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혼"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젊은 공명의 혼
무거워 보이는 머리를 목과 어깨에서 빼내려는 듯 온 힘을 다해 흔들어 대는 한 남자
관절을 분리해 차분히 내려놓기라도 해야 하는 것처럼 온 몸을 분리시키는 한 남자
어설프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또렷한 눈빛을 지닌 채 소리를 하는 한 남자 (심지어 타악기까지)
눈동자가 풀리도록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중력을 거스르고자 하는 한 남자
왜 웃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그러기엔 입가에 서린 미소가 섬뜩해 그저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한 남자
다섯 남자의 퍼포먼스는 이렇게 각자의 캐릭터에 맞게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을만큼
간결했고 섬뜩했으며 확연했고 넓은 가치가 풍겨 나왔다.
몇달 전, 인도 면세점에서 가장 좋은 차Tea를 선물로 받았다. 초록, 빨강, 파랑, 금색의 천으로 감싼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차였다. 차를 좋아해도 정보에는 무지한 나였기에 (밟아 보지 않은 대륙의 지명은
잘 알지 못한다.) 아쌈이 인도의 한 지역이라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인도 차 Peninsula Blend를 선물로 받았고
얼마 전에는 중국에서 갓 넘어 온 녹차를 선물로 받았다.
홍차를 워낙 좋아하는 나는 싸구려 티백부터 우아한 쟈스민 꽃이 섞인 French blend까지
가리지 않고 자주 자주 마시는 편인데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질감 그리고 내 인생에 자주 노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멀리 하던
인도와 중국에서 넘어온 차는 그 풍미가 대단했다.
코로 들이 마시면 푸른 6월의 보리밭이 연상되고 목으로 넘기면 들판에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한 입 가득 머금고 있는 것 같은 향기로움이 전해져 온다.
유럽에서 넘어오는 현대 무용과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엠비규어스의 공연은 어떻게든 보려 하는 나는
사실, 국립현대무용단의 현지화된 퍼포먼스는 잘 보려 하지 않았다.
"한국적이다" 라는 문장이 주는 괴리감과 샤머니즘 성향이 짙은 퍼포먼스는 그것이 극이든 노래든 무용이든
무엇이든 간에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되도록 멀리 하려는 편이다.
특히나 최근에 본 곡성은 그러한 마음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국립현대무용단과
벨기에 리에주극장이 공동 제작한 나티보스 역시 그리 가깝게 여기지도 아니, 여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작년, 벤 리페의 태도의 전시가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에
이번 공연 역시 에이, 그래도 벨기엔데. 라며 조금씩 고개를 들어보기로 했다.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명도 주고 복도 주고
라는 문장이 끝도 없이 반복되는 첫 장면은 그 인상이 대단했다.
딱 봐도 국악소년 같은 한 남성, 가장 이질적인 목소리와 비주얼을 갖고 있는 한 남성이 무대를 서성이며
주문을 걸고 혼잣말을 종용하듯 소리치며 걷고 있었다.
구석에는 귀신 들린 듯한 총각 하나가 관절을 스스로 꺾고 있었고
남아 있는 무대 모서리에는 청과 홍을 하나씩 두른 청년들이 노려보거나 좌절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귀신의 존재에 대해 듣고 자란 나는 근래 곡성을 보며 한국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혼적인 존재들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왜 우리 민족은 깨끗한 영을 추구하기보다 혼적인 존재에 대한 갈망과
그것들을 숭배하며 또 갈망하게 되었을까?
라는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하고 싶은 퍼포먼스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듯한 웃음과 몸짓들은 모든 기능을 상실한 지적 유희에 가까웠고
무지한 관객은 무엇에 홀리는지 깨닫지 못한 채 웃고 있었으며
그들 역시 무엇을 따라 하는지 모르는 무지의 경계에서 히히덕거리며 온몸을 비틀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과 같이 가고 싶었지만 같이 갈 순 없었다. 아니,
같이 가면 아니 되었다.
나를 부르는 것은 전통의 영이 아니라 오래된 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나는 차를 마셨다.
뜨거운 물을 약간의 찬물과 섞어 80도의 적정한 온도를 만들어야 했고
한 꼬집의 차를 잘 섞어
3분 정도가 지나야 그제야 한 모금 목으로 넘길 수 있었다.
현재와 과거(전통)의 공존은
뜨거운 현실의 현재와 식어버린 과거 유형의 재를 섞어
적정한 온도를 만들어 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차가 우러나는 것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마신 차를 즐거워했던 것처럼
2016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삼십 대의 한 사람임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오늘도 이런 질문은 피해갈 수 없다.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지?
내가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그것도 남한에서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지?
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지?
이미 존재는 했으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티보스 중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