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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 집 대청마루에 할머니가 앉아 있었고, 숙희가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나와 시어머니 앞에 내려 주었다. 미영은 할머니와 숙희 모습이 보이는 꿈을 꾸고 기분이 묘했다. 정아와의 불화로 정애에게 가끔 보냈던 편지도 보내지 않고 있었고, 영재와 숙희와의 만남도 심적 여유가 없어 미루고 있었다. 한동안 숙희에게 연락이 없었던 터라 숙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
숙희 핸드폰을 영재가 받았다.
“미영이에요.”
“응….”
영재의 짧은 대답은 깊은 무게가 드리워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미영아, 얼마 전 그 사람 세상을 떠났다.”
“뭐라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미영은 믿을 수 없는 영재 말에 여러 번 되물었고, 그다음은 수그러지지 않는 감정을 굽힐 의지 없이 영재에게 마구 소리 질렀다.
“저에게 왜 알리지 않으셨어요? 왜요?”
미영의 거친 숨소리와 분노가 터져버린 음성에 영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전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숙희는 아들 석진의 사고 이후부터 심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면서 엉뚱한 말을 하곤 했었다. 죽은 아들 모습이 보인다는 둥, 돌아가신 시어머니 음성이 들린다며 두려움에 떨기도 했었다. 딸들의 지극한 보살핌과 관심으로 회복되어 가다가도, 이상 행동으로 집안 식구들을 놀라게 했었다. 미영 소식을 궁금해하는 숙희에게 미영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았었다. 하지만, 담당 의사가 숙희가 많이 회복되었고, 미영의 존재를 직면해서 이겨내는 것이 우울증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미영을 다시 만나면서 석진이 떠 올라 증상이 심해지면서 병원 입원 치료를 시작했고, 호전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었다.
영재는 아내 숙희가 떠나고,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悔恨)이 혼자 남겨진 사막에 모레 바람이 되어 자신을 조금씩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해외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장인장모의 영향으로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밝고 귀하게 자란 음대생 숙희는 선한 성품(性品)을 타고난 여인이었다. 학교 봉사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며 알게 되어 교제를 시작했고, 소심한 자기에게 먼저 고백했던 그녀에게 소박한 삶으로 행복하게 해 주겠다 약속했었다. 그런 숙희를 종가 며느리로 만들어 수십 번의 제사와 종가 행사를 치르게 했고, 크고 넓은 집안일과 동네 일가친척들까지 두루두루 보살피게 했었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구김 없이 자라, 밝은 성격을 지닌 숙희에게 보수적이고 완벽한, 꼬장꼬장한 시어머니를 모시게 했고, 그것도 모자라 덕재의 핏줄 미영까지 거두게 했었다. 영재는 숙희가 떠나기 전 석진의 방에서 아들 죽음이 자기 때문이라 자책하며 울고 있는 아내에게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석진이 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러면 어쩌자는 거예요. 우리에게 자식이 석진이 하나예요? 다른 자식들 마음 생각해서 제발 그만 좀 해요.”
영재 역시 아들을 잃은 비통한 아버지였지만, 유일하게 의지하고 믿었던 아내 숙희의 무너진 모습 앞에서 자기 슬픔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영재 슬픔도 스스로 지각하지 못한 골이 깊어, 아내에게 불쑥 화를 내고 말았었다.
“시간 내서 한번 내려오겠니? 네게 남긴 것이 있더구나….”
미영은 대학 진학 이후 한 번도 가지 않았던 시골에 내려와 먼발치에서 석철과 은숙을 보았다. 술에 취한 석철이 슈퍼에서 외상 술을 주지 않는다며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슈퍼 앞 평상에 앉아 먼 산만을 바라보는 은숙 얼굴은 해골만 남아 있었다. 미영은 신(神)에게 묻고 있었다. 석철도 은숙도 저런 모습으로 자신의 고통을 견디며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저들은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선하고 사랑이 많은 숙희는 왜 그런 선택을 하게 했을까….
영재 병원을 찾았을 때, 병원 주변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영재 병원은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올 만큼 유명세가 있는, 늘 인산인해를 이뤘고 영재 병원 덕분에 주변 상권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개발로 고층 건물에 묻혀 후미진 골목 끝에 밀려나 버린 오래된 병원 건물 주변은 휑했다.
숙희가 미영에게 남긴 것은, 미영이 정애 손에 이끌려 왔던 날 입고 신고 있었던 옷과 신발, 지니고 있었던 사소한 소지품이 담겨 있는 상자였다. 옷가지는 깨끗하게 손질되어 잘 개켜 놓았고, 순득이 장에서 사 준 꽃고무신도 낡아 보였지만,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숙희는 가족 한 명 한 명에게 따로 편지를 남겼지만, 미영의 기대와는 달리, 영재에게 남긴 유서에 미영의 소지품을 보관하고 있는 상자를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을 뿐, 미영에게 따로 남긴 메모나 편지는 없었다.
미영에게 순득이 첫사랑 엄마였다면, 진심으로 자기 엄마이길 원했던 숙희가 세상을 떠나버린 슬픔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가슴이 쪼그라드는 통증을 부여잡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며, 미영은 봇물 터지듯 괴로움을 쏟아 냈다. 숙희에게 자기 존재가 그저 돌봐야 할 대상 이상은 아니었다는, 알고 있었던 상자 속의 진실이 수면 위로 높은 파도가 되어 올라왔다. 지독한 고독감으로 며칠 앓아누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실감을 견뎌내며, 긴 세월 지키지 않았던 숙희 약속과 그 숙희를 기다렸던 자기를 원망하고 자책하며, 뒤엉킨 숙희에 대한 애증(愛憎)을 비우고 있었다.
미영이 다녀간 그해 겨울 지방 도시 전직 국회의원 영재 사망 소식이 뉴스에 짧게 전해지고 있었다. 미영에게 연락해 온 사람도 없었지만, 영재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영재는 다른 날보다 이른 시간에 운전기사를 퇴근시키고, 혼자 차를 몰아 잘 가지도 않던 길, 마을 저수지 부근 눈길에서 미끄러지면서 저수지에 차가 쳐 막히고 말았다. 얼음이 꺼져 내려 차가 통째로 잠기면서 영재는 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교통사고로 처리되었지만, 영재는 자기 죽음을 예상한 듯, 병원을 막내 희선의 남편 한의사 사위에게 넘겼고, 집과 땅 등 유산 정리를 미리 해둔 상태였다.
영재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셋째 희애와 첫째 희영이 찾아왔다. 영재 호적에 올라 자랐던 미영에게 상속권 포기 절차에 관한 서류를 내밀었다. 영재는 미영에게 덕재 몫으로 되어 있던 상당수의 유산을 남겼지만, 희영은 미영 성장 과정에 쓰인 비용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더는 미영에게 아무것도 나누지 않을 작정으로 미영을 찾았었다.
미영은 생물학적 아버지 덕재를, 할머니가 읽던 책 속에 보관되어 있던 사진으로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가끔 덕재 사진을 꺼내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고, 어느 날 미영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었다.
“네 아비란다. 이목구비는 네 할아버지를 닮았지만, 성질은 이 할미를 닮아서 할미가 걱정이 많았단다.”
미영은 당신을 닮은 아들이 걱정되었다는 할머니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할머니는 분명 영재보다 큰아들 덕재에게 표현하지 못한 깊은 애정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 유산을 포기하라는 희영의 요구에 미영은 그런 유산이 아닌,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인해 주었다.
희영은 그런 미영에게 마지막 확인 사살 하듯, 모진 말을 퍼붓고 갔다.
“네가 우리 집 들어온 날부터 우리 집에 불행한 일이 생겼어. 다 너 때문이야. 나는 처음부터 네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호적에서 빼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어. 다시는 우리 앞에 얼씬거리지 마. 너는 불길한 존재야.”
미영은 영재 집안과 종이 몇 장 정도로 정리될 수 있는 관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그리고 약방 집과의 인연의 마지막이 이런 상황으로 이렇게 빨리 올지 예상하지 못했기에 짙고 무겁게 드리워지는 텅 빈 마음의 허전함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