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전 없는 철학
인문학적 관심사의 두 개의 큰 축 중 하나는 실존주의다.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실존주의를 이해하겠지만 난 개인적으로 실존주의를 처방전 없는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또, 사실 모든 철학은 처방전이 될 수도 없고, 오히려 문제집, 그것도 답안지 없는 문제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중 실존주의가 가장 냉혹하면서도 냉정한, 삶과 존재 자체를 묻는 차가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답은 우리에게 떠넘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서점에는 위로와 인생의 해답을 제시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철학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쇼펜하우어와 니체, 칸트, 스피노자,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현대인의 사이비 의사로 부름 받는다. 진즉에 다들 죽었기 망정이지 아직까지 살아있었다면 많은 출판사들이 이들의 고소에 시달렸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내 책꽂이엔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꽂혀 있었지만 읽은 적은 없다. 그렇게 한참 잊고 살다가 관심 있는 이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여정 중에 그를 다시 만났다. 이 덴마크 철학자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많은 문제의 답을 성경 밖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답을 글로 옮겨 여러 필명으로 세상에 내놨다. 이 수많은 저작을 공부해 온 저자는 그 속에서 몇 개의 주제를 추려 생각의 타래를 엮어 보인다. 물론 절대로 답은 제시해 주지 않으면서.
현재 진행형인 삶
저자 고든 마리노는 “고함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이후 미식축구 선수로 고교와 대학 시절 이름깨나 날렸지만, 거기까지였다. 뭘 해야 할지 몰라 방황했고 약물 중독과 우울증과 불안 증세로 심리 치료실과 요양원을 들락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다가, 좀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들어간 한 카페에서 이 키르케고르의 책을 발견하여 몇 장 읽다가 반하여, 그 책을 그대로 품에 안고 나왔다. 그렇다. 훔친 것이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은 철학이라는 학문을 향한 궤도에 올라섰고 그는 실존주의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가 서문에 밝혔듯, 실존주의는 학문적 철학에 반하는 철학이다. 개념이나 사상, 사회와 현상의 의미를 밝히고 그에 걸맞은 화두를 던지는 철학이 아닌 삶의 문제, 아니 어쩌면 인간과 인생 그 자체, 그 본질에 직접적으로 가닿으려는 철학이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고통스럽다. 고통은 고통 그 자체, 즉 인생과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것과 그것에 답 없음, 그 두 가지로부터 기인한다.
그렇다. “문제 A의 답은 B다. 그 B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C를 해야만 한다.”라고 친절하게 답해주는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생 자체가 그런 거 아니겠나. 누가 주제넘게 한 인간이 살면서 처하는 문제에 대한 정답을 확언해 줄 수 있겠나.
그가 다루는 문제는, 안 그래도 답 없는 인생에서 더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불안, 우울과 절망, 죽음, 진정성, 신앙, 도덕성, 사랑 같은. 저자는 이것들의 다양한 양태와 키르케고르의 설명, 그리고 자신이 살면서 겪은 사례까지 소개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도 이 모든 문제와 투쟁 중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얘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붙잡을 만한 힌트 하나는 말해준다. 바로 진정 나답게 살라는 것. 나다운 것이,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모든 일에서, 모든 인생의 문제 앞에서 가식적이지 않고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기 연민과 동정에 빠지지 않고 타자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속이지 않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라고 말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삶의 매 순간 의미 있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한 번뿐인 인생,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온전히 깨어 만끽하며 누리며 살아가라고 말한다. 내 삶을 온전히 내가, 가장 나다운 내가 누리지 않으면 누가 누리겠나. 누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겠나.
요즘, 일련의 일들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고 있다. 이 책에서, 엄청난 이론이나 철학적 개념을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 범퍼카처럼 치열하게 살아온 한 철학자의 스스럼없는 고백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 실존주의를 몸소 실천하며 살아왔고 살아가는 한 사람의 고백을,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명의 동료로서의 고백을.
부산남구도서관이 1년여의 리모델링에 들어갔다. 때문에 이 책은 옆 동네에 최근에 새로 생긴 우암도서관에서 빌렸다. 책이 너무 새것이어서 읽기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다음에 읽을 이를 위해 조심조심... 새 도서관에는 이런 단점이 있다. 물론 나만 그런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