영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저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상구에게 편안함을 느껴,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상구는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부모님에게 미영을 데리고 갔고, 상구 아버지는 순득의 집에서 데려다 키운 미영을 보고 극렬하게 반대했다.

“상구 너 제정신이야? 쟤가 어떤 아이인지 몰라? 무당집에서 귀신에 씐 아이야. 그 집 우울에서 무당 할멈 떠 올라,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혀 난리가 났던 일 기억 안 나니? 저 애는 부정 타서 재수 없는 아이야. 쟤 때문에 연수원도 때려치웠냐? 이상하다 했어. 투덜대긴 했어도 내 말을 거역한 일이 없었던 애가 의논 한마디 없이 마음대로 연수원 때려치우고, 게임이니, 뭐니 어이없는 짓을 하더니, 쟤가 네 앞길을 막았구먼. 당장 쟤 내 눈앞에서 치워. 귀신 들린 미친 것을 데리고 와서... 당장 나가.”


상구는 반대가 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미영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 같아, 더는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미영 손을 잡아끌고 집을 나와버렸다. 미영은 어안이 멍멍했다. 자신의 평탄하지 않은 성장 과정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반대가 있을 것이라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 내, 전문 분야에서 자리 잡고 사는 자신을 그래도 좋게 여길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상구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미영 자신도 토막토막 단락단락 기억하는, 다섯 살 미영이 살았던 과거로 현재의 미영은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는 존재로 취급받는 것 같았다. 상구는 미영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미영에게 아버지가 부끄러웠고, 미영은 그런 상구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이 정돈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미영은 우물에서 떠 올라온 순득의 모습이 자꾸 연상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순득이 보고 싶었고 서러웠다. 순득이 무당이었던, 어떤 죽음을 맞이했던, 최소한 미영에게는 세상에서 만난 첫 번째 엄마 같은 존재였다. 그 집에서 살게 된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그곳은 어린 미영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미영은 상구 부모님을 시어른으로 존중하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상구에게 잠시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며칠 뒤 상구 어머니 연락을 받고, 회사 앞 조용한 커피숍에서 그녀와 마주했다.

“미영아, 상구 아버지가 요즘 가게 일이 잘 안 풀려 심기가 불편해서, 네게 말을 좀 심하게 했어. 내가 대신 사과하마. 그 집 떠나서 어디서 어떻게 살았니?”

미영은 그간에 살아온 이야기를 간략하게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래도 잘 자라서 좋은 회사도 다니고, 기특하네. 상구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아버지 허락 같은 거 필요 없다고, 고집부려서 내가 너 한번 만나 보겠다고 했어. 미영아, 아버지 내가 시간을 두고 설득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 고마웠지만, 상구 입에서 듣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는 것 같은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상구와의 결혼 문제로 미영의 마음이 상처받고 있을 때, 은숙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태현과 동거를 시작하고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정아가 핸드폰 문자로 알려 주었고, 미영은 상구에게 낳아 준 엄마, 은숙의 죽음을 전하고 장례식장으로 내려갔다.


술에 절어 있던 석철은 미영을 보고 서울에서 성공해서 살면서 어미가 죽을 때까지 찾아보지 않았다는 불효막심한 못 땐 년이라 비난했다. 동네 이웃들도 미영을 향해 그래도 엄만데, 죽고서야 찾아왔다며 수군거렸다. 아들 인양 손님을 맞이하는 태현은 미영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고, 정아는 원망 서린 눈빛으로 미영을 외면했다. 영정 사진 속 은숙은 미영이 보았던 은숙 모습 중 가장 밝고 평온한, 고단하고 고통스러웠던 인생 여정에서 해방된 것 같아 보였다. 미영은 은숙이 좋은 곳에서 쉼을 얻길 바라며, 발버둥 치면 칠수록 견고하게 조여오던 그물 같은 은숙과의 애증(愛憎)의 그물을 걷어 내며 발길을 돌렸다. 결국, 상구는 오지 않았다.


미영의 전화를 받고 장례식에 가기 위해 검은 양복 차림으로 나오는 상구를 그의 아버지는 막아섰다. 그는 미영을 만나고 온 아내에게 미영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더욱 미영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것 봐 재수 없는 애라니까? 낳아 준 엄마는 병들어 오늘내일... 어렵게 살고, 키워준 집에서는 나 몰라라 하고, 그런 애 집에 들였다가 안 그래도 요즘 가게 힘든데…. 걔 때문에 우리 집까지 망조가 들면 어떡하려고 그래? 걔 기(氣)에 눌려서 상구 연수원 때려치운 것 봐. 걔 절대 안 돼, 당신도 앞으로 다시는 그 애 만나지 마.”

남편에게 미영이 열심히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렵게 살았던 자기 과거를 생각해 미영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것이라 여겼지만, 그는 미영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커진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온 상구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미영에게 전화를 걸지 못하고 있었다. 미영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미영이 부딪쳐 온 인생 여정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상구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미영이 헤쳐 나온 역경의 덩어리가 크게 보일수록 자신의 비굴함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고, 미영의 견디고 이겨내는 강한 인내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나약함이 한없이 초라했다. 아버지 반대를 겪으며 미영의 강단을 기대하고 의지하려 했던, 자기 비겁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큰소리쳤었다. 자신이 외면하고 있던 마음속에 있는 미영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 올라와 버린 것 같아, 미영을 제대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상구는 결국 미영에게 전화 거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미영은 은숙 장례에 오지 않은 상구를 이해하고 있는 자신이 외롭고 쓸쓸했다. 상구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부터 어쩌면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상구에게 은숙 존재를 이야기했을 때, 미영은 자신이 은숙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상구는 그래도 엄만데 같이 찾아뵙자고 말해 줄 것이라 여겼지만, 상구는 듣고만 있을 뿐, 미영의 기대를 알아주지 않았다. 아버지 반대로 잠시 시간을 갖자 했을 때, 아버지 반대에 함께 직면하고 이해시키자는 말이 아닌, 부모님 못 찾는 곳에서 같이 살면 되지 않냐는 회피를 말하고 있었다.

상구가 은숙 장례에 오지 않았다는 것은, 미영의 가장 어렵고 힘든 부분인 은숙의 존재를 맞닥뜨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었을 것이고, 그 고민은 상구를 부담스럽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은숙 장례 이후 미영과 상구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길을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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