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년 하고 한 달 그리고 열흘만에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이번엔 세네갈이 아닌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으로. 코트디부아르는 세네갈보다 경제 규모도 훨씬 크고 수도만 보아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곳에서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0개월을 지내게 되었고 예전처럼 많은 이야기들은 들을 수 없겠지만 세네갈 께베메르 시골에서 옆 나라 코트디부아르 수도로 상경해 느끼는 것들이 많은 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내려 가볼까 하고 새로운 메거진을 시작하였다. 이곳엔 세네갈에 없던 샤넬, 맥, 디올, fanc, 버거킹, KFC 외부에서 들여온 유명 브랜드들이 있었고 그것들만으로도 내겐 충분히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 들것 들이었다.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고 이제야 한두 곳 찔끔찔끔 나가기 시작했는데 얼마나 더 놀랄 일들이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 이곳, 코트디부아르다.
많은 사람들이 묻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의구심이 들었던 질문,
왜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그 질문을 최근에 조금씩은 알 것도 같은 느낌이 들어 글을 다시 써볼까 하고 생각이 들었다. 언제, 어떤 마음으로 다시 바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바로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든다. 시골에 살면서도 때때로 수도에서 보내는 나날들이 많았던 터라 별 차이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도시의 삶은 19살 서울로 상경하던 날 그날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메스꺼운 매연들 비싼 물가들 눈에 확연히도 띄는 빈부격차들. (실제로 상경 후 내가 이렇게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얀세네갈래라고 칭했던 나는 결국 월로프어로 백인 외국인이라고 뜻하는 하얀 뚜밥이가 되어버렸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편리한 것들과 깨끗한 것들로 큰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출퇴근길엔 택시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사실 께베메르에 살 때는 우리 동네엔 큰 슈퍼마켓이 없었고 동네에 택시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께베메르에 살던 시절 닭가슴살을 수도 대형 슈퍼마켓에서 1-2킬로씩 사다 먹다 언젠가부터 그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이 들어 동네 선생님들과 동네에서 닭을 잡아먹었다. 아침에 꼬꼬댁하고 살아있던 닭이 저녁이면 튀김옷을 이쁘게 입은 치킨이 되어 우리의 삶을 비옥하게 해 주었다. 사실 그 생닭 맛을 보고 나면 한국에 있는 닭들의 맛은 정말.. 먹을 수가 없다. 세상 맛있는 닭맛을 세네갈에서 본 것이다. 또 그 닭들은 너무나 자유롭게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스트레스 하나 없이 큰 닭들이라 건강하고 그 육질이 보통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닭 한 마리에 2500 세파(5천 원)를 주 고사 왔는데 오늘 슈퍼마켓에서 언제 죽었을지 어디 출신인지 모를 닭가슴살 네 덩어리를 2700 세파(5400원)를 주고 사 온 것이었다.
아비장에 온 지 딱 일주일이 되었다. 사실 첫 주에는 회사에서 차를 대주어 편하게 다녔고 오늘 아침 택시를 이용했다. 길을 보니 생각보다 멀지 않다 생각이 들었고 퇴근길엔 걸어서 돌아왔다. 께베메르에선 차비가 없어 걸어가다 보면 자카르타 오빠들이(오토바이 택시) "빈따 어디가? 집가?" 하곤 집에 데려다주곤 하는 매력이 있었는데 이곳에선 동네 꼬맹이들조차 쳐다보지 않거나 간혹 "칭칭", "총총"하며 중국인 흉내를 내며 놀리는 애들 몇몇 정도가 전부다. 사실 고작 일주일 동안 본 게 이것들이 전부라 앞으로의 시간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얼마나 어떻게 달라질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차를 얻어마시며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좀 들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살며 수도에 살던 단원들의 고충이 상상이 되고 마음이 안쓰럽고 속상했다. 당시엔 지방 단원들이 수도 단원들을 부러워하는 문화 아닌 문화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의외로 많이 힘들었을 부분들이 눈에 이제야 들어와 속상하고 미안했다. 많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대신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았을 그들이었다. 수도와 시골의 사람들부터 확실히 다른 부분들은 있다. 특히나 조심스러운 것은 너무나 확연하게 부각되는 빈부격차인 것 같다. 브라질이 치안이 위험한것은 노예 해방 후에도 여전히 백인은 부유하고 흑인은 가난하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이 아닌 다 같은 브라질리언이지만 피부색에 따라 여전히 선명하게도 빈부차이를 볼 수 있다. 흑인들은 그 억압속에 불합리한것에 대하여 저항하기 시작하였고 백인들로부터 빼앗긴 역사가 있기 때문에 빼앗아도 된다는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생의 시작부터 불공정하고 불합리한것이었다. 또 백인들은 그런 흑인들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상파울로나 리오데자네이루를 가보면 한 동네에 길만 건너면되지만 한쪽은 고층 아파트가, 한쪽은 파벨라라고 불리는 빈민촌이 동시에 공존한다. 어떻게 같은 한 나라의 사람으로써 화가 안날 수 있겠는가? 이곳 아프리카의 수도의 삶 또한 빈부가 사실 정말 뚜렷하게 보인다. 흑인들도 부자가 있지만 많은 백인계 외국인들의 부유함은 확실하고도 또 확실하게도 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비추어볼 때 수도 에서 살던 단원들은 더욱이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살아갔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는 불어를 아프리카에서 배웠기 때문에 억양이 있을 거라곤 상상을 하지 못했다. 다 같은 억양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코트디부아르의 억양은 정말 알아듣기 힘들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코트디부아르의 억양이 부산 사투리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또 세네갈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이들만의 표현법들도 있기에 조금씩 알아가며 그런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보려 한다. 어제 탄 택시기사의 억양이 너무나 잘 들리기에 "너 코트디부아르 사람 아니지?"라고 했더니 바로 기니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소한 차이들이 나의 호기심을 자꾸만 자극하고 궁금증을 유발한다. 옆 나라는 어떨지 아랫 나라는 어떨지 자꾸만 궁금해지고 갈망하게 된다. 특히나 토고, 베넹 작은 나라들은 어떻게 다른지가 너무 궁금하고 토고의 일부가 가나에 반환되었다고 들었다 그 반환된 가나에서 살아가고 있는 토고인들의 삶도 너무 궁금하다. 이런 비교분석 내용들이 다큐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On dit quoi?"
"il y a rien"
우리가 평소 쓰는 "Ca va?" "Ca va bien" 대신에 쓰는 표현법이다.
해석을 하면 재미있는 게
"우리가 뭐라 했니?"
"별거 없어"
뭐 이런 느낌인데
뭔가 이들 토착어에서 해석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월로프어도
"Nanga def?"
"Mangiy fii"
"너 뭐하니?"
"나 여기 있어"
이것들이 인사하는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밥 먹었니?"라고 하는 인사법이 있듯 이들만의 표현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튼, 얼마나 잦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는 하얀 뚜밥이의 아비장 상경기 시작.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