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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긴 담벼락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려는 억지스러움이 견고함을 쌓고 차단한 것처럼, 정애를 만나러 가는 길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무뎌진 단절 같았다. 미영은 영재에게 정애 이야기를 듣고, 정애 모습과 목소리를 찾아 기억하려 애썼지만, 정애를 떠 올리면 순득이 우물 속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의 영상이 생각나 고통스러웠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묵은, 키 150센티 정도에 몸무게 40킬로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아주 왜소해 보이는 정애 모습은 미영이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상(像)이었다. 거친 인상과 풍채(風采)가 퉁퉁한 거구였던 순득과는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어린 미영의 작은 체구로 바라보고 느꼈던 정애는 얼굴 겉가죽 변화가 거의 없는, 그래도 보통의 어른 체구 이상은 되어 보였었다.
“네가 미영이구나, 아기 때 얼굴이 남아 있어.”
정애 목소리가 귓속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정애와의 추억이 필름 지나가듯 마구 스치고 있었다. 어린 미영은 정애가 올 때쯤 되면 대문 앞을 기웃거렸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정애 흔적이 느껴지는 날은 큰 방으로 건너가, 정애 주머니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정애는 올 때마다 미영에게 화려하고 멋진 그림이 있는 동화책을 여러 권 구해 주었었다. 정애가 등에 메고 다니는 커다란 주머니에는 언제나 신기한 것들이 많았고, 그 주머니에서 꺼내 주는 책을 정애가 다시 올 때까지 너덜너덜해지도록 수십 번 보았었다. 누더기가 된 책을 보고 정애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했었다.
“다음에는 더 많이 구해 올 수 있도록 해 볼게.”
정애 목소리는 아주 작은 속삭임이 사뿐사뿐한 잔잔한 가벼움이었고, 책을 내미는 정애 손은 곱게 빚어진 밀가루 반죽처럼 촉촉한 매끈함을 담고 있었다.
“미영아, 나 생각나니?”
“네, 스님.”
“벌써 대학 졸업반이라고?”
“네.”
“그림을 전공하고 있다고?”
“네.”
“그래, 어릴 때도 그림을 참 잘 그렸었는데….”
“스님은 언제쯤 나오세요?”
“모범수로 감형되어, 몇 달 후면 출소해.”
영재와 숙희는 정애와 미영의 대화에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있었지만, 정애 출소 소식을 듣고 숙희가 끼어들었다.
“어머 잘 됐구나. 그럼, 어디로 가려고?”
“절에서 받아 주면, 제 업보(業報)를 속죄해야죠. 절에서 고행(苦行)에 들어가려 합니다.”
“여기서도 그 긴 세월을 갇혀 고생했는데….”
숙희는 말을 잊지 못하고 눈에 이슬이 맺혔다.
“제가 저지른 죄가 가볍지 않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속죄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 사지육신 멀쩡히 숨 쉬는 것도 제게는 호사지요. 작은 사모님, 작은 사모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른 생각 마세요”
정애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숙희에게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미영과 짧은 만남을 통해 미영이 짊어지고 있는 고단한 현실도, 닥쳐올 불안한 미래도, 희미한 영상으로 스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영재와 숙희는 미영과 그간 멀어진 관계 회복을 위해,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면 미영이 다니는 학교와 일하는 미술학원 앞에 찾아와 몇 차례 만남을 더 가졌었다. 그런 영재와 숙희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영은 영재를 작은아버지라, 숙희를 작은어머니라 입술로 부르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 친구들과 미술학원 동료들은 미영을 만나기 위해 운전기사가 모는 고급 자가용을 타고 기다리는 중년 부부를 보며, 의아해했었다. 그동안 미영이 누구에게도 자기 개인적 가정사에 대해 말하지 않았기에, 무성한 소문이 스멀스멀 올라와 떠돌기 시작했다. 미영이 부잣집 불륜으로 태어난 숨겨둔 핏줄이라는 둥, 부모와 사이가 틀어져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는 둥, 재벌가 먼 친척 벌 되는 집 아들과 연애하고 있다는 둥…. 미영과 좀 가까운 친구들은 미영에게 직접 물어보기도 했지만, 미영이 아니라고만 할 뿐, 영재와 숙희 존재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미영은 소문 따위에 신경 쓸만한 여유가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대학원 진학과 방송사 입사까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볼 욕심으로 어느 때보다, 인생에서의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미영은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 진학을 했고, 미술학원에서도 부원장을 맡아 입지가 안정되어, 넉넉한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미영은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루었을 때, 제2의 꿈을 계획했었다. 라디오 방송 작가가 되어 세상 이야기를 듣고, 자기와 같은 어려운 이웃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부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통장 잔고가 모이는 것도 뿌듯했지만, 무엇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성장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된 자기 모습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재와 숙희에게 자신이 잘 살아 내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대학원 공부를 마칠 때쯤, 기업화로 성장한 미술학원 영향으로 신도시 분원 원장이 되어 사업가로 꽤 많은 돈을 벌었고,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방송국 방송작가로 입사하게 되었다. 라디오에 엽서 사연을 보내던 여고생이 전국에서 온 엽서 사연을 읽고 선정해 소개하면서 미영은 세상에는 자신 못지않게 구구절절한 인생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회사 일이 많아지면서 미술학원을 정리하기 위해 본원에 알리고 학원을 운영할 만한 적당한 원장을 찾고 있었고, 미영은 회사 퇴근 후 미술학원으로 가서 학원 일을 챙겨보고, 자정이 넘어서야 집 앞에 도착했다.
유난히 비가 오지 않고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여름 끝자락 밤공기는 적당하게 서늘했다. 미영은 별이라고는 없는 탁한 공기 밤하늘을 바라보며, 순득의 집 마루에서 바라본 밤하늘이 떠 올라 순득이 생각났다. 사실 순득의 얼굴도 목소리도 언제 잊어버렸는지, 떠 올려지지 않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순득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 주었던 유일한 존재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미영의 두 눈은 촉촉해지고 있었다.
집 앞에 1t 트럭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 차에서 정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아니?”
“어 언니, 많이 늦었네. 태현아, 인사해 미영 언니.”
“안녕하세요. 어릴 때 누나 많이 봤어요.”
“언니, 태현이 우리하고 같은 초등학교 다녔어.”
미영은 늦은 밤에 정아와 같이 있는 태현에 대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아, 가벼운 인사만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뒤따라 들어온 정아는 미영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내년에 대학 졸업하면 태현과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뭐? 결혼하겠다고?”
“응, 언니 나 태현이 하고 결혼하기로 했어.”
“얼마나 만났는데? 뭐가 그렇게 급해? 혹시 결혼을 서둘러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아니야, 태현이가 중학교 때부터 고백했는데, 내가 서울로 오면서 못 만났어. 태현이가 전문대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공장에 취직해 올라오면서 다시 만나기 시작했어.”
“너는 학교 졸업하고 직장 생활이라는 것도 안 해 보고, 결혼을 하겠다고?”
“언니, 나는 언니처럼 잘나지도 못했고, 회사 찾아보고 알아보는 것도 자신 없어. 어디 취업한다고 해도 잘할 자신도 없고, 태현이가 자기만 믿고 시집오래. 돈도 안 벌어도 되고, 엄마 아빠도 자기가 잘 돌보겠대. 고생 안 시키겠대….”
미영은 자존감이 낮은 정아가 학교 공부를 잘해 내는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다.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살았지만, 정아 미래는 좀 다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아를 서울로 데리고 왔을 때, 불행한 환경의 어두운 허물을 벗겨내듯, 겉모습부터 서울 아이들처럼 곱게 가꾸어 주었고, 경제적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지원해 주었었다. 대학 졸업 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고,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뭔가 이루어 가다 보면, 자신감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 정아가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서 미영 대신 기댈 수 있는 존재, 태현에게 또 의지하며 살겠다는 안일한 사고를 하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
“뭐든 네 힘으로 살 생각은 안 하고, 누구한테 빌붙어 살 생각만 하는 거야? 네 아버지 같은 인간으로 살 거야?"
"나도 언니에게 빌붙어살고 싶었는지 알아? 언니가 그런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네"
미영은 정아 약한 모습에 치민 화로 흥분해 적절하게 자기 마음도,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아 역시 미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병원에서 미영이 처음 은숙에게 이끌려 집으로 왔을 때, 미영은 은숙도 정아도 자신과는 급이 다른 존재로 대했었다. 은숙이 차려주는 밥상을 무시하며 거부했고, 석철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주 지저분한 벌레를 쳐다보는 것 같았었다. 은숙과 석철이 한바탕 싸우고 나면 미영은 정아에게 말하곤 했었다.
“저렇게 사는 게 사람이야? 짐승도 저러지 않을 거야. 정아 너도 정신 똑바로 차려 저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정아는 석철에게 매일 얻어맞고 미영의 무시를 견뎌내는 은숙도 불쌍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앞에서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자애하듯 주변을 망가뜨리는 석철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정아에게 그들은 부모였다. 자기 부모를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게 취급하는 것 같은 미영의 말은 부모를 부정하라는 강요로 들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어려움은 어쩔 수 없었다. 정아는 서울 미영에게 오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적당한 사무실 경리로 취직해 석철과 은숙 옆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미영은 그런 정아에게 그런 집에서 계속 살고 싶냐며 타박했고, 은숙은 배움도 때가 있다며 정아를 나무랐다. 석철은 정아가 서울에 가 있어야 돈 줄인 미영과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질 거라는 계산으로 정아를 구슬려 올려 보냈었다. 정아는 서울 생활이 외롭고 편치 않았다. 미영은 늘 정신없이 바빠 정아에게 사소한 관심조차 가질만한 여유가 없었고, 서울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떨다 보면, 정말이지 자신은 다른 세상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었다. 미영이 주는 카드로 백화점 값비싼 옷과 액세서리로 겉모습은 포장되었지만, 부모와의 관계, 자라온 환경, 생활 수준…. 모든 것들이 서울 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 속에 있다 보면, 정아는 언제나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수치심이 느껴졌었다. 정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미영에게 받는 용돈을 쪼개 석철과 은숙의 생활비를 보내주고 있었고, 하던 공부는 마치라는 은숙의 간곡한 당부로 어쩔 수 없었다.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견뎌내던 시기, 방학 기간 내려간 시골에서 우연히 태현을 만났다.
시골 학교에서 슬픔이 많아 보였던 정아는 남자아이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인상으로, 꽤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태현은 그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정아 주변을 맴돌았던 친구였다. 다시 만난 태현을 통해 시골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이 잃어가고 있던 자기 색채를 찾은 듯 편안했었다.
정아와 미영은 태현의 문제로 다툼이 잦아졌고, 급기야 정아는 집을 나와 태현과 동거를 시작했다. 미영은 그런 정아를 찾아갔지만, 태현이 대신 나와 몇백만 원의 현금을 내밀며, 그동안 정아에게 지원해 주었던 학비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들에게 간섭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말라며 빚쟁이 취급하듯, 몰아세웠다. 미영은 정아에게 배신감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태현의 손에 들려 보낸 현금을 보면서 지금껏 정아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어, 더는 정아와의 인연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발길을 돌렸다.
미영은 정아와 살던 집을 정리해 더 좋은 동네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타고 싶었던 승용차를 사서 마음이 답답하고 외로울 때, 차를 몰고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즐겼다. 정아와의 단절을 통해 석철과 은숙에게도 더는 어떤 감정도 연민의 잔재도 가질 필요 없다고 여겼다. 낳아 준 엄마 은숙에 대한 최소한의 자식 된 도리는 정아를 통해 갚았다, 스스로 결론 내리고 정아에 대한 애증(愛憎)을 정리해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