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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 어네스트 헤밍웨이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1

by 최영훈

다시, 그러나 낯선

이유를 말하라면 딱히 댈 것은 없지만 읽고 싶은 책이 있다. 누구나 읽었을법한 책이라도 구미가 당기지 않으면 거들떠도 안 보는데 그런 책들 중에서도 유독 마음을 붙잡아 두는 책도 있다. 읽었던(혹은 읽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소설을 다시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가끔 또 읽고 싶어지는 소설도 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그런 책, 소설이었다.

우선 말해둬야 할 것은,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읽는 내내 새로웠다. 어쩌면 읽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랬다면 서른 이전에 읽지 않았을까? 그런 책이 있다. 나이의 분기점을 넘을 때마다 다시 읽으면 새롭게 읽히는. 얼마 전 딸 덕분에 <어린 왕자>에 대해 다시 들춰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책 또한 그런 책 중 하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도.


이 책에는 중편 <노인과 바다 > 외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역자 후기를 보니 그의 단편집 <제5열과 첫 49편의 단편>의 서문에서 자신의 대표 단편이라 생각된다고 언급했던 다섯 편, 그리고 역자가 헤밍웨이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어 선정한 단편 두 편이 실려 있다. 후자의 두 단편은 <인디언 부락>과 <살인자들>이다.


노인과 바다

고통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P.79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그는 생각했다. 희망이 없다는 건 죄악이야. P.98


포기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슬램 덩크>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철학의 원조는 <노인과 바다>다. 더 장엄하고 더 고독하며 더 치열한, 어쩌면 생의 마지막 승부의 순간으로부터. 실패의 연속이어도 살아가야만 한다. 절망이 예감되는 밤에도 희망을 품고 잠들어야 한다. 먼 길을 나가 큰 도전에 뛰어들었을 땐 그만큼 위험도 크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마을과 멀어진다. 먼바다에 나갈수록 해안과 멀어진다. 당연하다. 그렇기에 사람과도 멀어진다. 운명을 나눠질 사람은 멀리 있고 재난은 코앞에 있다.

“자, 이제.......” 그가 말했다. “난 여전히 늙은이야. 하지만 비무장은 아니야.”
너무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하는구나, 하고 노인은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더라면. 저 고기를 낚지 않고 차라리 신문지를 깐 침대 위에 그냥 누워 있었더라면. P.96


그럴 때가 있다. 이것이 행운의 징조인지, 불행의 전초인지 판단하기 힘들 때가. 당연히 물어볼 사람도 없다. 설령 있다 해도 그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 선택도 내 몫이고 그 감당도 내 몫이며 행운일 때 우러나올 기쁨도, 불행일 때 마음속 가득 번지는 쓴 맛도, 다 내 몫이다. 더 큰 문제는 어떤 일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길인지 흉인지 판단하는 것이 처음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 나오는 필립 말로우가 들어오는 사건의 길흉을 판단하지 못한 채 그저 사건에 뛰어드는 것처럼,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에 나오는 마이크 해머가, 로렌스 블록의 소설에 나오는 매튜 스커더가 그러는 것처럼 그저 닥쳐오는 사건을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인지도 모른다. 다 끝나봐야 알 수 있는 것. 그래서 결국엔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엔 담담히 현상과 사람을 응시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이 하드보일드의 철학일지도.


결국, 마지막까지 투쟁하듯 살아나가야 한다.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 그리고 헤밍웨이로 이어지는 이 하드 보일드 세계의 조상들은 삶을 이렇게 생각했다. 대실 해밋의 소설에서 출발했다는 <요짐보>, <라스트맨 스탠딩>, <황야의 무법자>로 이어지는 선과 악이 불분명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외로운 칼잡이, 혹은 총잡이와 같은 캐릭터들은 이들의 삶의 철학을 구현하는 페르소나일지도.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P.96


고생을 했지만 손에 쥔 것은 없다. 그저 커다란 청새치의 뼈와 청새치와의 투쟁에서, 그리고 상어들과의 전투 속에서 얻은 상처만 있을 뿐. 돈도 명예도 없다. 지치고 늙은 몸과 허름한 집뿐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왔고 살아 있다. 한숨 자고 나면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간다. 그뿐이다. 처연하면서 냉혹하고 고독하면서 희망적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

후회 없이 죽는 사람은 없다. 죽어가는 순간,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게 그야말로 후회 없이 살았노라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도 그 순간, 그 죽음의 밤이 다가오는 걸, 어스름하게 느껴지면 돌아보게 된다. 그때, 그 장소, 그 사건, 그 사람. 동정과 연민을 바라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다. 한 그릇의 따뜻한 죽을 원하지만 차가운 위스키를 마시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주인공처럼.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이 지척에 있는 걸 인식하는 남자와 그 남자에게 희망을 주고 싶은 여자. 아프리카의 뜨거움과 킬리만자로의 설산. 우리 삶에 공존하는 이 양면성.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다시 들어볼 것.

프랜시스 맥코머의 짧고 행복한 생애

어떤 순간이 있다. 자신의 비겁함을, 연약한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 있다. 또, 자신에게 있는지 몰랐던 용감함과 야성과 강인함이 용암처럼 분출되는 순간도 있다. 다만, 어느 순간이든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비겁함을 변명할 필요도, 그것을 본 사람에게 위로를 받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 또, 자신의 용감함에 대해 칭찬받거나 인정받기 위해 흥분된 목소리로 업적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어느 순간이든, 본인이 더 잘 안다. 타인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해석하는지는 여러 순간 중 하나의 포착된 순간으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그 마지막 총성이 비겁한 자를 향한 심판이었는지, 용감한 자를 살리기 위함이었는지, 그건 모른다. 사냥꾼은, 케냐의 사냥 가이드는 후자라고 생각했는지도.


하얀 코끼리 같은 산

헤밍웨이는 말 많은 남자들을 혐오한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남자, 지금 이 순간의 사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왜곡하는 남자를. 그런 남자들에게 여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한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입을 좀 다물어 주시겠어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지난주에 저 노인이 자살을 시도했어.” 한 웨이터가 말했다.

“왜요?”

“깊은 절망 때문에.”

“무엇에 대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알죠?”

“돈이 많거든.”


허무를 이기기 위해 “바로 그 때문에 빛이 반드시 필요”하다. “약간의 깨끗함과 질서”도. 돌아갈 집도, 누울 침대도, 자신을 반겨주는 아내도. 그러나 그게 정말 우리를 구원할까? 내일 밤엔 절망과 허무가 찾아오지 않을까? 빛으로 못 나오는 뱀파이어를 상대하듯, 햇볕이 가득한 곳에 있으면 그 모든 걸, 절망과 허무를 물리칠 수 있을까?


살인자들

에드워드 호퍼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 그려 놓은 곳과 닮은 식당에 두 남자가 등장한다. 시간은 다섯 시 반쯤. 여섯 시에 저녁을 먹으러 오는 남자를 죽이기 위해 주방장과 웨이터를 주방에 감금하고, 바에 앉아 있던 손님은 감시한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는다. 킬러들이 떠난 후, 웨이터는 그 남자의 하숙집에 가서 킬러들이 왔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러나 정작 그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다. 킬러들이 쫓아올만한 짓을 어디선가 하고 숨어든 남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쫓길만한 짓을 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도망 다니다 지치면 킬러를 기다리거나 마주한다. 어쩌면 찾아갈 수도. <존윅>처럼.


세상의 빛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여정이 있고 그 여정에서 스쳐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인연이 없듯이, 우연한 만남도 없다. <사평역에서>처럼, 낯선 사람들이 역에서 만나 말을 주고받는다. 다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까? 여기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와 여기서 떠난 이후의 이야기는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어쩌면 어느 낯선 도시에서 우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같은 상투적인 인사를 건네며 다시 조우할지도.


인디언 부락

우리를 가장 무기력하게 하는 건,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덜어줄 방법이 없다는 것,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헤밍웨이를 하드보일드의 거장이라고 하는데, 그 정수가, 그가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와 뒤에 실린 단편들에 응집되어 있다. 그는 직접 체험한 것만 썼다. 아프리카 여행을 한 뒤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썼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1차 세계 대전의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썼다.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좋은 작품을 써야만 한다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고 한다. 강인하지만 연약한 존재, 포식자이면서 피식자인 존재. 인간은 그런 존재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은 헤밍웨이의 동명의 단편집을 오마주 한 것이다.


내 또래인 배우 정우성이 삼십 대 중반의 모델 문가비 사이에서 아들을 봤다.

사랑을 했는지 안했는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할지 안 할 지 모르지만... 난 축하해 주고 싶다.

그나 이정재나 통상적인 한국 남자 배우와는 다르게 살고 다르게 나이를 먹는다.

아래의 글은 정우성이 출연했던 <마담 뺑덕>에 관한 글이다.

https://brunch.co.kr/@eunchaepapa/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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