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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 변광배

동해선에서 읽은 책 124

by 최영훈

어떤 사람의 선택

서재에 들어찬 책을 살펴보자. 읽은 책과 읽을 책이 섞여 있다. 구분에 힘쓴 적도 있으나 어느 시점 이후론 그냥 작가별, 주제별로, 때로는 무분별하게 섞여 있는 걸 방치하고 있다. 편협하다. 우치다 다쓰루 선생이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에 말한 것처럼 내가 읽은 책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이기는커녕 더 확장시켰다. 책은 문이어서 열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미로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미로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 또한 행복이리라.


다시 돌아본다. 편협하다. 이 편협한 목록에 사르트르가 한편을 차지하고 있다. 읽은 책도 몇 권 있고, 읽을 책도 몇 권 있다. 내 서평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구토>와, <닫힌 방 / 악마와 선한 신>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음을 알고 있으리라. 2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해서 결별을 하긴 했지만, 카뮈 또한 그 생각의 전개에선 결을 같이했었다고 보면, 난 의외로 아주 오래전부터 실존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통해 사르트르의 삶에 대해 처음으로 조금 알게 됐다. 몇 번이나 반복해 말했지만 작가를 좋아해도 그 삶엔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라 나중에서야 작가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지어 남자려니 하고 몇 작품 읽어나가다가 우연히 검색해 보고 여자인 줄 알거나(권택영 교수) 여자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서야 사진을 보고 남자인 줄 아는 경우(김정선 작가)도 있다.


사르트르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었다. 천재였고 카뮈와 옥신각신했으며 보부아르와 오래 관계를 유지했었다는 것 정도. 그의 정신세계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말>에도 별반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 도서관에서 <말>을 빌려 왔다. 그만큼 그의 삶, 특히 유년기는 그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질과 실존, 연기(演技)와 사물

근본적인 질문은 이거다. 여기 왜 왔지. 왜 태어난 걸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손쉬운 답은 신이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모든 것이 신의 계획이다. 인생 전체가, 삶도 죽음도, 행복과 불행도, 성공과 실패도, 다 그의 뜻, 인간은 뒤로 물러나 뒷짐만 지고 있으면 된다. 인샬라...


자, 이제 신을 밀어내보자. 그 자리를 메워야 한다. 우연성과 무상성을 극복해야 한다. 난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내 삶의 의미는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순간, 우리는 신과 같아진다. 그의 유명한 말이 이쯤 해서 등장한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

본질이라는 빈자리, 그 신의 자리를 메우기 위해 우리는 삶을 밀고 나간다. 실천하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 던진다. 주체라는 본질을 향해, 그 정립을 향해, 더 나아가 그것의 유지와 사수(死守)를 위해.


물론 편리한 방법도 있다. 사르트르가 어린 시절, 외가댁에서 눈칫밥을 먹던 시절의 방법이다. 연기. 나 자신을 찾는 대신 남들이 원하는 내 모습을 연기하며 살면 된다. 내가 누구인지 타자와 사회에 물어 돌아오는 대답에 맞춰 살면 된다.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 자신이 외할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했던 그런 류의 행동, 연기를 가정 희곡, 코미디라고 불렀다. 착한 아이, 똑똑한 아이, 바른 아이, 심지어 신앙심 깊은 아이까지. 사르트르는 그런 연기를 열두 살까지 했다.


다른 방법은 사물이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즉자적 존재가 되는 것. <구토>에는 로캉탱이 도시의 부르주아들의 주일 모습을 아주 신랄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인사법, 옷차림, 남편과 아내의 위치, 식사 예절 등등. 더 이상 나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이렇게만 하면 난 이런 사람이 된다. 부르주아가 아닌 사람이 건너편에 있으니 더 편하다. 심플하다.

사물에서 사물 없음으로

사르트르의 이론은 마케팅이나 광고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유효하게 다가온다. 광고의 본질은 사람의 본질을 지우는 것이다. 그 본질이 지워진 자리에 사물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당신은 누구도, 아무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시대의 불안은 그렇게 촉발된다. 당연하게도 사물은 그 빈자리에 딱 들어맞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다. 사물은 그 빈자리에서 미끄러지고 헐거워지고 이격(離隔)되어 내면의 불안은 누수시킨다. 응급상황이다. 다른 사물을 찾는다.


한병철은 <사물의 소멸>에서 이 사물조차 사라진 시대에 대해 말했다. 내 주위를 둘러싼 무엇들 속에서 주체는 잠시 자신을 점검한다. 그것들은 사유의 안락의자, 도약대가 된다. 앞서 내가 내 책들을 둘러보며 나를 점검한 뒤 새로운 세상을 향한 문을 열었던 듯이. 그렇다. 책이 없으면 다른 책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없듯이 사물과의 잠시 멈춤이 없으면 주체와 일상에 대한 사유의 시간과 공간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반성의 자리, 그 토대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시대는 그 멈춤, 그 자리, 그 토대를 허락하지 않는다. 웹툰을 보듯이, 인스타그램을 보듯이,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 마디 없이 넘어가고 한 사람의 콘텐츠는 다음 사람의 콘텐츠로 구분 없이 흐른다. 독해(讀解)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 그래서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들. 이해는 개념과 사물을 잠시 내 쪽으로 끌어와 내 이성으로 소화시키는 것이다. 이 시대는 그 소화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분열의 연속. 머무름 없는 주체가 직면한 분열의 연속이다.


이런 시대에 사르트르의 이론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의 후기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우리-주체는 더 멀게 느껴진다. 나를 정립하지 못한 주체들이 투쟁은 고사하고 “우리”를 성립할 수 있을까. 덩어리 져 흐른다.


어젯밤, TV에서 <볼케이노>를 해줬다. 영화 속 마그마는 콘크리트로 만든 도로 분리대를 따라, 길 아래로 뚫린 배수로를 따라, 영화의 끝에선 폭파되어 옆으로 누운 빌딩을 따라 바다로 흘러갔다. 인간이 힘을 합치면 자연의 재앙도 이겨낼 수 있다는, 참으로 이상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인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요즘은 사람이 마그마인지, 마그마가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시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덩어리 져 흐르는 것들을 사람이라 불러도 될까. 그런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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