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던 초침 소리와 냉장고의 웅웅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키며 의자 뒤로 크게 세 걸음을 옮기고 보니 그림 속 여자는 안쓰럽게도 한 쪽 어깨가 주저앉아 있었고 금방이라도 여자를 삼킬 듯 어느새 햇빛은 거실의 반을 차지하고 들어와 있었다. 주전자 물을 올리고 식빵 반 쪽을 찢어 돌돌 말았다. 희멀건한 덩어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 속으로 구겨져 들어갔다. 남아 있던 식빵조각을 집어들자 스위치를 켠 것 처럼 주전자 주둥이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순식간이었다. 양 손에 빵과 서서히 작아지는 커피 알갱이를 담은 뜨거운 컵을 들고 그림 앞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식빵은 유난히 건조해져 넘기기가 힘들었고 어떻게든 해치우려는 심산으로 빵을 커피에 담갔다. 연갈색 액체가 스멀스멀 식빵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서서히 굳기 시작한 튜브 속 물감을 힘껏 파레트로 밀어냈다. 녀석은 엎드린 채 고개만 살짝 쳐들었다.
5일 전, 변 사장의 전화가 있었다. 새로운 브랜드 출시 계획을 알리는 전화였고 새로운 작품을 주문하는 전화였다. 지금까지 주문했던 그림과는 전혀 다른 소재라는 사실 때문인지, 시간 안에 완성도 있게 나와만 준다면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겠다는 얄팍한 상술 비슷하면서도 매혹적인 이야기 때문인지, 그 전화를 받은 이후로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제 도착한 누런 서류봉투 안에 담긴 참고자료는 인터넷에서 봤던 사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반짝하고 일어났던 말초신경들은 다시 누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일단 먼저 주문 받은 그림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잊자고 마음 먹었지만 감흥 없이 복잡하기만 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환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멍군을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멍군의 인중에는 깨알 같은 땀방울들이 맺혀있었다. 언젠가 멍군이 나를 닮았다고 말했던 포도주스를 건네자 멍군은 가볍게 웃어보였다.
"너가 보낸 거 잘 읽었어."
"그래? 어땠어?"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어. 지난번보다 좋아진 거 같아."
"다행이네."
"근데 제목은 여전히 좀 이상하더라. 산으로 가는 기차가 뭐냐 산으로 가는 기차가."
"난 제목이 제일 어렵더라."
멍군은 여덟개의 치아를 내보이며 빈 컵을 내밀었다. 뭔가 그럴듯한 제목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점심은?"
"아직."
"밥이나 먹자."
얼핏 보기에 토사물처럼 변해버린 식빵 맛 나는 커피인지 커피 맛 나는 식빵인지를 수챗구멍으로 보내주고 광고지 묶음을 식탁 위에 펼쳤다.
"미안해. 생각해보니 집에 밥이 없어서.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내가 살게."
"무슨 소리야. 내 시나리오 읽느라고 네가 고생했는데. 내가 살게. 너 좋아하는 거 시켜."
"됐어. 손님이 밥을 사는 경우가 어디있냐? 난 다 괜찮으니까 너 먹고 싶은 걸로 두 개 골라."
"난 그냥 늘 먹던 걸로."
"그럴래? 그럼 난 찌개 하나 시키지 뭐."
"좋아."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주문한 음식이 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초밥상자를 든 윤이 서 있었다.
'아, 그렇지.'
오늘은 첫째 주 수요일이었다. 윤은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 누구나 질 수 있는 표정으로 그를 대하는 나와 밥을 먹기 위해 어김없이 찾아왔다. 곧이어 도착한 제육볶음과 청국장 그리고 초밥의 조화는 우리 셋 만큼이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미묘한 기운이 식탁을 채웠다. 가끔씩 젓가락끼리 부대끼는 소리와 밥알이 부서지는 소리만 그 기운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심신 안정에 좋다는 허브차를 우려 세 잔으로 나누었다. 윤이 돌아가기까지는 10분 정도의 여유밖에 없었다. 멍군과 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옮겨갔다. 멍군은 이미지만 보고도 변사장이 주문한 그림인 것을 알았고 윤은 무심한 눈빛으로 말없이 차만 홀짝였다.
"이게 마지막이야?"
멍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나 남았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고민이야."
나는 입 속에 머금고 있던 차를 목구멍으로 깊이 빨아들이고는 대답했다. 멍군은 다시 물어왔다.
"뭐가 고민인데? 벗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문득 이 둘은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눈 밑이 팽팽해졌다.
"다음에 그려야 되는 게 산갈치라는 바다생물인데 나 사실 그게 뭔지 잘 모르거든. 그런 걸 소재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어서 전혀 감이 안 와."
여태껏 멍군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것 외에는 달리 하는 게 없었던 윤이 갑자기 눈을 번뜩이며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산갈치요? 그걸 그리신다는 말씀이세요? 그걸 구하셨어요?"
윤은 분명 산갈치에 대해 아는 눈치였다. 기대했던 대로였다.
"구하긴요. 이름도 처음 들어봤는데 그려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한거죠. 의뢰하신 분이 사진은 몇 장 갖다 주시긴 했는데 느낌이 전혀 없어요. 크기는 또 엄청 크다면서요. 그것도 사진만 봐서는 별로 실감도 안 나고."
"그렇죠. 그게 절대 구하기 쉬운 놈이 아니죠. 그 놈 보름은 바다에 살고 보름은 산에 산다는 전설도 있는데...... 그래서 더 특이하고. 그래요, 산갈치......"
윤은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대화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운 말로 중얼거렸다. 윤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멍군은 수첩을 꺼내들더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잠시 멈췄다 다시 적고 또 멈췄다 적고를 몇 차례 반복했다.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렇게 수 분간, 멍군과 윤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둘의 입만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공중에는 먼지만이 떠다녔고 적막을 깬 것은 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