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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의 네 기사 - 복도훈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2

by 최영훈

동시대의 공감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닌데, 책을 사다 보면 내 또래의 학자가 쓴 걸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 몇 번이나 언급했듯이 지바 마사야, 아즈마 히로키, 사사키 아타루가 그렇고, 고쿠분 고이치로, <철학으로 저항하다>의 다카쿠와 가즈미, <봉기와 함께 사랑이 시작된다>의 히로세 준도 나와 동년배다. 어쩌면 이런 경험 때문에 복도훈이라는 낯선 저자를, 그의 책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더 큰 이유는 제목, 그리고 내용 때문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어서 검색을 해봤는데, 나이와 고향 외에 그에 대해 추론할만한 정보는 없었다. 여느 한국 학자들처럼 학력과 이력이 나열된 프로필을 찾을 수 없었다는 말이다. 결국, 온라인으로 목차를 살핀 후, 직접 서점에 들러 서문과 본문의 몇 페이지를 읽어 그를 “읽어내는” 작업을 한 뒤 책을 샀다.


우선, 이 책에 실린 글들이 2010년에 써졌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전반부, 즉 묵시록의 네 기사를 소재 삼아 전개된 네 개의 글의 큰 줄기를 차지하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가 2003년에 나왔다는 사실도. 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자는 세계의 종말을 예언하는 <요한계시록>으로 시대의 종말, 세계의 끝을 얘기하는 소설과 영화들을 얘기해야만 했던 걸까?


혹시나 해서 몇 가지 떠오르는 일, 그가 책에서 언급한 사건의 일시를 검색해 봤다. 용산참사는 2009년에 있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는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는 2007년을 시작으로 그 뒤로도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앞서 다른 글에서 언급했던 월가의 시위는 2010년에 있었고. 이중 저자가 가장 많이 언급한 사건은 용산 참사다. 유시민 작가가 <국가란 무엇인가>의 서두를 이 사건으로 시작했을 만큼 이 사건은 21세기 한국 사회와 정부와 더 나아가 국가에 여전히 잔존해 있는 야만성을 보여줬다.


끝을 상상하는 이유

시간이 경과할수록 더 나아지길 바라는 것이 있다. 현상과 체제, 더 나아가 사람의 이러한 지속성을 우린 진보라 부른다. 생명의 차원에선 진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것이 멈췄다고 느껴지면, 심지어 역행하고 있다고 느껴지면, 우린 그걸 퇴행이라고 판단하거나 더 나아가 진보의 끝이 온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여기까지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시기, 학자들은 시대의 종언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기도 한다. 우리는 현재 격변기를 살고 있으며 시대의 변환기를 살아내고 있는 중이라 다독이기도 한다. 반면 아예 종말을 예언하는 이들도 있다. 세기말의 종교와 몇몇 영화들, 특히 좀비 영화와 재난 영화들이 그러했다. 또 한편, 이 참에 다 갈아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이들도 나온다. 여기에 덧 붙여 좀만 참으면 새 세상이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메시아와 구원자를 찾으며.


사사키 아타루와 아즈마 히로키의 2010년대 나온 글들에 동일본 대지진 이후 그들이 느낀 일본의 정치와 사회, 재계, 학계의 무능력함과 부도덕함, 섣부른 시대 진단에 대한 환멸이 담겨 있듯이, 복도훈의 글과 비평의 대상인 수많은 한국 소설들에도 그러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자괴감과 불안한 성찰이 세기말과 묵시록적인 세상을 담아낸 소설에, 그리고 그의 비평에 담겨 있는 것이다.

불가능성의 가능성

이 책을 고른 다른 이유를 하나 더 고르라면 나 또한 좀비를 소재로 하는 텍스트, 종말과 세계의 끝을 다룬 텍스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문화 상품들은 왜 지치지도 않고 나오는 걸까? 복도훈이 말했듯, 이런 것들은 시대와 세계와 인류의 끝을 얘기한다. 때로는 SF적으로, 때로는 <28일 후>처럼 리얼하게, 때로는 <레지던트 이블>처럼 게임처럼. 이 불안하고 두려운 내용을 책과 영화라는 텍스트를 통해 소비하는 소비자들은 세계의 끝을 상상하는 대신, 저자의 말처럼, “세계”를 사유하지 않는다. 그로인해 이 세계가 “정상”적이라는 착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저자가, 또 사사키 아타루와 아즈마 히로키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야만의 숨결을 뿜어내고 있는 세계의 두 축, 정치로는 민주주의, 경제로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이 사회와 나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그런 사회와 나라가 만들어낸 현상에 대해 시선을 두지 않으면 이 세상과 세계는 계속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면서 이 이상한 세계는 “세계의 끝”이라는 판타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여 이 비정상적인 세계의 정상화, 이상적인 세계의 도래의 불가능함을 인식시킨다. 거기서 우리의 혁명은, 개인의 작은 혁명은 멈춘다.


저자는 묵시록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보는 법, 그것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 이 세계를 움직이는 논리, 이 세계를 살아내는 인간의 규칙과 고통을 읽어낸다.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시간이 담긴 모래시계의 모래로 이 세계를 움직이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시간의 무게를 측정하면 그저 한 줌에 불과한 이 시대를 살아내는 이들의 고통을.


책의 전반부, 묵시로의 네 기사 별로 할당된 네 개의 챕터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 중 첫 번째 장은 이 세계의 논리, 그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세계의 끝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함께 소설과 영화에서의 묵시록 장르의 그 특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챕터에서는 이 사태, 이 시대를 만든 묵시록에서의 적과 그 적을 대하는 최후의 시간에 살아남은 이들의 자세와 태도, 행동을 말한다.


세 번째 장에서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얻었으며, 그 얻은 것이 우리를 그저 이 시대에 적합한 사람으로 생존하게 하는 최소한의 조건들이었음을 설명한다. 마지막에선 묵시록 장르가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 기대하는 세계란 무엇이며 우리의 세계가 그러하다면 우리가 그 세계의 변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그 의견을 제시한다. 특히 세 번째 장은 아즈마 히로키, 사사키 아타루, 지바 마사야 등 일본 학자들의 생각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 책의 내용 전반을 몇 페이지로 요약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건져 내놓고 싶다. 바로 불가능성의 가능성. 영화와 소설은 이것을 말함으로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닫는다.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일축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봉합해 버린다. 이를 통해 이 사회와 나라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권력의 오만함과 신자유주의가 드러내는 야만성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결국 불가능성, 그 자체를 받아들인 채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을 목격했다고 말하면, 저자가 핵심 텍스트로 삼는 <지구를 지켜라>의 주인공처럼 미친놈 취급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사장”이 우주에서 온 외계인임이 밝혀진다는 걸 기억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 사장을 이기지 못한다. 그건 좌절이다. 일종의 벽이고 한계다. 그것을 넘기 위해, 저자가 인용한 다른 소설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낮은 자들끼리의 연대나 현실에 도래해 있는 메시아(혹은 그런 이로 짐작되는)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은 하지 말자.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사람의 조건이다. 우리가 이 시대, 이 세계, 이 나라에서 하나의 성원으로 존중받는 것은 존재의 가치와 무관하다.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반복해 말하듯이, 특히 푸코의 생명 정치를 인용하며 강조하듯이 웰빙이나 힐링, 휴가와 더 나아가 복지까지, 이 사회와 세계가 우리에게 적선하듯 베푸는 것들은 우리가 이 시스템을 움직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몇 해 전 후배의 유튜브 채널에서 얘기했듯이 우리는 돈의 대부분은 남을 위해, 엄밀히 말하면 타자의 시선과 평가, 더 크게는 이 사회와 시스템에 걸맞은 존재가 되기 위해 쓴다. 다이어트, 미용, 운동, 패션, 스펙과 자기 계발/개발, 결혼과 출산과 육아 등등. 우리가 자신을 위로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돈을 쓰는 건, 엄밀히 말하면 월요일에 다시 씩씩하게 출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며 동료와 상사와 이 시스템의 시선과 동일시된 타자의 시선에 적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사회와 시스템을 위해 돈을 벌고 타자를 위해 돈을 쓰고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 재생하고 부활시킨다. 이 순환은 반복된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내 앞에 놓인 이 사회와 세계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그 정상에 맞는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동안엔 우리의 세계의 끝을 상상할 뿐, 세계, 그 자체를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잠시, 그 사회와 타자와 세계로부터 눈을 돌려 나를 봐야 하고 도래 가능한 다른 세계를 “생각”해야만 한다. 더 나아가 저자도, 또 사사키 아타루도 얘기하듯이 이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과거 좋았던 시절의 무엇으로부터 위안을 받지도 말자. 로맨스나 낭만주의나 하는 것들 말이다. 사랑과 배신, 신분의 상승이 빈번히 일어나는 일일 드라마를 닮은 그런 것들로부터 말이다. 숏폼 영상이나 너무 자주 만들어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부터도.


읽기, 쓰기, 그 이유

비평의 이유는 존재하는 글에 대한 글쓰기다. 잊힌 텍스트의 재해석으로부터 혁명이 시작됐다는 사사키 아타루의 주장처럼 존재하는 텍스트, 상존하는 현상에 대한 냉철한 응시와 해석이 진짜 변화, 작은 혁명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끝을 말하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의 깊이 있는 읽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어쩌면 복도훈을 비롯한 비평가들의 일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지금 불고 있는 고전 읽기의 열풍 또한 같은 힘을 가질 수 있기 바란다. 현실을 잊기 위해, 이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버티기 위한 스펙 쌓기의 일환으로 전락되지 않기를 바란다.


고명환과 한강이 나란히 교보문고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한 사람은 성공해서 글을 썼고, 한 사람은 글을 써서 성공한 사람이다. 한 사람은 3천 권의 책을 읽어나간 후 지혜를 얻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주장하고 한 사람은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글을 읽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이 시대의 흐름을 타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한 사람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역사의 아픔에 대해 담담히 말한다.


얼마 전, 지역의 한 독서모임 공지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 모임이 선정한 책 중 하나가 <트렌드 코리아 2025>였다. 그런 책은 해석이 필요 없다. 정보에 불과하다. 나눌 생각도, 공유될 감정도 없다. 모든 독서 모임이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나를 향한, 더 나아가 진정한 나를 찾는 발판이 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나를 반복 재생하여 이 시대를 “잘” 살아내기 위해 꼭 필요하고 적합한 자기 복제 과정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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