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크 데리다의 유령론으로 살펴보는 데미안 허스트와 죽음의 香
들어가며 - ‘죽음’이라는 유령
인간은 죽음을 현존(現存)하며 인식할 수 있는가? 한 번도 죽어본 적 없는 인간이 죽음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나? 죽음은 지금껏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유한함”이며 가보지 않은 그리고 볼 수 없는 “미래” 다. 그런데 이런 죽음이라는 것으로 인해 이후 인간 존재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고, ‘내세론’ 이 만들어졌으며, 비로소 종교와 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과연 있는 그대로의 현존재를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상상과 주관을 개입시켜 왔는지 고민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자크 데리다가 주장한 ‘유령론’은 매우 유의미하다. 우리는 논리와 이성뿐 아니라, 습관적으로 “가상의 현존재”를 만들어 현실을 정당화하곤 한다. 특히 데리다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인간 사회에서 “시간” 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유령” 의 역할이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죽은 덴마크 국왕의 유령이 왕세자 햄릿의 모반을 이끌어 내는 동기 역할을 한다. 후계자 자리를 보장받은 왕세자의 입장에서 죄를 저지를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혼령에 홀려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를 의심하고, 더 나아가 삼촌을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햄릿의 행동은 ‘정신병’에 의한 것이라고 봐도 지나칠 만큼 비논리적이고 충동적이다. 이 과정들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가 바로 아버지의 “유령”이다. 데리다는 비극 ‘햄릿’ 속에서의 비논리적 시간 전개가 유령에 의한 것임을 강하게 피력하고, 더 나아가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들”을 실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전개했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운명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이라는 “유령”에 이끌려 미래로 나아간다. 그래서 어떤 일본의 의사는 “죽는 방법을 고민해야 살 방법도 알게 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그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 상태에 의해 정신이 지배된다는 것 말이다. 그런데 죽음만큼 인간에게 현실적인 현상으로 보이고 운명론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없다.
데미안 허스트의 “유령”
이 글에서는 데리다가 취하는 유령에 대한 태도와 죽음에 대한 인간들의 태도, 그리고 그것이 예술을 통해 발현된 양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직접적으로 데리다의 ‘유령론’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의 비현실성과 미래성에 대해 명확하게 제시한 작품을 해석함으로써, 데리다의 관점을 생산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현대 미술 작가 중에 사생관(死生觀)을 논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다.
죽은 상어의 사체로 만든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지게 된 동기와 과정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죽음을 ‘비현실적’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처럼, 죽음은 우리 삶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닥칠 때에야 경험하게 되는 매우 특수한 사건이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상태 또는 죽음 자체를 아무리 현재로 번역한다고 설명한다 할지라도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허스트도 이 사실에 깊게 천착한 나머지, 죽은 상어의 사체를 구해 작업에 들어갔다. 강철로 된 수조에 포르말린 용액을 넣고, 타이거 상어의 사체를 넣었다. 그리고 상어가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끔 하기 위해 내부에 모터를 달았다. 허스트는 움직이는 상어의 모습을 통해 죽음과 삶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분명히 물체가 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허스트와 데리다가 만나는 지점
사실 허스트의 사생관(死生觀)은 데리다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아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의 외할머니는 성모 마리아상과 함께 자신의 건강을 위해 약을 복용하는 데 집착했다. 이 두 가지 요소에서 허스트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현세의 안녕을 염려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환상”, 즉 하나의 판타즈마(Phantasma)에 집착하는 인간의 일면도 엿보았을 것이다. 허스트가 작업한 “상어" 시리즈 이외에 “알약 시리즈”와 “새로운 종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모티브로 만든 창작품) 시리즈를 보면 약을 통해, 정치를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의 환상 내지는 유령(데리다의 관점에서 보면)을 여실히 관찰할 수 있다.
허스트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예술”을 통한 구원은 불가능한지 계속 되묻는다. 만약 인간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는 존재가 정신적이고 절대적인 그 무엇이라면 인간이 계속해서 창작해 내고 향유하게 되는 예술은 구세주가 될 수 없는가? 이런 사유는 우리의 삶 자체가 “유령 성”을 띄고 있다는 유연한 사고 없이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특히 허스트는 삶 이후의 그 무엇을 주관하는 주체조차 가변적인 것으로 둠으로써 또 하나의 사유 체계를 완성해 낸 것이다.
허스트가 주장하는 죽음의 주관성은 “해골 시리즈” 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다이아몬드 해골 조각을 통해 인간의 죽음이 얼마나 다각도로 조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야기한다. 죽음은 매우 비참하고 어려운 것이지만 때로는 아주 영광스럽고 빛난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몸은 그 즉시 부패와 변질이 예견되어 있는 것이지만 때로는 다양한 의미 부여를 통해 그 가치가 재생산되기도 한다. (북한이나 우간다와 같은 독재국가에서 영구 방부 처리된 독재자의 몸, 이집트 사람들의 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피라미드 내에 보관된 파라오들의 미라 등)
이처럼 죽음의 일상성과 탈일상성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복잡 다양한 상상과 그 공포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서구 문명의 과학-합리적 사고방식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데리다나 허스트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이란, 선형적이고 순차적으로 움직이는 삶의 궤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나름의 “유령”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환기하고, 그 사건을 시뮬레이션하며 여러 번 마음속에서 반복해 나간다. 또 타인의 죽음을 관찰하거나 대리 학습(vicarious learning)을 통해 "나의 죽음”을 또 다른 형태로 재조합 혹은 상상해 보곤 한다.
보류된 죽음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불장난 같을지도 모르는 Burning ghat_화장터의 불길은 지금도 내 눈동자 안에 선명히 그려진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간소하게 꾸민 들것에 실린 ‘new dead body’를 들고 들어온다. 샛노란 꽃과 주황색 꽃이 요란하게 장식된 시신은 죽은 지 24시간 이내로 바라나시에 있는 화장터에 와야만 한다. 강가신과 시바신의 만남의 장소인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에 본인의 시신이 던져져야 비로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은 죽기 전까지의 믿음이다. (죽음 이후의 것은 삶인지 윤회인지 새로운 시작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여자들이 울면 천국에 가지 못하기에 그곳엔 외국인 여자를 제외한 현지의 여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주는 머리카락을 다 밀어야 한다. 뒤통수 아래 목덜미에 하늘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꼬랑지 같은 머리카락을 조금 남기고 모든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린다. 그리고 흰 천을 온몸에 두른다.
갓 들어온 시신은 잠시 강가에 머문다. 강기슭에 내려놓고 그 입에 갠지스 강의 강물을 조금씩 넣어준다. 여자는 금빛, 남자는 주홍빛의 천을 둘러놓는다. 그리고 계단에 비스듬히 눕혀 놓은 채 차례를 기다린다.
한 구의 시신이 다 타기까지 넉넉잡아 4시간이 걸린다. 향나무를 비롯한 모든 나무를 잘 쌓아 역한 냄새가 나진 않는다. 그냥, 여기저기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날 뿐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불멸을 꿈꾼다. 그러하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책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것이다.라고 짧은 발표를 하는 날 바라보며 동양 철학자인 교수님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지 않다. 우린 모두 그저 죽음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래, 우린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죽음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 않다. 그저 망각한 채 삶을 살다 어느 날 죽는 것이다.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린 알지 못한다. 단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가까운 무언가의 헛된 죽음 혹은 이별을 통해 단편적으로 인식할 뿐이다. 내가 어떠한 형태로 어떻게 죽게 될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한다.
화장터는 365일,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은 인도 정부 라이선스와 화장터 주인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촬영을 할 수 있다. 흰 셔츠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백발의 서양 중년 부부, 중국인들, 나 같은 동양 여자들, 근래에는 러시아 젊은 커플들이 메케한 연기 속에서 겨우 눈을 뜨고 눈물을 글썽 거 리며 (감정의 동요가 아닌 화학적 반응에 의해) 타들어가는 그리고 녹아내리는 시신을 본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리고 어떤 현상을 감각 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눈 앞에 낯선 사람이 죽어있고 그 사람은 인도 사람이고 천국에 가기 위해 본인의 죽은 몸을 이곳에 태운 뒤 갠지스강에 뿌려 달라고 유언을 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드디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만 직접적 언급은 피하기 마련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을 온전히 보류시킨 채 생을 유지해야 완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건 오직, 어떤 것에 대한 지체(보류)의 때이다. 그러한 순간에만 오지 않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지체(demerure)와 재촉(mise de demeure)의 경계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을 지체하지만 삶은 죽음을 재촉한다. 우리는 어느 곳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저 죽음을 보류한 채 살아간다.
Melting eyes
뜨거운 불길 속 시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타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녹아내린다. 모든 장기는 가장 먼저 타버리고 골격인 갈비뼈만 앙상하게 남아 인간의 형태를 겨우 유지한 채 누워있다. 가장 늦게 타는 것은 발, 발가락, 발톱, 뒤꿈치이다. 그곳에는 미처 불이 다다르지 않는다. (화장 의식이 끝난 뒤, 남은 발은 갠지스 강에 풍덩 하고 던진다)
내가 본 그 남자는 너무나 완전한 자세로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죽어 있었고 눈을 뜨고 있었으며 얼굴의 피부와 눈동자는 녹아내려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았다. 연기로 인해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그리고 닦아도 닦아도 흐르는 눈물을 떨구기 위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려 그의 흘러내리는 피부를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 속에 타인이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눕게 될 그 자리는 나의 자화상과도 흡사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데리다가 말하는 눈멂과 닮아 있다.
데리다의 자화상은 자아의 재현(representation) 이 아니라 유령처럼 남이 있거나 프레임의 열림과 닫힘을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해주는 가시적인 흔적을 통해 주어지는 “사건으로서의 나”를 그리는 것이다. 기존의 사유를 대상화하고 평가하는 보는 눈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킨 채 눈멂의 순간에 비로소 새로운 시야를 가진다. 눈이 멂과 동시에 빛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눈멂의 구조를 질병과 무능의 프레임과 전혀 무관한 선험적인 사건과 연관시키며 유한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험난한 여정에 관해 이야기한다. 해체론의 눈멂은 여러 겹의 고통과 희열을 동반하는 것과 같다. 눈물이 없는 메마른 눈은 사물과 자연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며 인간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우리의 눈은 왜곡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자기중심적 사고를 유지하지만 그 눈에 맺히는 눈물은 어른거림의 굴절현상으로 인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면의 다충성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체론적 눈물의 상태는 눈멂을 통해서이다.
보는 나도 연기와 재로 인해 눈이 멀어 있고 보이는 그도 -불과 하루 전까지 생생하게 살아있었을- 불길에 휩싸여 눈꺼풀이 녹아내려 눈이 멀었다. 둘 모두가 눈멂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그는 죽어있다. 나는 살아있지만 언젠가 그처럼 죽을 것이기에 지금도 나의 죽음은 보류된 상태이다. 고로 죽음은 유령처럼 나의 삶을 지배한다. 그의 유령은 또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출현하는 것이다. 물론 유령은 지금 살아있는 생생한 존재가 아니라 이전에 살았던 존재 즉, 과거의 존재이다. 과거의 현전과 거의 현재화가 유령이 함의하는 하나의 특성이다. 과거의 존재인 유령은 계속 현재로 돌아온다. 프랑스어 revenant는 이렇게 다시 돌아온다 re-venir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로 유령과 함께 하는 현재는 과거와 같이 있는 현재이다. 현재는 과거를 떨치지 못하고 사로잡혀 있다. 고로 유령이 나온다, 존재하는 것은 과거가 현재에 출몰하는 어긋난 시간 즉, 몰 시간성(anachronie)을 함축한다. 즉 유령이 출몰하는 현재는 과거와 현재가 지금 -여기에서 공존하는 것, 다시 말해 비동시성이 시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을 뜻한다.
내 주변에서 목격되는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 과거의 기억으로 유령처럼 떠돌며 나의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다.
객관화된 기억을 소유한다는 것
나의 죽음은 타인의 관찰과 의식을 통해서 보편적 객관성을 띄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죽은 뒤 어떠한 형태로 타인에서 나타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뿐이다. 우리에 대한 모호한 기억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이된다. 그들은 왜곡된 기억으로 죽은 이, 죽은 나를 기억할 뿐이고 그 기억의 전달로 인해 나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희미해진다.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삶을 더듬어 본다. 눈이 닿는 곳은 생이 지속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기억일 뿐이다. -오히려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완전한 타인의 시선이 존재한다. 닿을 수 있지만 닿을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린 함께 앞을 보게 된다. 앞을 보는 것만으로도 -옆을 볼 수 없지만 비록, 눈꺼풀과 눈동자가 흘러내려 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앞을 보고 있는 것이다- 무수한 이미지의 나열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일차원적인 표상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앞을 보는 것의- 내적 갈등 혹은 충만함에 대해 알 수 없다. 단지 가늠하며 지금의 삶에 주어진 보류된 죽음을 가끔 영위하며 지낼 뿐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흔히 기독교적 문화권 내에서의 죽음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갔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우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다. 고로 그는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우리의 몸은 대부분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불로 인해 그 수분이 다 사라졌을 테니 그는 증발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증발했다.
죽음을 “무언가”로 인해 인식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유령의 존재를 가끔 섬뜩한 기분으로 알아차리는 것과 비슷하다. 현존하지 않는 현존으로서, 유령은 이미 객관적인 존재이다. 햄릿의 유령은 햄릿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령에 관련하여 기억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집단적 기억 이어야 한다. 이 기억은 하나로 통일되지는 않으면서도, 서로 확인 가능한 사회적 지평을 구성한다. 또 이 기억은 어긋남과 바로잡음(정의)의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가지며, 미해결의 과제와 함께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그래서 데리다에 의하면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가 된다.
나가며 - 죽음은 보류된 삶의 환희
“알 수 없음, 볼 수 없음, 가늠할 수 없음, 규정되지 않음”이 주는 환희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기에 그것에 대한 환상을 가진다. 하지만 부정적 의미가 산재해 있는 죽음에 대한 환상은 엄습해 오는 공포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우리도 힌두교 안에서 위안과 희망을 얻는 그들처럼 죽음 이후의 천국 혹은 윤회를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 속 천국처럼 다음 생을 기약하는 것이 아닌 신과 함께 하는 완전한 기쁨을 상상하기도 한다.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미약하기에 그러하다. 결국 우리는 죽음이라는 유령 앞에서 눈물 고인 눈으로 현실을 보며 믿음의 영역에서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사유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 역시 우리 어깨에 앉아 있는 유령의 손짓 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참고문헌〉
자크 데리다 , ⌈시선의 권리⌋
자크 데리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