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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장 폴 사르트르

동해선에서 읽은 책 115

by 최영훈

“야, 저번 주에 너랑 도서관 갔을 때 아빠가 빌린 책 제목이 뭔지 알아? 구토야.”, 화요일, 입원 항암치료 이틀째 날, 오후 다섯 시쯤, 낮에 잠시 쉬다가 아내와 교대하기 위해 딸의 병실에 들어가서 딸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이런저런 농담을 하다가 이 책을 꺼내며 말해줬다. 딸은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딸의 병실을 지키며 이 책을 읽었다. 열 시 반쯤, 딸을 재우기 위해 병실의 모든 불을 꺼준 후 복도에 나와서 읽었다. 저녁 여덟 시쯤, 딸이 친구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공부를 하고 수다를 떨 때에는 병원 1층 로비로 내려와 구석진 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읽었다. 처음 50페이지까지는 그저 장광설 같이 느껴졌는데, 그 후, 로캉탱의 생각에 갈피를 잡고 읽어나갔다.



“우리가 살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배경이 계속 바뀌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뿐이다. 여기에 시작은 결코 없다.”, P.100(문예출판사 에디터스 컬렉션 판본)


순간

시작이나 끝 같은, 극적인 순간은 인위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인생이 드라마라면 기승전결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다. 심지어 어느 순간의 무엇이 기이고, 결인지 알 수 없다. “그때가 내 인생의 클라이맥스였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삶을 살거나 죽은 사람뿐이다. 그런 삶, 그러니까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하는 사람들조차 사건을 막을 수 없다. 인생의 전환은 불가피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사실, 사건 발생과 그 순간의 예측 불가함에 대한 사람의 자세는 불가항력적이고 불가역적이다.


물론 입학을 하면 졸업이 있고, 결혼이 있으면 이혼이나 사별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발생의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그 작은 시작, 그 작은 끝. 물론 결혼이나 이혼, 사별은 큰 기쁨이며 슬픔이다. 그 느낌이 무한히 이어질 것만 같은. 그러나 우리는 기쁨도, 슬픔도 일상으로 순화시켜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정돈하는 것인지도.


“이것이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다.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명확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보였고, 나는 역겨움을 느꼈는데, 그때 바다를 보고 있었는지, 돌멩이를 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돌멩이는 넓적했고, 한쪽면 전체는 말라 있었고, 다른 쪽은 축축하고 진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크게 벌려 그것을 잡고 있었다.”, P.15


순간 2

던지기 위해 돌을 들었을 뿐이다. 그 순간,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뭔가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는데, 그 순간 뭘 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그 순간, 역겨움이 일어났다. 그 후,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역겨움이 불쑥 찾아온다. 로캉탱은 그 이후의 변화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돌멩이를 만지기 전, 그 순간이 오기 전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의 프랑스, 유한계급으로 제법 넉넉한 유산을 받아 노동다운 노동도 안 하면서 그가 말했듯, 그는 여러 곳을 여행했다. 다양한 경험을 했다. 연애도 했고 유산도 물려받았으며 “모험”이라 부를만한 일도 겪었다. 그러나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명함-그런 게 있다면-은 역사학자이니 관련된 공부도 했고 글도 제법 썼을 것이다. 그 핑계로 이 나라 저 나라도 기웃거렸겠지. 그런 그가 부빌에 온 건 롤르봉이라는 사람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의 후손이 이 지역의 도서관에 롤르봉의 자료를 다 기증해서, 조사와 연구를 위해선 부득이하게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호텔에 머물면서, 카페와 식당과 술집을 드나들면서, 유유자적하게 산책도 하면서, 한 카페 여사장하고는 가끔 섹스도 해가면서, 그렇게 역사 연구랍시고 호텔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돌멩이를 만진 후 달라졌다.


“그들은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용히, 별 열의 없이 저마다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P311


"핵심은 우연성이다. 그러니까 내 말은, 정의(定義)상 존재는 필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나타나고,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지만, 결코 연역될 수 없다. 난 이점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은 스스로의 원인이 되는 필연적 존재를 꾸며냄으로써 이 우연성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어떤 필연적 존재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우연성은 가장(假裝)이나 흩트려버릴 수 있는 외관이 아니라 절대이며, 따라서 완전한 무상(無償)이다. 모든 것이 무상적이다. 이 공원도, 이 도시도, 그리고 나 자신도. 간혹 이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데, 그러면 속이 뒤집어지고, 저번 저녁에 랑데부 데 슈미노에서 그랬듯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이게 바로 구토다.”, P.306


존재의 우연성, 혹은 부조리

앞서 말했듯, 로캉탱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롤르봉 후작을 연구하여 책을 쓰기 위해 부빌에 스며들어 살고 있다. 로캉탱은 후작이 남긴 자료, 그에 대해 쓴 여러 책들과 보고서들을 읽어 교차검증하며 그의 삶과 업적을 재구성하려 노력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인 거짓인지, 그의 말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인 거짓인지, 문서와 기록, 책의 행간들 속에서 진짜 그를 찾아 한 인간의 퍼즐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한다. 과거의 자신과 결별한 사람이 더 먼 과거의 한 사람을 재구성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나. 한 사람과 그 삶은, 그를 경험한, 그 곳곳의 각자의 경험으로 인식되어 재구성되고 해석될 텐데, 그 개별적 해석과 종합을 아우를만한, 초월적이며 통합적이며 완결적인 재구성이 가능하기나 할까.

당연하게도, 한 존재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모세나 바울처럼 불려 온 이유, 살아갈 사명을 초월적 존재로부터 부여받고,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나의 행동과 직업과 삶의 형태를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초월적 동기나 원인에 관해 알고, 그것을 나라는 존재의 타당함으로, 불가결함으로 삼아 나 자신에게, 또 타자에게 온전히 설명하고 납득시킬 수 있다면 삶은 얼마나 편할까. 존재의 완벽한 이유, 완벽한 이유가 내재되어 있는 존재의 안온함.


그 설명, 그 납득을 위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에 의지하고 있는지 저자는 로캉탱의 시선을 빌려 냉소적으로 설명한다. 주일(일요일)을 보내는 부빌 사람들의 일상과 옷차림과 예의의 묘사 속에서, 독학자의 맹목적인 사회주의적 휴머니스트 지향과 알파벳 순서대로 도서관의 책을 읽어나가는 그의 “독학”의 여정을 통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설명하기 위해 상황에 맞는 옷을 입고 때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고 나이와 지위에 걸맞은 차림과 언사를 한다. 그것은 마치 독학자처럼 알파벳 순서대로 책을 읽어나가는 것, 그래서 궁극적으로 Z까지 읽어내리라는 야망, 더 나아가 그 야망의 완성을 통해 내가 원하는 나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닮아 있다. 설명 가능한 지금, 완성 가능한 인생, 더 이상의 의문이 존재하지 않는 어느 종점...


그런 건 없다. 저자가 말한 무상(無償)이 연역의 불가능함을 의미하기에, 우리의 존재는 결국 무상(無常)이어서 무상(無相) 일 수밖에 없다. 가능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나일뿐이다. 우리의 존재의 우연성과 부조리함은 여기에 기인한다.


완벽한 순간 같은 건 없다.

안니가 추구했던 완벽하고 특별한 순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런 순간 따위는 없다. 라캉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 완벽함은 이뤄졌다고 느끼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어디론가 미끄러져 없어진다. A의 향과 B의 촉감과 C라는 영화와 적당히 내리는 비와 부드러운 그이의 손과 적당한 온도의 커피와 나와 그이 사이에 놓인 완벽한 탁자, 이 완벽한 순간을 위해 때마침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까지. 이 완벽한 순간은 욕망의 찰나적 현시, 현현에 불과하다.


나는 없고 욕망의 섬광이 번쩍일 뿐이다. 당연히 설명할 수 없다. 재현될 수도 없다. 끝없는 추구만 있을 뿐이다. 그 섬광을 연이어 터트려 줄 누군가를 만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열차를 타고 여행할 뿐이다. 안니가 마지막에 올라탄 열차는 주체를 의탁시킨, 욕망의 영원한 반복을 약속하는, 그러나 내릴 수는 없는, 결별도 뛰어내림도 허락하지 않는 이 세계를 의미한다. 마치 <설국열차>와 같은. 살기 위해선 투쟁도 그 안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거기, 그 안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납득시키기 위해, 내게 주어진 이 하루의 의미를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확언받기 위해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다. 부빌의 일요일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처럼, 특별한 순간을 만드는 완벽한 조건을 욕망하는 안니처럼, 알파벳 순서대로 책을 읽어나가고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특정 이념을 추종하는 독학자처럼 우리 또한 모임에 나가고 종교를 갖고 브런치 카페에 가고 여행을 하고 맛집을 가고 과시적이면서 가시적이면서 가식적인 연애를 하고... 인스타그램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에 “구토”를 느낀다. 그렇게 되면 구토를 참으며 그걸 계속하거나 아니면 구토를 멈추기 위해 그 모든 걸 멈춰야 한다. 아무것 없이, 그저 존재함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만 한다. 하드보일드하고 누아르적이다. 그 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사르트르는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방황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게 다다.


사족

유시민 작가가 어느 영상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젊었을 때도 이 책을 읽었지만 서른이 넘어서, 삼사십 대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조금 알 것 같았다고 했다. 공감한다. 많은 책들을 읽으며 나도 같은 마음이다. 이십 대 때 읽었으면 뭔 소리인지 몰랐을 것 같거나 공감하지 못했을 것 같은 책들이 많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오십이 넘어 읽어서였을 것이다. 그나마 50 페이지 넘어가면서부터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엔 띠지도 안 붙이고 당연하게도, 밑줄도 안 긋는다.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 놓는다. 새로 문을 연 우암 도서관의 책은 새것이라 더 조심스럽게 읽었다. 그 탓에 책의 표지를 찍는 걸 깜빡했다. 사진은 검색을 한 뒤, 블로거 이연님의 사진을 빌려 왔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린다. 서평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에 관해서도 이런저런 글이 많다. 많이들 찾아가 읽어주셨으면 한다.

https://blog.naver.com/syany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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