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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야 Oct 18. 2021

어렵다, 어른이라는 건

어딘가를 갈 때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 아닌 버릇이 있었다.

그곳이 특히 내가 일하고 싶었던 종류의 곳이라면 관찰은 더더욱 세심해졌다. 포기하지 않고 저 사람처럼 계속 이 일을 했으면 어땠을까,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나는 과연 저 사람처럼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갔지만 더 생각할수록 손해 보는 건 나였다. 쉽게 포기해버린 건 나였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미워지기만 했으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고, 후회하고 미련을 남겨봤자 상처만 더해갈 뿐이었다.


세탁소에 들린 날이었다. 사놓고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해둔 바지를 수선하기 위해서였다.  수선비보다 바지를 사는게 더 싸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멀쩡한 바지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세탁소에 들른 것이었다. 

마감시간 직전에 방문한 탓에 내가 마지막 손님이었다. 주인아저씨는 무심한 목소리로 어떻게 수선해주면 되느냐며 물었다. “바지통이랑 허리가 커서 그러는데 일자바지처럼 줄이는게 가능할까요?”라는 내 말에 나를 힐끗 쳐다보시더니 초크를 든 손으로 바지에 빠른 속도로 이리저리 그림을 그리신다. “딱 이렇게 줄이면 아가씨한테 맞겠는데? 이렇게 줄이면 되겠지요?” 뭐가 이렇게 간단하지?라는 생각에 그렇게 줄이면 저한테 너무 딱 맞거나 작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아이,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했는데 아가씨 정도면 이렇게 줄이면 딱 이쁘게 맞을 거야, 나 믿고 그냥 이렇게 줄여봐.”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딱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뭐... 손해 본다는 생각으로 수선하러 온건 맞지만 이러다가 입어보지도 못한 바지를 아예 망쳐버리는게 아닐까 싶었지만 아저씨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소파에 앉아 바지를 수선하는 아저씨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바지를 망쳐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 때문이었는데 너무 감시하는 듯한 눈길이었는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결혼했어?” 또 결혼 얘기다. 이젠 얼굴만 봐도 혼기가 찬 듯 보이는 건가 싶은 마음에 “아니요, 가야 되는데 아직 못가고 있네요.”라고 대답했다. “아이고, 요즘에는 결혼 안 해도 돼,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이야. 물론 조금 외롭긴 하겠지. 그런데 그건 결혼해도 똑같아. 그러니까 주변에서 하는 결혼 얘기에 휘둘리지 말고 아가씨 하고 싶은데로 살면 돼.”


결혼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아직 미혼인 나로서는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네.. 그렇죠.”라는 나의 영혼 없는 대답에도 아저씨는 이 질문을 시작으로 말문이 트이셨는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요즘에는 참 어른으로 살기 힘든 세상이야. 아빠로 사는 것도 참 힘들어. 나도 다 큰 딸이 하나 있지만 아직까지도 아빠 노릇을 한다는게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단 말이지. 어른으로써 대접을 받으려면 그만큼 어른으로써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참 힘들단 거야. 세상은 날이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고 빨리 변하잖아. 나만해도 이곳에서만 장사를 10년 넘게 하고 있는데 살기가 참 빡빡해, 요즘 누가 옷을 수선해서 입냐 이거야. 그래도 어쩌겠어, 나는 어른이고 아빠고 사장이기도 하니까, 힘들어도 참고 어른 노릇, 아빠 노릇 해야지.”

무슨 대답이라도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겁다면 무겁고 가볍게 치부해버리자면 한없이 흔한 이야기.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아저씨의 쉴 새 없는 손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 됐네, 한번 입어봐요 아가씨, 이쁘게 딱 맞을 거라.”

가게 안, 작은 탈의실로 들어가 바지를 입어봤다. 어떻게 내 사이즈를 재 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딱 예쁘게 줄였을까. 너무 마음에 들게 줄여진 바지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저씨, 너무 예쁘게 수선해주셨네요! 감사해요. 어떻게 사이즈 재보지도 않고 눈대중으로 보시고 줄였는데 꼭 맞춤으로 한 것 같아요.”

“내가 이 장사만 10년 넘게 했어, 이젠 눈으로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고. 아가씨 정도면 이렇게 줄이면 이쁠 거라고 생각했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만.”

수선비는 만 육천 원이었다. 생각보다 수선비도 저렴했고 무엇보다 이 완벽하게 수선된 바지는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수선할 거 있으면 여기만 올게요! 소문도 많이 낼게요!”

“그래그래, 아가씨 또 봐.”

차에 올라 탄 후 가게를 바라봤다. 대충 가게를 정리하고 불을 끄고 퇴근하려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은 고단한 것처럼 보이는 뒷모습. 


어른으로, 아빠로 사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는 주인아저씨.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옷들을 수선하면서 자신의 삶도 자기가 만지는 옷처럼 잘 재단되었으면 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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