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 대학을 다니면서 자주 들었던 단어인 간호'전문직'. 국가가 인정한 공인 면허증을 가지고 간호사로 일하면서 난 '전문직'으로의 정체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국 병원의 병동 간호사로 일할 때, 병동에 15년 차 간호사 선생님이 계셨다. 파트장(수간호사)님 다음으로 연차가 높은 분이었다. 일하면서 그 분이 한 정형외과 교수님을 언급하며 "그 교수님 내가 신규일 때, 레지던트 1년차 였는데.." 라고 얘기 하셨던 게 기억난다. 15년 이라는 시간 동안 전공의는 의대생과 다른 전공의들을 교육할 수 있는 교수 위치에 설 수 있었지만, 과연 평 간호사로서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인지 의문이었다. 오랫동안 일하며 병원에서 살아남아 파트장(수간호사)가 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더해 간호학 교수가 되는 것, 혹은 공무원 혹은 다른 기업으로 취직해 회사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학교 선배 동기 들의 길이었다.
흉부외과 병동에서 일할 때, PA 선생님들이 전공의들이 할 만한 업무들을 나누어 일했다. 전공의들이 부족한 과에서 PA(physician assistant) 혹은 NP(nurse practioner) 로 불리는 간호사들은 한국 대형병원에 흔한 편이다. 환자들에게 진료 전반에 대한 설명 뿐만 아니라 약 처방도 했다. PA 나 NP 로 일하는 간호사들은 간호 전문 대학원을 나온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간호사들이 일했다. 법제화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간호 전문 대학원 없이도 일반 간호사가 PA 로 일할 수 있고 그들은 본인 이름으로 처방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약을 처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지만, 전산상의 이름은 전공의 혹은 해당 과 교수님 이름으로 처방되었다. 그게 얼마나 위험의 요소가 있는 일인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그냥 지켜만 볼 뿐이었다. 전문대학원 법제화 과정은 수 년 동안 논의가 되었지만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다.
병동 간호사를 그만두고 연구간호사로 일할 때에는, 실질적으로 책임연구자가 해야할 일들도 연구 간호사가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관례였다. 대학생 때 카페 알바를 하면서도 보장 받았던 그 흔한 4대보험도 제공되지 않았다. 내가 일했던 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대형 병원 및 대학 병원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이다. 병원에서는 병원 소속으로 직접 연구간호사를 고용하지 않는다. 대형 병원의 경우 의생명 연구원 혹은 임상연구센터 같은 이름으로 소속 연구원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계약직 형태가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이 분야에서도 장기적으로 살아 남는 것도 쉽지 않다.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이면 회사로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연구자(해당 진료과 교수)들은 연구 간호사를 구하기 쉽지 않아 항상 걱정이고, 일하는 연구간호사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 지 걱정한다.
사회에 나와서 '간호사' 라는 나의 직업을 이야기 했을 때 사람들의 첫 반응은 대부분 '교대 근무 힘들겠다. 고생이 많네요" 였다. 한국에서는 간호사 라는 직업이 공부를 많이 해야하고 고소득인 '전문직' 이라기 보다는 희생하고 묵묵히 일하며 의사를 보조하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고 느꼈다.
미국에서도 기본적인 간호사의 업무는 비슷하다. 아픈 환자들을 간호하는 일이 한국이든 미국이든 그저 쉬운 일은 아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스트레스도 뒤따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는 15년 차 간호사를 병동에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20년 차, 혹은 간호 보조 업무 까지 포함하여 30년 차가 넘는 간호사들도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을 오랫동안 일할 수 있게 만들까?
우선, 미국에서는 일반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본인의 근무 분야에 따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 다양하다. 단순히 자격증 이름만 따는 것이 아니라, 보너스를 받거나 시급이 인상되기도 한다. 자격증 취득에 필요한 시험 비용 및 교육도 대부분 병원에서 지원해준다. 또한 해마다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는 비용도 상당수 지원된다. 간호사 스스로 공부하고 해당 자격을 유지하기 들이는 노력에 대해서 그에 합당한 보상이 지원되는 것이다. 작년 일을 시작하자마자 병원 간호사로서 필수인 ACLS(전문심장소생술 의료인 과정)을 취득했는데, 이 경우 ACLS 시험 비용 뿐만 아니라 시험을 위해 교육을 들은 그 시간 까지도 내 시간당 급여로 계산하여 지급해 주었다. 교육을 들으러 병원에 가거나 자격증을 이수하는 일들이 그저 귀찮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 돈도 벌 수 있고 내 업무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NP, 혹은 PA 가 되려면 해당 과정의 대학원에 진학하여 Nurse practioner(전문간호사 면허)를 취득해야만 한다. PA(physician assistant) 의 경우, 간호학과를 졸업하지 않았더라도 PA school 에 진학할 수 있다. NP 나 PA 모두 법적인 면허를 가지고 일하기 때문에 처방권에 따라 비교적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주에 따라서 NP 의 업무 범위가 굉장히 제한 적인 경우도 있지만(플로리다 주의 경우 NP 의 권한이 굉장이 낮은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중부는 NP 가 할 수 있는 업무 범위가 넓은 편이다. 또한 일반 간호사보다 더 많은 평균 급여를 받게 된다. 자격증과 마찬가지로 많은 병원에서 근로자에 대한 교육 지원을 아끼지 않는 편이라, 병원에서 정직원으로 일하는 경우 대학원 학비도 어느정도 지원받으며 일할 수 있다.
현재 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Adult Geronology primary care NP(AGNP)는 주로 성형외과 의사들과 함께 수술 상처나 관리하고 외래로 일반 환자들을 보기도 한다. 병원에 재원 중인 환자들을 주 1-2회 직접 살펴보며 상처 간호 계획을 정하고 주 1회는 대학교에 가서 간호 학생들을 가르친다. 이 분 외에도 NP 로 병원에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다양한 형태로 본인의 전문분야에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한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한 편이다. 또 실제 현업에서 업무를 하는 간호사들이 직접 간호학생들을 가르칠 경우 생생하게 본인의 경험을 살려 지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full-time 으로 근무할 경우 직장에서 제공하는 베네핏(기본적인 건강 보험, 학비 지원 등 )을 받게 된다. 회사 혹은 병원에 따라 복지가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지만, 같은 직장에 풀타임으로 일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복지를 지원 받게 된다. 한국 처럼 한 직장에서 소속 직원으로 일하는 데 누구는 정규직으로 누구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서로 다른 복지 혜택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또한 어떤 포지션으로 일하던 업무 범위가 정해저 있기에, 본인이 맡은 일 외의 다른 일 까지 떠 맡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정당하거나 합법한 업무가 아니라면 언제든 관리자에게 건의할 수 있다. 미국은 소송이 빈번하고 번거로울 정도로 절차를 중요시 하기 때문에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해왔던 일들도 누구의 이름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따지는 편이다.
우리가 업무 성취감 및 만족도를 생각할 때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금전적인 보상 뿐만 아니라 본인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및 대우이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시간을 들여서라도, 공부를 더 많이 해서라도 소위 말하는 전문직의 길에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간호사가 전문직이냐 묻는 질문에 미국에서는 예스 라고 대답하겠지만, 한국에서는 "글쎄요.." 라고 할 것 같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한국의 선배, 동기, 후배 간호사들이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다. 그들의 환경이 조금이라도 더 개선되어, 모두가 노력한 만큼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