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위로 4 - 4월 이야기(1998)
딸이 다섯 살쯤 됐을까, 도쿄 디즈니랜드에 간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여행 계획이며 숙소 예약은 다 아내의 몫이다 보니 여행지에 가서야 숙소의 이름과 위치를 알게 되는데, 출발하기 전 아내에게 언뜻 전해 듣기로는 큰 건담 모형이 있는 곳이라 했다. 공항에 도착하여 구체적으로 그 위치를 물어보니 오다이바라는 곳이었다.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그 동네에 들어가 호텔에 접근하는 데 익숙한 대학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무사시노 대학. ‘아, 그 영화에 나온 대학이 여기에 있었던가, 도쿄 시내가 아니고.’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칼럼을 쓰는 김에 검색을 해보니 그곳은 무사시노 대학의 아리아케 캠퍼스라는 곳이었다. 2012년 4월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딸과 동갑내기인 캠퍼스다. 필자에게 무사시노 대학의 이름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건 이 영화 때문이다.
<4월 이야기>는 <러브레터>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다. 그의 영화답게 영상미는 뛰어나고 줄거리 또한 자극적이지 않다. 홋카이도에 사는 여고생 우즈키는 도쿄에 있는 명문대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한다. 진학 담당 선생님조차 놀랄 정도로 그녀의 성적이 급격히 올랐기에 가능했던 일. 그녀는 도쿄 인근, 학교 근처에서의 자취를 시작하고, 이후 신입생이 으레 겪는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경험한다.
그렇게 바쁜 신입생의 봄날을 보내던 와중에도 그녀는 한 서점을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데, 그 서점엔 고교 시절 흠모하던 선배가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즈키가 열심히 공부하여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한 것도 이 대학에 진학한 선배를 따라가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선배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소식을 접한 후 그 얼굴을 보러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선배는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는 이에 실망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빈번히 서점을 찾는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는 우즈키를 기억해 내고 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아름다운 영상과 풋풋한 신입생의 봄날이 담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러브레터>의 복잡다단한 서사 구조를 기대했던 관객 입장에선 정작 본격적인 사랑 이야기는 진행되지도 않고 끝내 버린 영화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랑 이야기가 시작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영화의 러닝타임도 한 시간을 겨우 넘겼다는 것도 문제였다. 당시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보던 B급 액션 영화나 심지어 에로 영화조차도 최소한 90분 정도의 분량은 되어야 한다는, 그래야 영화라 불러줄 수 있다는 암묵적 룰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그 룰조차 가볍게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당연히 이야기의 본론은 맛도 못 봤다는 아쉬움에 짧은 시간의 러닝 타임으로 인해, 관객들은 같은 돈을 주고 뭔가 부실한 제품을 산 기분이 들었다. 이 칼럼을 쓰면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봤다. 감독은 왜 거기서 이야기를 끝낸 걸까? 이 질문의 답이 이 칼럼의 핵심 주제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에 학교가 많다 보니 학사 일정에 따른 캠퍼스의 술렁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필자가 다니는 수영장도 대학교 안에 있다 보니 입학과 졸업식의 풍경, 개강과 종강 시즌에 따라 달라지는 캠퍼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대학의 졸업식은 밸런타인데이인 2월 14일, 금요일에 있었다. 졸업식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자동차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대학의 입구에서 수영장이 있는 캠퍼스 중턱의 건물까지 오르는 길 양쪽으로 꽃을 파는 노점들이 줄지어 있었고 졸업식장을 향해 가던 가운을 입은 학생들은 캠퍼스 곳곳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불과 몇 주 후면 졸업식과는 사뭇 다른 풍경의 입학식이 있을 것이다. 더 어리고, 가운을 입지 않은, 어떻게 옷을 입어야 될지 몰라 좋은 옷을 입고 온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어색한 꼴을 보이고 있는,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있는 신입생들이 캠퍼스 여기저기를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졸업식의 풍경을 보고 입학식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감독의 의도에 대한 내 생각에 확신을 갖게 됐다. 감독은 뭔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우리가 갖고 있는 감정을 영상과 이야기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졸업식도, 입학식도 열린 결말을 향한 시작이다. 사랑의 서사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는 시점 또한 사랑이 시작된 이후가 아니라 사랑이 막 시작될 때이다. 또는 내 맘을 흔드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로 인해 내 일상과 삶의 목적까지 흔들리는 순간이다. 그/그녀를 만나고 발견하기의 전과 후의 내가 달라지는 시기가 사랑의 흥분이 가장 많이 담겨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바로 그 흥분, 그 기분, 그 무한한 가능성이 막 도래하는 순간을 담아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여주인공의 고향을 홋카이도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사랑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안 그래도 짧은 영화 내내 도쿄의 봄날 풍경과 함께, 자취방에서의 짐 정리, 캠퍼스 전경, 신입생의 자기소개, 동아리 활동, 학교 식당과 강의실의 풍경을 섬세하게 담아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서점에서 선배가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여 주인공이 실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도 수 차례 찾아간 뒤에야 결국 알아보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나서야 고교시절의 추억을 나누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순간들이 사랑을 향한, 사랑하는 이를 향한 설렘을 갖고 있는 마음의 여정이 막 시작되는, 봄날같은 찰나의 연쇄이기에, 감독은 4월의 풍경을 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설렘의 시각화다. 감독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의 “설렘” 그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줬다. 추운 홋카이도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이 번화하고 엄청난 다양성과 화려한 풍경을 가진 도쿄의 대학교에 진학하여 도쿄와 봄, 그리고 대학 생활을 시작한 순간들의 중첩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설렘이라는 감정을, 그 감정을 가진 이의 시선만이 포착할 수 있는 이미지들을 통해 보여줬던 것이다. 같은 봄날의 풍경이라도 설렘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어떻게 달라보이는지 보여줬던 것이고, 그리하여 그 설렘을 봄날의 풍경을 통해 시각화했던 것이다.
설렘이라는 감정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희귀하다. 그 감정은 새로운 것, 낯선 것, 바라던 것이 막 도래하는 그 순간에 잠시 왔다가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감정은 어느 순간 이후, 인생의 어느 시점 이후에는 접하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
대학 생활 내내 설렘이 가장 강렬하게, 어쩌면 유일하게 찾아오는 순간은 입학 후 한 달가량일 테고, 사회생활 내내 설렘이 찾아오는 순간은 대학 졸업 후 신입사원으로 입사하여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기뿐일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여서 연모의 감정을 막 품기 시작할 때, 그 감정이 성공적으로 전달되어 타자의 감정 또한 내게 와서 막 사랑이 시작될 때일 것이다.
아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감정과 사건에 익숙해지기 전의 감정이다. 그 모든 것이 일상화되기 전의 감정이다. 새 책을 막 사들고 와 표지를 막 펼쳤을 때 드는 감정, 새 차를 사서 비닐도 뜯지 않은 좌석에 막 앉으려 할 때의 그 감정이다.
그 감정은 사라지는 감정이다. 그런 감정이다 보니 설렘, 그 감정 자체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다. 그 감정을 겪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그래서, 그 감정은 다시 불러오기 힘든 감정이다. 회상이 불가능한 감정일지도 모른다. 새것, 새날, 새 출발, 시작이 드물어지는 나이가 될수록 겪기 힘든 감정이다. 하여, 이 영화는 설렘이 어떤 감정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예시로 보여주는 영화다. 또, 설렘이라는 감정을 잊은 채 살아가는 이가 주기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다.
봄은 시작의 계절이다. 많은 소년, 소녀, 청춘 남녀들이 출발선에 서는 계절이다. 딸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을 앞에 두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겨울도, 그렇다고 봄도 아닌 2월은 설렘이라는 감정이 막 움트기 시작하는 달일 것이다. 때로는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도 스치는 시간일 것이다. 그러다 설렘 가득한 3월을 맞이하겠지.
그 이후의 달과 계절 속에서, 다가오는 일상과 감정들이 이른 봄날에 가졌던 설렘과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날 설레게 했던 그 봄날을 돌이켜 봤으면 좋겠다. 설렐 일 없는, 새삼 시작이라 할 만한 사건이 없어서 그 감정을 겪을 일 없는 이라면, 이 영화를 보거나 졸업식과 입학식을 찾아 시작의 마음, 출발의 각오, 봄날의 희망을 재충전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