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시작은 계획서 만들기부터다. 물론 강사 채용을 위한 행정 절차가 사전에 있다. 채용이 먼저고 그 뒤에 강사가 수업을 기획하는 일이 시작된다. 채용은 개강 약 두 달 전에 있고 심사 절차를 거쳐 한 달 전에 임용이 확정된다. 채용을 비롯한 행정에 관해서는 이 글이 아닌 별도 꼭지를 통해 소개하려고 한다. 일을 하다 보면 그냥 일에만 집중하고 싶지만 일 외에 본 업이 아닌 부수적인 일들로 시간을 쏟는 경우가 많은데 행정도 그중 하나다. 특히나 관 소위 공공(public)에서의 일에는 행정이 부(sub)가 아니고 본체(main)가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15주 수업 진행에 딸린 각종 행정에 대해서는 이 글이 아니라 별도 꼭지를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강의계획서 만들고 나서 학생들의 수강 신청(보통 개강 전 2주~3주 전) 전에 준비한 강의계획서를 학교 시스템에 등록해야 한다.
이번 학기에 담당할 수업명은 공연기획론이다. 영어로는 Performing Art Events Planning이다. 수업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들도 한두 명씩 있다. 그래서인지 자료를 완벽하게 국영문으로 병기하는 건 아니지만 강의계획서 상 강의명이나 구성 상 제목에 해당하는 내용에 한해서는 영어로 표기한다. 공연기획론의 영문 표기는 수업하면서 내가 정한 건 아니고 그간 학교에서 사용했던 표기법이다. 처음에 공연기획론이라는 제목으로 수업명을 들었을 때는 공연 제작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뤄야 하는지 막연했는데 영어 제목을 보니 이야기의 범위가 좁혀졌다. 가끔은 영어 표현이 우리말보다 의미를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유용하는구나 생각할 때 많다. 영어식 표현에 따르면 이번 학기에 다뤄야 할 내용은 공연예술을 활용한 각종 행사를 구상하고 계획하는 과정에 대해서다. 공연업에 종사만 했지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지 않아 내가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많은데 어쨌거나 직관적으로 공연을 구상하는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 기획이고 콘텐츠를 무대화하기 위한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 제작이라고 이해하는 편이다.
공연을 구상하는 일련의 과정이 내가 이번 학기에 다뤄야 할 주제다. 강의 개설된 이후 여러분의 선생님들께서 수업을 진행하셨을 텐데 그때마다 주제를 어떻게 잡았을지 궁금했다. 보통 회사라면 업무가 추가되거나 새로운 업무로 변경이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관련된 업무 자료들을 받거나 교육을 받는다. 그간 일했던 분들의 업무 노하우나 고민이 담긴 인수인계서와 업무용 컴퓨터 파일, 회사의 공식 문서들로 앞으로 일해야 할 분야에 대한 감을 잡았다. 하지만 그간 강의를 맡으면서 참고할 만한 자료를 공식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추측해보자면 회사는 개인이 누구이든지 간에 일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게 중요해서 일을 표준화해왔고 표준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편이라면 강의는 내가 알던 표준화된 '일'을 하는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강의는 누가 와도 할 수 있는 '업무'라기보다는 강사 혹은 지식 노동자가 그간 해당 분야에서 쌓아온 그만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시간' 서비스에 가깝다. 해당 분야에 대한 독특한 시간과 시각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강의(course)인 것이다.
하지만 업무를 주로 해왔던 나의 경우에서는 처음 강의 의뢰를 받았을 때는 업무 인수인계가 전혀 없이 업무를 시작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업무를 맡으면 이전에 업무 파일을 찾아보고 관련되신 분들께 이것저것 묻는 리서치의 시간을 가졌다. 비슷한 과목으로 수업을 하셨던 분들의 강의계획서와 강의자료를 요청해 받아보았다. 수업을 듣게 될 학부 학생들하고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도 들었다. 막상 여러 명의 강의자료를 받아보았으나 비슷한 구석이 별로 없었다. 공연예술이라는 게 애초 장르도 다양하고 실무적인 내용 위주로 다루다 보니 어느 장르의 전문가이냐 일의 어느 범주를 접했느냐에 따라 수업에 소개되는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연예술 비평을 주로 해왔던 분은 공연예술을 미학적 관점에서 주로 다루고 실무적인 내용은 부가적으로 다루고 홍보마케팅을 주로 담당해왔던 분은 공연예술 홍보마케팅을 다루는 식이었다. 제각각이었다. 동일한 강의 제목이지만 다루는 내용은 천차만별인걸 보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여러 자료를 읽으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내용을 잘 담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앞으로 15주 동안 할 일을 총괄적으로 담은 문서가 강의계획서다. 강의계획서에는 강의 개요(언어 , 과목 번호, 학점, 요일/강의시간/강의실, 강의 형태, 전공능력, 개발 역량)와 함께 교육 목표, 강의방법, 주교재 및 참고문헌, 학습과제, 평가계획, 주차별 강의 내용과 강의방법을 명기한다. 수강 신청 변경기간이 있긴 하지만 수강생들은 이 강의계획서만을 보고 앞으로 수업이 어떻게 진행될지 짐작을 하고 수업을 선택한다. 학생들에게는 강의를 상상하게 하고 나에게는 한 학기를 어떻게 보낼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절차였다. 모든 문서에는 누구에게,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전달할지가 간결하게 담겨있어야 한다. 강의계획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 수업은 학부 3학년 학생이 주로 듣게 되어 있다. 2학기에 개설되는 과목으로 3학점 과목이다. 3시간(쉬는 시간 10분, 총 150분) 강의로 이번 학기는 대면 강의가 기본이다. 학부 3학년이면 졸업 준비에 바쁜 4학년도 아니고 멋모르고 시작한 1~2학년을 보낸 나름 숙련된 학생들이다. 한창 취업 준비를 시작하고 미래 직업 혹은 직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을 탐색기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탐색이 끝나고 구체적으로 해당하는 직업을 갖거나 혹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차근차근 스펙을 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탐색기를 거치고 있는 학생들이 나의 고객들이다. 대상을 파악하고 대상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리한다. '공연 기획'은 공연예술 장르별(연극, 뮤지컬, 클래식, 오페라, 무용, 국악, 복합)로 특화된 지식을 필요로 하며, 관련 지식과 경험을 꾸준히 습득해야 할 필요성이 높은 분야다. 실무적이고 현장 친화형 과목인 것이다. 이번 강의는 공연예술에 대한 기본 개념 이해를 시작으로 공연 기획 및 제작의 주요 과정별 지식을 현장 사례를 활용하여 학습해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공연 기획 실무에 필요한 이론적 뼈대를 만든 후 공연 프로젝트를 직접 구상하고 기획해보는 과정을 경험해 보게 하려 한다.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이번 수업에서는 장르별 공연 기획 및 제작에 대한 각론적(the particular) 이해보다는 총론(‘공연을 기획한다는 과정’, the general)적 이해를 우선으로 하고, 특히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기획’에 대해 심화하는 역량을 배양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수업은 이론적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강의(lecuture) 외에 몇 가지 방법을 병행한다. 실제 현장에 대한 이해를 위해 현장답사(Field trip)를 고려해보았으나 이번 학기 수업이 오전에 이루어지는 관계로 적절한 프로그램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공연장에서 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던 탐방 프로그램도 운영을 제한적으로 하거나 당분간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대를 옮겨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검토해보았으나 30명 학생들의 일정을 맞추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이번 학기에 현장답사는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현장 전문가를 모셔서 초청 강의를 진행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이전 공연기획론 수업 진행 시에도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의견을 받았던 프로그램이라 발전시켜서 추진하기로 했다. 우선 기획자, 제작 전문가, 행정 전문가를 모시되, 기획자의 경우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에서 활동 중인 분들로 각각 초청하려고 했다. 이유는 상대적으로 재원이 안정적인 공공 극장에서의 공연 기획과 재원이 상대적으로 불안하지만 상대적으로 기획력이 돋보이는 민간 축제에서 활동적인 공연 기획의 고민의 지점과 결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공연을 무대화하기 위해 제작팀을 연결하고 기획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무대감독을 제작 전문가, 기획된 공연물을 국내외적으로 유통하는 데 지원하는 행정전문가들을 모시기로 한 것이다.
<문화예술계 이해를 위한 기본 틀>
문화예술 생태계를 이해해보기 위해 고안해낸 그림이다.
초청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이분들을 모셔야 할 예산이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내게 의뢰된 강의에는 강사 1인의 강의료만 책정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예산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과 사무실에 문의를 해보니 취업이 중요해지면서 산학연 연계를 장려하는 프로그램이 학교마다 개설되어 있는데 이를 활용해보면 좋겠다고 알려주셨다. 물론 원한다고 비용이 지원되지 않는다. 공모 절차가 있고 서류 심사의 과정이 있다. 초청 강의 진행을 위해 산학연 연계 프로그램에 지원해보기로 했다. 절차는 신청서를 작성해 학과 차원에서 교내의 다른 부서에 지원하는 형식이다. 지원하려고 한 프로그램은 인력 미스매치 및 학문 계열 불균형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사회 수요를 반영한 현장 친화형의 교과 개발(개선)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외부기관(기업체, 연구소, 공공기관, 지자체, 기타)의 협업을 통해 사회 수요에 적극 대응하여 교과를 개선 및 개발함으로써 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인 사업이다. 쉽게 말해 현장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반영하여 기존 교과목의 방향을 개선하면 지원금을 주는 것이다.
15주 강의만 해도 학교에서 요구하는 노동을 충분히 소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장의 수요를 반영하겠다는 기획의도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해도 되는데 좀 더 재미있게 의미 있게 하려면 노력이 들어간다. 고민이 된다. 그냥 강의만 할까. 고민해보지만 나의 수고로움이 학생들에게는 현장의 소리를 모시는 전문가들에게는 새로운 경험과 번외 소득을 드릴 수 있으니 번거롭지만 하기로 한다. 물론 수업을 담당한 강사의 입장에서 의도대로 초청 전문가들 덕분에 수업이 풍요로워지는 효과도 크다. 강의계획서는 초청 강의 프로그램을 포함시켜 수강신청을 하게 하고 그 이후에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하고 선정되게 되어 있다. 선정이 되면 과목당 최대 100만 원의 운영비를 지원해준다. 운영비를 쓸 수 있는 항목은 정해져 있는데 물품구입, 회의, 특별 강의료, 학생 교육활동지원비 등으로 쓸 수 있다. 다행히 해당 교과로 선정이 되어 강의계획 원안대로 진행하게 되었다. (만약 선정이 안되어 있다면 초청 강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현장성을 높이는 방안을 더 고민했을 것 같다.)
초청 강의는 일방적인 강의라기보다는 실제 업계 전문가로 일하면서 겪는 경험들을 들어보는 목적이 커서 양방향 토크(talk) 형식으로 진행된다. 사전에 전문가의 프로필을 양해를 얻어 공개하고 이를 보고 학생들이 질문을 올리게 한다. 질문을 모아 범주화한 후 당일 학생들을 대신해 내가 질문하고 전문가로부터 답을 듣는다. 일종의 토크쇼 형식인데 질의응답이 끝나고 나서 학생들은 추가로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방식을 선택한 건 학생들은 미리 전문가의 약력을 보고 재직하는 기관에 대해 찾아보거나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하면서 동시에 전문가 입장에서는 강의를 위해 별도로 자료를 만들지 않고 학생들의 실제 궁금증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여 사전 부담을 줄이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 이번 학기에 추가한 방법은 멘토링이다. 학부생 대상 수업의 경우 보통 50명 내외로 한정하는데 30명 내외로 제한하되 대신 수업의 밀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멘토링인데 정규 수업 시간 이후 회차당 2명 내외로 공연기획과 관련된 진로 탐색 관련하여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방식이다. 물론 의무는 아니고 신청자에 한해서만 진행한다. 조언은 절대적으로 듣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가 없으면 사실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서다. 사비를 쓰지 않고 차를 마시는 비용은 산학연 연계 프로그램 운영비에서 쓴다. 처음 시도해보는 프로그램이라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도 궁금하다.
강의 목표와 강의 내용, 강의방법이 나왔다. 여기에 맞는 주교재와 참고문헌을 찾고 주차별로 어떤 내용을 가르칠지 그리고 어떻게 평가를 할지 정리하면 강의계획서는 마무리된다. 수업의 흐름은 주교재의 구성을 기본적으로 활용하였다. 주교재는 [극장경영과 공연 제작]이라는 책으로 선정했다. 기본 교재로 활용할 만한 책으로는 비교적 최신에 나오고 내가 생각하는 논리적 구성에 따라 서술된 책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2001년에 나온 책이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흐름(공연예술- [장소] 극장과 극장 운영 - [공연 Product] 공연 제작-공연 마케팅-홍보-펀드레이징)을 서술하고 있어서 주교재로 선정하였다. 최신 동향은 수업에 사례로 보완하면 된다고 판단했다. 참고문헌으로는 기획에 대해 서술한 책들과 통상적 의미의 극장이 아닌 비전형적인 극장을 포함하여 최신의 공연장소에 대해 서술한 주교재를 저술한 선생님의 책으로 골랐다. 평가의 경우 학생들의 최대 관심사안이기도 해서 신중하게 선정한다. 기본 개념의 이해를 위한 객관식형 중간고사, 참고문헌을 통한 기획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서평, 수업 참여도(수업 진행에 필요한 10회의 질문에 답을 사이버 강의실에 올리는 형식), 기말 발표와 출석해서 총 100점으로 설정하였다.
모든 기획이 그렇듯이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건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실제로 만나고 접했을 때다. 무엇보다 열악하다는 공연계에 입문하지 말라거나 혹은 그럼에도 입문하라는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공연이라는 콘텐츠가 어떤 과정을 거쳐 무대화하고 공연장에서의 무대화 말고도 다른 현장(지역, 국제교류, 관광 등)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 공연 생태계에 대해서 감을 잡거나 (취업이든 공연 애호가로의 길로든) 어떤 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음 한다. 다행히 수강신청 단계에서는 듣고자 하는 수강생이 많았고 이제 강의실에서 실로 오랜만에 학생들을 만날 일만 남았다. 대면으로 해서 강의실에서 만난다 생각하니 떨리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기대 반 설렘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