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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도시 - 장용순

라캉, 들뢰즈, 바디우와 함께하는 도시의 정신분석

by 최영훈

두 도시 이야기

책의 제목을 마주한 순간에도 그랬지만, 이후 가제본을 받아 서문과 서론을 읽으면서 더, 이 영화 두 편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다크시티>와 피터 위어 감독의 <트루먼쇼>. <트루먼쇼>에 대해선 잘 알 테니, <다크시티>의 내용만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자. 내용은 이렇다. 한 도시가 있다. 마치 낮이 없는 듯, 늘 어두운 도시는 이름도, 나라도 추정할 수 없다. 그러던 어느 밤, 우연히 한 남자가 특정 시간이 되면 도시 전체가 잠든다는 걸 알아낸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같은 시간에 잠든 것이다.


그렇게 도시가 잠이 들면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도시의 외형을 바꾼다. 큰 건물은 작게, 초라한 집은 대저택으로. 심지어 그 공간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도 집의 크기와 용도와 사회적 지위에 맞게 바꿔놓는다. 그 미지의 존재는 외계인으로,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위해 우주에 가상의 도시를 지어 놓고 지구에서 인간을 납치해 거대한 실험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 한 남자가 각성을 하게 되고 투쟁이 이어진다.


두 영화는 같은 주제를 음과 양, 흑과 백, 부정과 긍정, 서로 다른 극단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같은 주제란, 바로 욕망이다. 부연하면 두 영화는 욕망이 우리의 도시를 어떻게 만들고 구성하고 더 나아가 주체의 삶과 정신까지 재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 혹은 그 질문에 담긴 고민, 그것들의 시각적 표현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주제에 다른 주제 하나를 더하자면 그런 욕망으로 구성된 사회와 시스템과 도시로부터 주어지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 사회와 시스템과 도시의 삶에 잘 적응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유사 자유, 자유를 닮은 환상이 아닌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자유를 향해 기꺼이 우리의 삶을 던질 수 있는가이다.


자본주의와 도시

저자가 얘기하듯, 국가와 도시는 흘러넘치거나 흘러나가야 될 자원과 자본, 근본적으로 생산물과 소유물이 누군가로 인해, 특정 세력으로 인해 막혀 발생하는 축적을 토대로 탄생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탄생한 국가와 도시들은 도로와 운하, 물류와 네트워크라는 인위적 흐름을 조성해 자체적인 부의 순환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다시 역설적이게도, 중앙에서 경제와 부의 순환을 통제하려 했던 아시아의 제국인 중국과 축적의 기술이 없었던 유목 제국이었던 몽골은 전 지구적 부의 네트워크의 중심은 고사하고 그 안에도 끼지 못한 채 근대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유럽의 각 국가들이 항해술과 모험가들을 앞세워 그 네트워크의 길이와 크기를 아시아와 아프리카, 멀게는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이어 넓혀갔다. 종국엔, 현대의 인류는 자본주의라는 시대를, 최종적이자 현재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부연하자면,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시스템의 역사는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면, 짧다. 고병권이 <다시 자본을 읽자>의 부록에서 밝혀 쓰고 있듯, 자본주의라는 단어 자체는 19세기 들어서야 범용화 됐다. 그 이전에, 윌리엄 번스타인이 <부의 역사>에서 기술하듯 네덜란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금융과 증권의 싹이 돋아났고 말이다. 그 자본주의의 현재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이 신자유주의다. 저자가 밝히듯, 하이에크를 필두로 한 시장주의자들의 이론은 1980년대의 경제 정책을 주도했고 그 이후 90년대의 글로벌 경제화와 IMF 사태를 비롯한 각종 부작용 속에서도 금융시장과 자본 시장을 살찌웠다. 그와 함께 중국을 비롯한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이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그 글로벌한 굴복 뒤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고 봐야 한다.


도시의 삶, 괴물과의 동거

우리의 이 시대를 돌아보자. 자본의 축적과 그 회전을 통해 그 살을 불려 가는 데만 열중하는 이 시대를. 우리는 자본주의,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라는 괴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인류 역사에서 부의 축적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무리 멀리 잡아도 개신교의 등장 즈음부터라는 걸 말이다. 애초에,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말했듯, 생산물의 축적은 부끄러운 짓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더 많이 나누고 소비할수록 더 능력자였고 권위자였으며 높은 사람이었다. 부족장들은 포틀라치로 통칭되는 인위적이며 과시적 낭비 행위를 했을 정도였다.


이걸 염두에 두면, 이 시대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시스템이 “정상”이라 확언할 수 없다. 다시,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괴물”과 사는 방법을 습득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니 그 괴물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겨울의 감기처럼. 도시는 이 습득의 공간이자 그 괴물과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불안을 잠재우는 환상을 제공하는 공간이자, 더 나아가 그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속박 따위는 없는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사건을, 해프닝을, 그런 것들이 가능한 공간 - 클럽, 쇼핑몰, 아케이드, 놀이공원과 같은 - 을 제공하는 곳이다.


이 도시에서 우리는 그렇게 낮을 버티고 밤을 견디고 주말을 통해 위안을 받은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뒤, 여름휴가를 기다리고 기념일 챙기며 잠시 일탈과 자유를 맛본 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더 잘 일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잘 자고 영양제까지 챙겨 먹으면서. 푸코의 생명정치의 사적인 내재화, 자기 관리의 당연함, 한병철이 <아름다움의 구원>에서 말한 매끄러운 표면을 향한 소비자의 열망은 괴물과 사는 우리의 삶과 심리를 적확하게 말하고 있다.


도시 밖을 꿈꿀 자유

라캉은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상징계의 법 밖에서 그 법을 응시하는 사람은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의 당연함을 거부하는 사람은, 앞서 말한 영화 <다크시티>에서의 잠들지 않는 주인공과 같다. 전능한 존재의 초능력적인 최면과 염력을 통한 도시의 변화에 속지 않는 주인공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자.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이 도시를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없는 해변을 만들고 모두가 깨어 있는 삶을 시도한다. 도시를 벗어나지 않는 도시 내에서의 더 나은 삶을 모색한다. 이것이 어쩌면 이 영화가 가진 한계일지도 모른다. 반면, 트루먼은 방황 끝에 도시 밖으로 나간다. 아무런 보장도 없는 그 불확실성의 세계를 향해.


이 책과 함께, 우리, 트루먼의 자세로 우리를 둘러싼 공간, 이 도시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해 보자. 바벨탑이 신의 권위와 전능함에 도전하려 했던 인간의 교만의 상징인 것처럼, 유럽의 고딕 성당과 높은 탑들이 축적되고 넘쳐나는 잉여자본의 인위적 폭발의 증거라는 책 속의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 도시를 다시 보자. 주변에 널린 고층 아파트와 빌딩과 그 목적과 용도가 불분명한 거대한 구조물들의 용도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만약, 이 높은 건물을 쪼개어, 낮은 건물로 만들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혹은 그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무엇을 전환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그야말로 자본이 흘러 저기 저 낮은 하류에 있는 작고 연약한 존재 모두에게 다다른다는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자.

또, 앞서 말했듯 직사각형의 아파트 건물, 비슷한 평형대 내부, 동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는 인테리어를 따라가는 주거 공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자. 이 공간들이 우리의 획일화된 욕망을 드러내는 상징들은 아닌지, 아니면 우리의 개별적인 욕망들이 어떤 권위와 법, 상징계의 규율에 의해 획일화된 것은 아닌지, 이로 인해 비슷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안도하며 잠자리에 드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보자. 그 의심 끝에 우리는 지금 이 국토 곳곳에서 벌어지는 개발, 재개발의 의미에 대해서도 따져 물어보자.


마지막 질문들

내가 사는 지역은 재개발이 한창이다. 이미 완료된 대연동의 몇 지구엔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섰다. 동네 전체를 겨울 밭을 갈 듯 싹 쓸어버린 전포동과 문현동에도 그런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다른 건 없다. 아파트는 사각형의 높은 건물이다. 색을 다르게 칠한다고 해서, 이름을 길게 붙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1층과 지하에 헬스클럽을 만들고 수영장을 만들고 도서관을 만들어도, 지상에 차가 다니지 못하는 공원을 조성해도, 아파트는 아파트다. 박정희 시대, 강남 개발 이후부터 우리가 지겹게 봐 온 것들이다. 개발(開發)이라고 하지만 거기엔 그 말과 다르게, 새롭게 열리는 세상도 없고, 새롭게 피어나는 가치도 없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가치의 실현, 그 모든 것의 가능함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면, 깊게 파인, 기차의 레일을 닮은 구조적 흠으로부터의 지속적인 탈주와 혁명으로부터 도래한다.


결국, 하나의 질문이 마지막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트루먼의 탈주를 닮은 멈추지 않는 탈주, 혹은 그 시도는 가능한가? 새로운 세상과 가치를 불러올 혁명은 가능한가. 저자 또한 들뢰즈의 목소리를 빌렸다는 걸 잊지 말자. 그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의 사상가임을 잊지 말자. 라이프니츠의 주름과 베르그송의 생명과 생명체 안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안에서 진정한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였음을 잊지 말자. 자본주의라는 괴물과 싸우는 전쟁기계로서의 주체의 가능성을 모색했던 학자였음을 잊지 말자.


이 책과 이 시리즈의 끝이 어떤 결과로 향할지, 다 읽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도시 안에서, 이 괴물 같은 신자유주의라는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뭔가를 계속 시도하며 미시적이면서 미세한 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나아가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다른 질문 하나를 마주한다. 혁명의 결과는 언제 도래할까?


다시, 잊지 말자.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는 길게 잡아도 오백 년, 짧게 잡으면 삼백 년 정도 된 경제 시스템이라는 걸.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 시스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적응된 이 시대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밤마다 취하곤 야경이라고 부르는 도시의 불빛은 원래 없어야 정상이라는 것을.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일상이 멈추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새벽 배송이 가능하고 24시간 편의점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류 전체의 역사를 놓고 보면 이 시대의 많은 현상들이 돌연변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더 나아가 건축물과 도시의 양태는 그저 이 시대의 반영물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가 이 시대의 것이 아닌 과거의 것을 보기 위해 그렇게 유럽행 비행기 표를 끊는 것임을.


더 나은 세상이 시대에 앞서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면,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면, 그 세상을 꿈꾸는 이 시대의 몇몇이 조금씩 꼼지락거려야 하지 않겠나? 원자력 폐기물은 우리의 수명보다 길어 몇 만 년이 지나도 그 방사능이 없어지지 않는데, 몇 백 미터 지하에 가득 담아 넣은 뒤 그 위험성을 우리 시대의 기호로 표시한들 그것을 수천 년 후 발견할 우리의 후손들이 알 수 있겠냐고 따져 물었던,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일갈 속에서 답을 찾아보자.


우리의 혁명의 성과 또한 지금 여기, 우리가 아니라 먼 후손에게 당도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도래를 우리가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하더라도, 그 다른 세상이 우리가 꿈꿨던 세상이라는 것도, 또 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순간 많은 이들이 그 나름의 작은 혁명들을 반복해 왔다는 걸 후손들이 모른다 하더라도, 그 후손들이 오늘 우리의 혁명의 결과를 누린다면, 오늘, 여기서 혁명을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우리에겐 혁명에 대한, 탈주에 대한 체념이 허락되지 않는다.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 이후의 인류의 삶이 더 나아지기 위해, 지금 이 순간, 역사라는 거대한 곡선의 한 점, 그 미적분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그 곡선의 방향을 “희망”이라는 곳을 향해 뻗어나가도록 할 수 있는 걸 해야만 한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든 마지막 생각이다.


이 서평은 이학사의 가제본 서평단 모집에 선발되어 <과잉 도시>의 가제본에 담긴 절반 가량의 분량만 읽은 뒤 쓴 것임을 밝힙니다. 책 전체를 읽은 독자와, 더 나아가 시리즈 전권 - 과잉 도시, 환상 도시, 사건 도시 -을 읽은 독자와 그 소감과 인상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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