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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작골 Mar 31. 2020

알프스 산맥에서 눈썰매로 달 따돌리기

루체른 리기 산맥





진구가 있던 집에서 주인아주머니의 배려로 편히 씻고 편히 자고 난 다음날은 그 어떤 날보다 큰 기대를 안고 일어났다. 이날은 바로 알프스 산맥을 드디어 올라가 보는 날이었다. 사실 모두가 올라가는 융프라우 산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산을 택했다. 스위스 패스만 있으면 공짜로 배와 케이블카와 기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리기산은 산 정상에서부터 눈썰매를 타고 내려올 수 있는 산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아주머니께서 삶은 달걀, 빵, 치즈, 햄, 잼, 커피, 주스 등등으로 가득 찬 아주 거한 아침을 준비해주셨다. 그분은 오랜 시간 독일에서 살다가 스위스로 오신 분이셨는데, 같이 얘기를 나누는 게 너무 즐거워서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배를 타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즐거웠다. 무엇보다 진구가 치즈를 좋아해서 우리가 밥을 먹는 내내 옆에서 알짱거리면서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기도 하고 옆에서 나를 뚫어지도록 보기도 했다. 아침에도 치즈를 쥐고 '기다려'를 시전 했는데, 침착하게 기다리면서도 침을 뚝뚝 흘리는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나는 심장을 부여잡아야만 했다. 우리가 집을 나서기 전 아주머니께서는 가는 길에 입이 심심하지 않도록 귤도 챙겨주시고, 우리 보온병에 따듯한 녹차도 넣어주셨다. 정말 고마운 인연.     

    

아침
기다려




그렇게 출발한 리기산 가는 길은 그 여정마저도 크나큰 즐거움을 주었다. 시내 한가운데부터 강이 흐르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중앙역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 호수 위를 달려 웨기스역으로 도착한 후, 거기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가, 다시 기차를 타고 정상으로 가는 순서였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도착한 웨기스는 정말 너무 평온했다. 그 넓은 호수가 산에 잔뜩 둘러싸여 있었고,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언덕길은 푸른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워서 겉옷을 벗고 다녔는데, 얇은 카디건 하나 걸치고 푸른 언덕 앞에서 찍은 사진은 내가 스위스를 여름에 갔던 건가? 싶은 착각이 들게 했다. 이렇게 해가 따스할 때 여행을 온건 정말 행운이었던 것 같다.      


케이블카
기차


사실 리기산 정상은 별것 없었다. 비행기에서도 패러글라이딩하면서도 계속 봤던 풍경이었고, 오히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기에 산 정상에서 바라본다고 해서 커다란 감동은 없었다. 스위스를 한번 가본 사람은 평생 스위스를 잊을 수 없다고 하는데, 그건 스위스라는 나라가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어떤 곳에서 봐도 관광명소 못지않은 알프스 산맥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눈 덮인 산의 모습과 에메랄드처럼 반짝거리는 호수의 모습이 익숙해질 정도로 모든 곳이 아름답다. 우리가 리기산에서 기대한 건 아름다운 풍경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리기산을 선택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눈썰매를 타는 것


리기산 정상


사실 눈썰매를 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오는 바람에 산을 오르기 전에 눈썰매용 신발을 대여하지 못해서 바닥이 미끄럽기도 했고, 블로그에서 본 눈썰매 후기들이 어마무시했다. 블로그에서는 구덩이에 처박히고 핸드폰을 떨구고 무서워서 울면서 걸어 내려왔다는 등의 후기가 많았다. 패러글라이딩도 하고 언젠가는 스카이다이빙까지 하고 싶다던 용감한 내 친구 수는, 눈썰매 후기가 너무나도 생생해서 조금 무서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고민 끝에 우리는 눈썰매를 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내려가서 신발을 다시 대여해서 올라왔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많이 생긴 덕분에 눈썰매 코스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코스가 여러 개라는 걸 알게 되어서 가장 완만하고 만만한 코스에서 썰매를 탈 수 있었다. 블로그에서 우리를 겁에 질리게 한 후기를 남기신  그분들은 익스트림을 위한 코스로 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익스트림 코스의 설명란에는, '매우 무섭고 위혐한 전문가를 위한 코스'라고 적혀있었다. 3살부터 스키를 즐기는 익스트림 스위스인들에게 무섭고 위험하다는 건 아마 토종 한국인에게는 견디기 버거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이 곳을 들르신 분들이셨겠지만 그분들을 위한 심심한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우리가 탄 코스는 전혀 무섭지도 않았고, 풍경을 천천히 즐기면서 내려갈 수 있었다.      




처음에 신발이 없어서 주저하니까 아저씨가 사진이라도 찍고 돌려주라고 공짜로 썰매를 대여해줬었다. 우리는 그 썰매를 들고 정상으로 올라가서 썰매 모험가라도 된 것처럼 사진을 찍었다. 지도를 들고 길을 찾는 시늉도 내고, 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을 응시하기도 했다. 그랬던 우리가 결국 신발을 빌려와서 다시 정말 썰매를 대여하러 오니까 아저씨도 웃긴 눈치였다. 우리도 그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눈썰매는 한번밖에 탈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약 삼십 분가량을 타고 내려오는 코스였다. 


중간중간 빠르게 달릴 때는 정말 재밌기도 했고,  내려가는 풍경은 정말 너무 예뻤다. 무엇보다 이날은 달이 정말 너무너무 가까웠다.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 스위스가 달과 가까운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후자는 스위스를 너무 좋아한 내가 한 과대망상인 거 같다. 인정한다. 달은 너무 커서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우리를 따라왔다. 내가 커다란 달을 보면서 눈 덮인 알프스를 눈썰매 타고 내려갈 줄이야. 너무 행복해서 신기하고 웃겼다.   


눈썰매 탐험가
달이 쫓아오던 우리
해 질 무렵 끝난 ride


다시 돌아가는 길은 또다시 해 질 무렵이었다. 배를 기다리면서 웨기스에서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는데, 그 넓은 호수에 갈매기나 백조가 떠다니고 있었다. 호수가 마치 바다처럼 너무 넓어서 백조가 떠다니는 게 이질적이었다. 이렇게 스위스에서의 소중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


웨기스의 모습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에그 홀더를 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 그래도 에그 홀더는 정말 귀엽고 독특한 디자인이 많아서 욕심이 났지만 왜 필요한지 느끼지 못했었는데, 가정집에서 써보니까 삶은 달걀은 퍼먹어야 제맛인 것이었다. 그냥 몽땅 벗겨놓고 소금에 찍어먹는 것보다, 소금을 조금씩 뿌려 퍼먹으면 푸딩 같기도 하고 뭔가 더 맛있다. 흘러내릴 걱정 없이 삶은 달걀도 반숙으로 준비할 수도 있다. 유럽 사람들은 요리는 그다지 안 하면서 먹는 방법은 정말 정성을 들이는 거 같다, 계란을 삶는 게 무슨 요리라고 이렇게 준비물이 많을까? 얘네는 달걀 껍데기를 위 뚜껑만 이쁘고 반듯하게 자르는 기계가 있다고 했는데, 이번에 여행하면서 들어간 주방용품 판매장에서 그걸 봤다. 정말 하찮고 귀여워서 갖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달걀 뚜껑 오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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