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근래 집 인테리어를 새로 하겠다고 전문 업체의 전문가들이 집을 몇 번 드나들었다. 실측을 하고 돌아간 그들은 매장 전시장에서 2차 미팅을 하자고 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나 또한 집안의 인테리어에 큰 관심이 없으나 가족의 평화를 위해 아내를 따라 몇 번 나섰다.
깔끔한 전시장은 어지간한 대형 마트보다 컸다. 평수 별로 나눠진 전시공간은 모델 하우스처럼 완벽했다. 주방과 욕실, 거실의 가구와 벽면의 수납공간은 절묘하게 숨겨져 있었고 방문도 벽에 감춰져 있었다. 직원은 이 감춰진 문을 히든 도어라고 했다. <용쟁호투>의 마지막 결투 장면에 나오는 유리방 같은 용도가 아니라면 벽과 구분이 안 되게 문을 숨기는 것이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걸 깔끔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지 요새 인기라고 우릴 담당한 직원이 적극 추천했다. 그 말끔하고 깔끔한 완벽한 세계에 두 시간이나 붙잡혀 있다 집에 오니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인가 다음날 저녁에 TV에서 <파이트 클럽>을 해줬다. 젊은 시절 열광했던 영화를 다시 보면 두 번 놀라는데 하나는 이십 년 넘은 영화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오래된 영화들이 여전히 멋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를 정확히 설명하는 예언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대부분 이 영화를 알겠지만 그래도 간략한 줄거리를 소개하면 이렇다. 멀쩡한 엘리트 직장인이 어느 날 건달 같은 남자를 만나 언더그라운드 싸움 동아리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영화의 재미는 줄거리보단 브래드 피트의 젊은 날을 보는 기쁨, 현대 사회에 대한 지독한 독설과 미스터리한 설정과 사건, 극적인 반전에 있다. 이 영화엔 아직도 회자되는 명대사들이 많이 나온다. 그중 헤드라인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이 대사다. “상처 없이 죽고 싶지 않아.” <파이트 클럽>에서 브래드 피트의 대사다. 이 대사 후 자신을 한 대 때려 달라고 한다. 저 말이 예전엔 멋있게 들렸다. 다시 보며 생각해 보니 기가 막혔다. 어느 누가 상처 없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매끄러운 공간과 거친 공간
죽는 순간까지 상처를 입으며 산다. 흠집 없는 인간, 결함 없는 완벽하고 완전한 인생은 불가능하다. 그런 건 모델 하우스와 드라마 속에나 있다. 그러나 광고는 흉터 없는 삶도, 모델 하우스 같은 집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광고는 그렇게 매끈한 인생, 매끈한 일상, 매끈한 사람을 보여준다. 흠집 없는 표본을 보여주고 유혹한다.
우린 그런 광고들을 보면서 자신의 일상과 공간, 그리고 자신을 돌아본다. 고급 호텔보다 편한 내 공간이 어수선하고 지저분한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이번 주말엔 생활 소품 매장에 가볼까, 가구를 바꿀까, 아니면 아예 인테리어를 새로 해볼까 궁리하게 되고, 그 궁리는 말끔하고 깔끔한 집에 대한 염원으로 발전된다.
이런 깔끔함과 매끈한 주거 공간에 대한 소비자의 열망은 <소비의 사회>에서 보드리야르가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보드리야르는 날씬한 몸매를 추종하는 현상은 몸의 선에 대한 숭배라고 말하며 이런 “숭배에서는 아름다움과 억압이 굳게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이 경우 육체는 그 고유의 물질성과 성욕과도 관계없다. 오로지 “유행의 지상 명령과 정신적 조직화의 원리인 죽음의 지상명령”에 따를 뿐이다. <파이트 클럽>에서 나왔던 주인공의 집과 주인공과 타일러 더든이 함께 사는 낡은 집의 대조, 자본주의를 향해 지독한 독설을 날리면서 다 쓰러져가는 집과는 어울리지 않던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의 완벽한 복근이 보여준 부조화가 보드리야르의 저 말을 시각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부조화는 계속된다. 집의 인테리어는 깔끔하고 모던한 게 유행인 반면, 소위 핫플레이스는 빈티지하고 창고 같은 느낌의 카페와 레스토랑이다. 공장과 창고를 개조하고 오래된 건물과 집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낸, 인테리어를 극단적으로 절제한 장소들이 인기다. 집 안의 가구들은 통일감과 수납을 위해 세심하게 선택되고 배치되지만 이런 카페와 레스토랑의 가구들은 제 멋대로다. 저쪽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고 반대쪽은 철제다. 한쪽은 로코코 양식의 부풀린 소파인데 다른 한쪽은 미스 판 데어 로에의 그 유명한 검은색 바르셀로나 소파의 모조품이다.
이 부조화, 그러니까 집은 이음새와 문지방 하나 없이 매끄럽고 정갈하길 바라면서 정작 열광하는 핫플레이스는 이와 정반대인 취향인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낡고 빈티지한 공간에 대한 열광과 결벽증 환자가 살법한 매끈하고 모던하고 깔끔한 주거 공간에 대한 열망의 공존을, 레트로와 모던, 낡음과 새것, 이 양극단을 오가는 소비자의 혼란한 내면을 말이다.
분열된 주인공
결론을 말하기 위해 스포일러를 무릅쓰고 영화의 결말을 말하면, 영화 속 두 주인공은 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자아와 안락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어 한 또 다른 자아와의 충돌, 일상과 상상의 공존이었다. 그래서 일상을 사는 낮의 공간은 매끈하고 안락하다. 주인공은 이 공간을 이케아 가구와 고급 러그, 모던한 탁자와 조명 기구로 채운다. 이 주인공이 퇴폐적인 여자를 만나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자아를 창조해 내고 낡고 허름한 비밀 공간을 찾아낸다.
우리도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걸까? 말끔한 집의 인테리어와 허름한 핫플레이스 감성 간의 간극은 이 영화 속 상상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안락함을 위해 매끈하게 만든 집에서 오히려 숨이 막혀 무질서하고 느슨한 공간을 찾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공간에 생활감을 묻힐까 두려워 조심스러워하던 자신에게 편히너부러질 수 있는 공간을 선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라면 국물 하나 흘리는 것도 눈치 보이는 주방에서 갖게 된 강박을 커피를 흘려도 티가 안 나는 공간에서 해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처럼 자아의 분리를 겪지 않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내리는 자가 처방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층간소음이 무서워 케이지에 갇혀 있던 강아지가 애견공원에서 뛰노는 게 연상되지 않나?
사람과 집에 깃드는 흔적
흠집 없는 사람은 없다. 집도 사물도 마찬가지다. 완벽하고 완전한 집도 인생도 없다. 사람이 사는 모든 집과 사람이 소유한 사물은 손때를 타고 흠집이 생긴다. 애한테 낙서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탁자 위에 맥주의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남편에게 잔소리를 해봐야 소용없다. 아무리 깔끔한 인테리어도 시간과 사람의 숨결을 버텨낼 수 없다. 그것은 생활감이다. 그것은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워지는 것이다. 사람의 손을 안타는 집은 폐가가 되고 사람의 손을 안타는 물건은 전시된 것뿐이다. 변하지 않는 화이트 톤의 인테리어 속에서 평생 살고 싶다면, 늘 그렇게 유지되는, 그러기 위해 락스를 펑펑 써대는 말끔한 병원에 입원하는 길 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의 손때는 집과 사물의 역사다. 셜록 홈스가 <네 개의 서명>에서 왓슨의 시계를 보고 왓슨의 형의 역사를 추리해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살아온 시간은 그에게 세월의 훈장을 준다. 외면엔 주름과 백발을, 깊어진 내면엔 타자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 대한 통찰을 준다. 이 훈장은 곧 사람의 역사고 역사가 없는 사람에겐 이런 훈장이 없다. 더 나아가 사람의 역사가 없는 공간엔 손때가 없다. 사람이 드나들 뿐 살지 않는 호텔, 백화점, 놀이공원, 모델 하우스가 그런 곳이다. 이런 공간은 매끈하고 깔끔하다. 당연히 역사가 없는 사람도 상처 없이 매끈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린 저마다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는 세월의 흔적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또, 어디서 입었는지 모르는, 아니 어쩌면 그 상처의 원인과 시간을 생생히 기억하는 흉터를 몸과 마음에 안고 살아간다. 인생의 흉터는 자랑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다. 흉터가 우리 삶을 방해해서도 안 되겠지만 매끈한 인생을 목표로 삼고 그 매끈함을 자랑할 필요도 없다.
<타짜>에 나오는 대사를 빌려와 말하자면, 그 매끈한 인생이란 그야말로 파도 없는 인생이고 이 세상이 원하는 바로 그런 인생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 흔적과 흉터가 생기고 남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피해야 할 사람은 매끈함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흠집 없는 사람만 사람대접해 주는 이들이다.
한병철은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라고 했다. 그 매끄러움은 “오늘날의 긍정 사회를 재현”하기에 그 매끄러움은 상처 입은 적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블루스>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리의 인생과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말끔한 인테리어도, 빈티지하고 레트로 한 카페에 있는 “갬성”도 아니라는 것을. 상처를 부둥켜안고 살아온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오래된 사랑, 오래된 우정, 깊은 인연에 녹아 있는 이야기가 인생을 아름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는 것을. 세기말의 객기 어린 <파이트 클럽>의 대사들이 미처 정돈해서 하지 못했던 말은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 여자의 솔직함에 담긴 비밀
<파이트 클럽>에 나오는 대사는 아무리 좋게 들어도 술 취한 철학과 1학년 학생의 넋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하게 말하면 중2병에 걸린 사춘기 소년의 SNS에 잔뜩 도배될 문장이거나. 그러나 이 길들여지길 거부해서 스스로를 분열시켰던 주인공이 내뱉는 말에, 어쩌면 생의 진실이 담겼을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영화 팬들이 이 영화의 명대사를 정리하여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데 열심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다들 이 장면과 이 대사를 놓친 것 같다. 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다니며 우는 건 일종의 우화여서 잠시 한 눈 팔면 정신 나간 여피의 일탈쯤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린 거기서 일종의 생의 진실, 이 영화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암 환자 모임을 취미 삼아 찾아다니던 주인공이 어느 말기 암 환자 모임에 간다. 다들 죽음을 앞두고 깨달은 인생의 비밀과 가족의 감사함 등에 대해 한 마디씩 한다. 그러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져서 두건을 쓴 시한부 여성이 발언하기 위해 앞에 섰다. 다들 자기 고백을 하고 모두의 위로를 받는 그 시간에 그녀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말한다. “전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였어요. 죽음을 받아들였죠. 그런데 정말 아쉬운 건 이렇게 살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함께 뒹굴 남자가 없다는 거예요. 집에 포르노도 잔뜩 있는데... 남자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사회자가 끼어든다. 말을 끊고 모두에게 격려의 박수를 유도한다.
안락한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을 세련된 물건으로 채우기 위해 사는 건 아니다.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파이트 클럽>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말 한마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