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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3

by 최영훈

오랫동안 사랑받는 책은 다 이유가 있다. 프롬은 프로이트와 라캉과 다른, 뭔가 더 실용적인 측면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책을 읽으면 ‘자, 이제 괜찮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볼까.’, 혹은 ‘오호, 이런 이론으로 영화나 소설을 분석하면 좀 있어 보이겠는데.’하는 생각이 들지만 프롬의 책을 읽다 보면 ‘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좀 고쳐보죠.’하는 생각이 든다.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오늘 다룰 <사랑의 기술>까지, 소위 에리히 프롬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세 개의 책 속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지나왔으며, 현재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이 시대를 살아내는 우리는 무엇에 도취되어 살고 있는지, 그것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비정상이라면 이상적인 삶은 무엇인지, 그 이상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지 쉽게 얘기해 준다. 그렇다. 에리히 프롬의 가장 큰 미덕은 쉽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 믿는 것들

워낙 유명한 책이니 내용을 요약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저 간략하게, 이 책에서 다룬, 우리가 사랑이라 믿는 것들, 또는 사랑을 빙자한 이상한 관계들 몇 가지를 얘기해 보자.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도 나오지만, 가장 이상한 사랑의 행태(형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심플하게 얘기하면 전자는 상대를 학대하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 후자는 반대로 학대를 당하면서 그것을 느끼는 것이다.


짧게 얘기하면, 둘 다 소유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소유함을, 후자는 소유당함을 사랑으로 느끼는 것이다. 전자는 권력의 휘두름을 통해, 후자는 의지의 의탁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전자는 상대의 무력감을 느끼며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후자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원천봉쇄 당한 뒤(엄밀히 말하면 그것을 스스로 타자에게 떠 넘긴 뒤) 고깃덩어리로, 쾌락의 원인으로 “만” 취급받는 것을 통해 쾌락만 느끼는 기계로 전락된 것을 통해 극한의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사랑은 아니다. 섹스의 여러 형태일 수는 있지만.

프롬이 여러 책에서 주의를 주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 있다. 대중문화 속에도 이런 경향들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아주 대놓고, 자신에게 모든 걸 맡기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쾌락의 세계를 맛볼 수 있다고 말하고 계약을 하자고 하니 말이다. 이런 콘텐츠들이 꾸준히 나오는 건,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런 성향들을 대리만족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론, 어쩌다 한 번, 서로 맘에 맞는 파트너가 있다면 자신의 성향을 보여줘도 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인격적으로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 그런 누가 주인이고 노예인지 역할을 정한 뒤 피학적이고 가학적인 섹스를 한 뒤에도, 그런 폭력적인 경험을 한 뒤에도 다시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면서 일상적인 사랑과 관계로 돌아갈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런 온/오프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둘 다, 독립적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자기를 향한 경건함

책의 후반부, 내용이 독특하다. 거칠게 요약하면 자기를 향한 신앙을 말한다. 이 책이 나온 1956년에도 사람들은 이미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TV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사회 속에서 무명과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쉴 새 없이.


저자는, 다른 책에서 일관되게 얘기했던 것처럼, 자신이 욕망하는 것으로 자신을 만들지 말고 자신과의 시간을 갖는 것으로 자신을 만들라고 한다. 일종의 자기 섬김이라고 할 수 있다. 구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신의 세계, 피안의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마음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명상을 하고 체조를 하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가만히 자신의 존재를 향유하라고 한다.


그것은 일종의 과거로부터 만들어진, 과거의 영향이 잔존해 있는, 그로 인해 왜곡되고 변형된 사랑에 대한 인식, 습관, 심지어는 부풀려 있거나 위축된 자아를 회복시키는 과정이다. 거품을 걷어내고 쓴 독을 뽑아내는 과정인 것이다. 독극물을 먹은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해 위를 세척하고 해독제를 넣고 몸을 쉬게 하는, 그런 과정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은 뭔가를 하거나 얻거나 소유함을 기반으로 한 자기 변화가 아니다. 철저한 자기 성찰, 자신의 객관화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인 뒤에나 가능하다. 저자는 그리 말하고 있고 내 생각 또한 그렇다.


그것이 언제, 어떻게 가능하고 그 형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을 위한 답은 없다. 다만 답 같은 위로, 위로 같은 답을 하자면, 이 책의 덧붙여진 프롬의 마지막 조교였던 라이너 풍크가 요약하여 옮겨놓은 프롬의 삶과 사랑의 연대기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 안엔 그가 부모의 그릇 된 사랑과 관심으로 인해 왜곡됐었던 사랑에 대한 인식과 자기애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고, 얼마나 많은 사랑에 실패했었는지가 나온다.


프롬 또한 그런 단계,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도와 실수를 했고 긴 세월이 걸렸다. 우리도 그럴 수밖에 없다. 매일,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나로부터 발원한 욕망인지, 나와 타자가 독립적인 주체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그것을 용인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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