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緣)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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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이

미영은 대학 합격증을 들고 영재 병원 앞에 서 있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변호사를 통해 학비와 생활비를 은숙이 아닌 미영에게 직접 전해지고 있었기에 돈 때문에 영재를 찾아올 일은 없었다. 미영은 영재에게 칭찬받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병원 앞에 와 있었지만, 병원 건물 앞에서 영재 진료실 창만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미영은 집으로 가서 은숙에게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고, 은숙은 미영을 대견해하면서도 정아 걱정이 앞섰다.

“그래, 너는 해 낼 줄 알았다. 그럼, 우리 정아는 어쩌누….”

석철은 약방 집 핏줄이라 넉넉하게 지원해 주었다고 생각하며, 모아둔 돈이나 내어놓고 가라고 했다. 미영은 정아에게 지금처럼 최소한의 생활비는 석철 몰래 보내겠다고 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꼭 서울로 올라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영재는 변호사를 통해 미영이 서울 명문대 미술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은 형 덕재를 떠 올렸다. 덕재는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나 가업을 이어 한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정해진 미래에 대해 늘 불평이 많았었다. 유독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형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본 아버지는 형에게 호통을 치곤 했었다.

“환쟁이 하고 살겠다는 거냐? 공부를 잘하는 놈이 어째서 한 번씩 이상한 짓을 하누. 네가 우리 집 장손인데, 어쩌려고? 딴생각하지 말거라.”

덕재가 일본 유학 시절 영재에게 보내온 편지는 언제나 특별했다. 손수 그림을 그려 놓은 종이에 글을 써 보내온 형의 편지는 한 폭의 그림을 곁들인 시 같았었다. 그런 형의 유일한 핏줄 미영이 미술 관련 학과를 갔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한을 풀어 준 것처럼 미영에게 고마웠고 기특했다.


변호사를 통해 학비와 서울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작은 아파트를 마련해 주라고 했지만, 미영은 영재 말을 전하는 변호사에게 입학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미영은 영재와 숙희가 한 번은 만나 줄 것이라 여겼지만, 변호사를 보내 의무와 책임만을 하려는 것 같아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대학 입학이라는 세상으로의 첫발을 내디디며, 살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영재의 경제적 도움을 더는 받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

미영은 학교 근처 고시원에 짐을 풀었고,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입시 미술학원이 즐비한 동네에 학원마다 이력서를 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 신입생에게 자리를 주는 학원은 없었다. 미영은 규모가 제법 큰 미술학원 원장을 찾아가 학원 청소라도 시켜달라 떼를 썼다. 그렇게 들어간 미술학원에서 보조 교사부터 시작해 주임 교사가 되었다.


미영은 학교 공부도 학원 일도 열심히 했고, 자기가 선택해 온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갔다. 학원 일로 모은 돈으로 고시원을 벗어나, 반지하 단칸방을 얻어 정아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정아를 재수학원에 보내 입시를 치를 수 있도록 지원해 정아도 서울 명문대학에 진학했다. 미영은 학원에서 인정받으며 거액의 연봉을 받게 되면서 반지하를 벗어나 방이 두 개인 다세대 빌라로 옮겼고, 점점 삶에 자신감이 생겨가며 영재 집안과의 인연은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았다.

미영이 대학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모르는 전화번호가 핸드폰에 여러 번 울렸고, 미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며칠째 걸려 오는 이름 모르는 번호를 거부하지 못하고 받았을 때, 전화기 멀리에서 숙희 목소리가 들렸다.

“미영이니?”
미영은 숙희 목소리라는 것을 알면서 다른 말을 했다.

“누구세요?”

“숙희 아줌마야.”

미영은 숙희 아줌마라는 말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언제나 숙희 엄마라 생각했고, 다시 만나게 되면 ‘엄마’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숙희가 자신에게 먼저 ‘아줌마’라고 칭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멀어져 버렸다는 야속함이 밀려들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미영도 숙희에게 아줌마를 대하듯 대답했다.

“어떻게 건강하게 잘 지내지? 아저씨 하고, 아이참, 내가 이렇다. 아저씨가 아니라 작은아버지지? 나는 작은엄마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한번 만나고 싶은데 괜찮니?”


숙희는 아들 사고와 죽음이 자기 탓이라 자책했었다. 석진과 병원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함께 가기로 한 전날, 또렷한 악몽을 꾸었었다. 처참한 교통사고 현장이 보였고, 숙희 자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옆에, 석진이 울부짖고 있었다. 멀찍이 보이는 시어머니는 굿판에서 본 무당을 연상케 하는 차림으로 사고 현장을 주시하고 있었고, 숙희는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숙희를 흔들어 깨우는 영재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 숙희는 다급하게 석진의 방으로 갔다. 석진은 두통을 호소하며 만류하는 엄마 숙희를 안심시키려고 병원 일정을 다른 날로 미루겠다 약속했다. 하지만, 한동안 몸 컨디션이 좋았던 석진은 검사 결과가 좋을 것 같은 예감을 품고 혼자 길을 나섰었다. 한 번도 숙희 말을 어긴 적이 없었던, 예상하지 못한 석진의 외출을 끝까지 챙겨보지 못한 숙희는 석진이 자기를 대신해 죽었다고 여기며, 긴 세월 우울의 감옥에 갇혀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했었다. 그사이 미영의 존재는 넘겨 버린 여러 장의 책장이 되어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영재를 통해 서울에서 대학에 진학해 잘 살아 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미영에 대한 괜한 미안함이 밀려들어 영재가 알려준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었다. 미영의 목소리를 듣고, 숙희 자기도 모르게 아줌마라 칭해버렸다. 통화하면서 문득 미영에게 자신은 엄연히 작은 엄마임을 깨달았지만, 미영의 상한 마음의 깊이는 헤아리지 못했다.

미영은 숙희의 갑작스러운 전화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빠 석진의 사고 이후 십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자기를 찾아 주지 않았던 숙희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고, 지금 와서 만남을 요구하는 숙희 마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




석진이 죽은 날과 같이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토요일 오후, 거리에는 인파들로 북적였다. 미영은 화장을 곱게 하고 가장 예쁜 옷을 골라 입었다. 설레고 들뜬 마음과 서운함과 서러움이 뭉게구름처럼 뭉실 뭉클 되는 심정으로, 영재와 숙희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인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숙희 엄마는 여전히 세련된 따뜻함을 지닌 모습이었다. 숙희가 먼저 미영을 알아보고 다가와 활짝 웃으면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이제 시집가도 되겠네, 예쁘게도 자랐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사는 건 괜찮니?”

몇 발짝 뒤에 있던 영재는 그런 숙희에게 다가와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며, 호텔 중식당 룸으로 데리고 갔다.

가까이에서 대면한 숙희 엄마 얼굴에서는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어둠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미영은 숙희 어둠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숙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입술만 달그락거렸다.

“언니들은 다들 잘 있어요?”

“그래, 너는 어떻게 사니?”

영재 나지막한 목소리에 미영은 오기 같은 감정이 솟구쳤다.

“네, 잘살고 있어요.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미영아, 우리가 많이 무심했지?”

숙희는 촉촉한 목소리로 떨며 말했다.

“우리도 그간 이런저런 사정이 많아서 너를 찾아보지 못했어. 미안해”

“당신이 뭐가 미안해요.”

숙희 마음고생을 지켜보았던 영재는 숙희 말을 막았다. 그런 영재 모습에 미영은 또 감정이 상했다. 아무것도 잘못 없는 숙희인지 미영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린 자기를 그렇게 무심하게 내버려 둔 어른이었기에 그냥 미안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아르바이트 가야 해요.”

“무슨 학생이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 아르바이트를 하니?”

숙희 말이 끝나자, 영재 말이 이어졌다.

“왜 내가 주겠다는 도움을 거절하고 고생을 해?”
“제가 왜 아저씨 아줌마 도움을 받아야 해요? 저도 제힘으로 돈은 벌고 있어요.”

오랜만에 만난 미영은 예전처럼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표현하고, 영재와 숙희에게 아저씨 아줌마라 칭하며 반항심마저 엿보이는…. 마음의 골이 깊어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상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라고 해야지”
영재 단호한 말에 숙희가 변명했다.

“내가 지난번에 전화했을 때, 아줌마라고 실수해서 미영이도 잘못 말한 거예요. 그렇지 미영아?”

“......”

영재는 자기 집안에 대한 상처가 원동력이 되어 성공해 주길 바랐지만, 막상 그런 미영의 모습을 마주하고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숙희는 미영이 하염없이 가엽게만 보였다.

“정애 스님 한번 보러 가지 않겠니?”

영재 물음에 미영은 머리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잠시의 두통이 스쳤다. 영재와 숙희가 십여 년 넘게 자기를 외면한 것처럼, 자신도 순득을 그리고 정애를 까맣게 잊고 지내었다. 미영은 영재에게 자신이 어려서 알려주지 못했던 정애 사연을 듣게 되었고, 정애가 아직 감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재와 숙희와 함께 정애를 면회하기 위한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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