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와 함께 읽은 고전 1
데미안을 처음 읽은 건 중학생 때였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추리소설을 주로 읽었으니, 아마 맞을 겁니다. 헤르만 헤세는 통과의례였습니다. 문학 소년이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서는 헤르만 헤세를 읽어야만 했죠. 몇 작품을 읽었지만,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던 작품은, 이상하게도 <크눌프>뿐이었습니다. 아마 가장 낭만적인 작품 이어서이지 않을까요?
학생의 독서를 인도해 주기 위해 무려 40년 만에 다시 데미안을 읽었습니다. 두 개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첫째,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중학생 때 나는 이 책을 절반도 이해 못 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저 평범한 성장 소설이 아니라 알면 알수록, 파고들면 들수록 심오하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소설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소설을 그저 평범한 성장 소설로 읽어내는 것은 이 소설에 담긴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를 반도 해독 못했다는 의미가 되죠. 그 해독을 위한 열쇠를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책의 목차를 보죠. ‘두 세계’ 다음에 ‘카인’, ‘예수 옆에 매달린 도둑’이 연이어 나옵니다. ‘베아트리체’와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의 뒤에는 다시 ‘야곱의 씨름’이 나오죠. 이후 ‘에바 부인’이 나오고, ‘종말의 시작’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니까 성경과 관련된 장이 총 세 개가 있는 것이죠. 엄밀히 말하면 연결하려고 마음먹으면 모든 장이 성경과 연결될 수 있지만 가장 선명하게 연결되는 건 성경 속 인물을 정면으로 다룬 저 세 개의 장입니다. 그러니 먼저 성경 속 인물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카인과 아벨
먼저 ‘카인’에 대해 알아보죠. 카인은 아담과 하와의 장남입니다. 차남은 아벨이죠. 두 사람의 사건은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기였습니다. 둘은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죠.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만 받았고 카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넘어갔으면 사건은 커지지 않았겠죠. 그런데 카인이 질투를 해서 아벨을 들에서 “쳐” 죽입니다. 성경 그대로의 표현입니다. 첫 번째 죄입니다. 하나님이 카인을 찾아와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러자 카인이 거짓말을 합니다. “모릅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말이죠. 두 번째 죄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분노합니다. 저주를 내리고 추방을 합니다. 성경을 그대로 옮겨오겠습니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무슨 말인가요. 농사를 지어도 안 될 거라는 말입니다. 결국 정착할 수 없겠죠. 결국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축업이 생업이 아니었던 카인에게는 그야말로 최악의 저주입니다.
카인이 호소합니다. 이 벌이 너무 무겁다고 말이죠. 두려움도 토로합니다. 내가 이렇게 떠도는 나그네로 살게 되어 들을 지날 때마다, 낯선 도시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 하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이죠. 법과 공권력이 없던, 야만의 시대이니 당연한 걱정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묘한 약속을 합니다. 성경을 다시 옮겨옵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카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라고 약속을 합니다.
제사와 표의 해석
이 사건에 대한 평범한 기독교인의 해석은 대체로 같습니다. 우선 제사의 경우, 아벨은 마음을 담아 제사를 드렸고 카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만 받았다는 것이죠. 물론 창세기 어디에도 “마음”의 유무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대신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4절이 이 사건의 각주 역할을 합니다. 옮겨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물론 이건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신약성경 중 히브리서의 저자를 둘러싼 논란이 가장 크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확실히 답하지 못하죠. 그러니 구약 성경의 사건의 각주도 신앙이 없는 사람 입장에서는 미덥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표의 해석도 분분합니다. 영원한 방랑자의 운명을 지고 살아가야 될 카인을 위해 하나님은 “표식”을 줍니다. 이건 눈에 보였을까요? 그것도 확실치 않습니다. 무슨 흉터처럼, 혹은 외모와 외향으로 그 표식이 드러났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표식”으로 인해 이 방랑자를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랬습니다. 이후 심지어, 카인은 에녹을 낳고 그 아들은 번성하여 “에녹”이라는 이름의 도시의 기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방랑조차 대를 이어가지 않았던 것이죠. 오히려 아들 대에서부터는 축복을 받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데미안은 이 표식을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으로 해석합니다. 압도적인 강함으로도 해석하죠. 혼자 다니는 방랑자지만 강한 사람이었기에 어느 누구도 해칠 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너무나 강해서 그의 털끝 하나도 해칠 수 없었던 사람이 있었지.’라고 후손들에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좀 모양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요? 데미안은 이렇게 주장을 이어가죠. 결국 그 강함을 후손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고요. 제사의 거부, 살인, 표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말이죠. 그러다 보니 뭔가 약간 앞뒤가 안 맞는, 설명이 다 안 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고요.
데미안의 이 해석을 들은 싱클레어는 깜짝 놀랍니다. 당연히 히브리서의 설명을 바탕으로 그 사건을 해석했고, 그 표식은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연민의 발현으로 알고 이해했을 테니까요. 더 나아가 이러한 서사와 논리로 인해 신앙은 더 견고해졌을 테고요. 데미안은 이 의심 없는 믿음을, 목사와 신부의 주관적인 해석이 가진 권위 그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었던 것이죠. 그 결과, 싱클레어의 믿음 체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그저 믿어왔던 뭔가는 존재할 수 없게 되죠.
예수와 두 명의 죄인
데미안은 안 그래도 흔들리는 싱클레어를 한 번 더 흔듭니다. 이번에 그 강도가 훨씬 강합니다. 전 카인의 이야기보다 이 이야기에 더 놀랐습니다. 십 대 초반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20여 년 간 교회를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 이야기는 골고다 언덕에서 맞이한 예수의 최후, 그 순간 좌와 우에 있던 두 죄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복음서라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후반부에는 예수의 최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가톨릭에서 비아 돌로로사, 즉 십자가의 길이라 불리는 길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갑니다. 그 길을 가면서 열네 개의 사건을 겪어서 성지 순례를 하는 이들에게, 또 크리스트교를 믿는 이들에게는 열네 개의 지점으로 나뉘어 의미가 부여되죠. 물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최후의 언덕, 골고다 언덕에서의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기다릴 때, 양 편엔 같은 처지의 두 죄인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죽음을 기다리며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죠. 둘 다 중죄인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름은 나오지 않는데, 가톨릭의 전승에 의하면 디스마스(Dismas)와 게스타스(Gestas)라고 하는 데, 디스마스가 회개한 강도, 게스타스가 회개하지 않은 강도입니다. 디스마스는 예수의 오른편에, 게스타스는 왼편에 매달려 있어서 좌익과 우익의 기원이 됐다는 설도 있는데, 이 설의 기원은 프랑스혁명으로 보는 것이 맞는다고들 하죠.
자,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회개의 장면이 중요합니다. 디스마스는 예수를 조롱하는 게스타스에게 예수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죄에 맞는 벌을 받는 것이지만 이 사람은 언제나 옳은 일을 했다고 말이죠. 이후 예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하죠. 그러자 예수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고 화답합니다. 이 짧은 순간을 통해 디스마스는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이룹니다. 반면, 게스타스는 일관되게 예수를 조롱하면서 죄인의 운명을 받아들인 채 죽습니다. 죄인으로 죽은 것이죠.
데미안은 이 사건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합니다. 디스마스를 변절자라고 몰아붙입니다. 배신자로 치부해 버린 것이죠. 아니, 예수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변절자라고 부르다니요. 심지어 게스타스를 칭송하기까지 하죠. 자신의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지 않은 채 받아들인 사람으로 말이죠. 회개와 구원의 상징인 디스마스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회피한 비겁한 주체로 격하시킴으로써,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신앙에 커다란 균열을 냅니다.
헤르만 헤세는 칼 융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소설을 쓰던 당시에는 칼 융에게는 아니었지만 정신상담을 받았을 정도로 그 분야에 대한 신뢰도 있었죠. 물론 그 정도로 심신이 힘들었던 시기였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이 소설에는 칼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 그 흔적이 곳곳에 있습니다. 남과 여, 선과 악, 이성과 감성, 문명과 야성 등 이분법의 논리 위에 문명을 구축해 온 인류의 역사가 억압해 오고 은폐해 왔던 상징과 무의식의 표상들이 말이죠.
원초적 존재
아브락사스는 태고의 신입니다. 선도, 악도 아닙니다. 이분법으로 모든 게 나눠지는 시대, 그 시대 이전의 원초적 존재, 사람이 자연과 가까웠던, 문명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당연시하기 전에 존재했던 초월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이라고 배웠던 그 온갖 영험한 것들의 대명사죠. 큰 바위와 나무와 산과 바다와 강에 존재하면서 사람과 소통하던 그 영험한 존재들은 유럽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전설적인 존재가 됩니다. 아이들의 동화 속으로, 신화 속으로 사라집니다. 가문의 문장(紋章) 속으로 숨어듭니다. 물론 그 조차도, 싱클레어의 집 대문에 있었던 흐릿한 문양처럼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상징” 그 자체만 남게 되죠. 우리가 유럽의 축구팀과 맥주 등에서 보게 되는 그런 상징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죠.
남성성과 여성성
더 중요한 건 남성성과 여성성입니다. 칼 융의 자서전인 <기억 꿈 사상>의 첫 장은 유년 시절을 회상하는 데 이 장에서부터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나옵니다. 쉽게 말하면 아니마는 남성성, 아니무스는 여성성으로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두 개의 성향이 있다고 융은 보고 있습니다. 다만 자라면서 남성과 여성임을 자각하고 그렇게 키워지고 성장하면서 두 성향 중 하나가 억압된다고 보죠. 남자는 여성성인 아니무스를, 여자는 남성성인 아니마를 말이죠.
싱클레어에게 두 누이가 있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만 아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건 아닙니다. 알다시피 서양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라야 하죠. 이 말은 곧 한 집안의 상속은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구약 성경의 계보도, 신약 첫 장에 나오는 예수까지 이어지는 족보도 아들이 중심입니다. 여자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로만 나오죠. 유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가 삶의 중심이 된 유럽도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싱클레어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런 가정에서 싱클레어는 자신의 남성성만 봤을 겁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기도 전에 결정되어 버린 셈이죠.
이런 맥락에서 베아트리체라는 존재는 의미심장합니다. 다의적이고 다면적인 존재입니다. 싱클레어가 베아트리체를 마주친 것이 어쩌면 자신의 다른 모습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가정하고 그 이후의 전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자신은 분명히 베아트리체를 상상하고 그렸는데 그 그림은 계속 변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모습도 보이죠. 자아를 향한 험한 여정의 마지막 단계는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앞서 언급한 융의 자서전의 프롤로그는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자기는 영어로는 Self, 독일어로는 Selbst입니다. 번역자인 조성기 교수님은 독일어의 단어에 “인격의 가장 깊은 구심점”이라는 해설을 붙였습니다. 싱클레어의 여정은 바로 이런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의 구심점을 향한 여행, 그 자체인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은 데미안과 싱클레어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다른 인물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죠. 일종의 통과의례, 혹은 여정의 체크 포인트 역할을 합니다. 우선 프란츠 크로머에 대해 생각해 보죠. 싱클레어는 크로머가 리더인 동네 아이들 무리와 어울리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주목받고 싶어서 이야기도 꾸며내죠. 사실 많은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4, 5학년 정도 되면 엄마 품보다 친구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죠. 특히 남자아이들은요.
놀기 위해 서로 닮으려 합니다. 흉내를 내고 따라 하죠. 요즘 남자아이들이 픽시 자전거를 타고 여자아이들이 아이돌을 좋아하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고 욕이나 비속어를 입에 달고 다니는 건 결국 이와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자기는 원래 동그라미인데 세상 아이들이 다 세모이거나 가장 인기 있는 애가 세모이니 자기도 세모인 것처럼, 또는 세모인양 흉내 내며 사는 겁니다. 뭐, 사실 어른들도 마찬가지죠. 나이마다 해야 되는 취미가 있고 타야 하는 자동차가 있으며 살아야 하는 아파트 평수가 있다고 생각하죠. 사회학적 용어로는 일종의 준거집단이 필요한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말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나를 설명해 줄 기준을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크로머는 청소년이 막 세상과 접촉하려 할 때, 그 세상의 일부가 되려 할 때, 그 준거의 표상 역할을 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되는 인물은 크나우어입니다. 크나우어는 싱클레어를 추종하는 인물이죠. 그리고 싱클레어가 자살을 시도하는 그를 구해주기도 합니다. 크나우어는 어떤 존재일까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닌 질문을 하는 사람입니다. 싱클레어 또한 답을 달라고 떼를 쓰지 않죠. 꽤 오랜 시간, 좌충우돌하면서 “나”라는 답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 크나우어는 지금 당장 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답이 있는 것 같은 사람, 답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득달같이 달려가죠. 그러나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싱클레어도 그 답을 해줄 순 없죠.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은 삶에 대한 무의미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즉 인생엔 아무런 답도 없고 의미도 없다는 냉소와 좌절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니면 광신과 맹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죠.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얘기했듯이 사람들은 자신을 찾는 여정을 견뎌내는 대신 그 답을 주는 종교와 이념, 독재자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맡겨버리는 걸 더 좋아하니까요.
마지막으로 피스토리우스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에게 음악과 철학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그는 종교인이 되기 위해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살고 있죠. 말 그대로 당대의 교양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싱클레어가 학교를 다니면서, 또 깊은 생각을 통해 얻은 정리 안 된 질문과 답을 어느 정도 정리해 줍니다. 싱클레어의 꿈을 해석해 주는 장면이 바로 그런 장면 중 하나죠. 그러나 그는 싱클레어의 “깨어남”의 열망, “도약과 탄생”의 순간을, 그 힘의 원천을 인류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문명이라 말합니다. 이후, 싱클레어가 피스토리우스와 헤어진 뒤 ‘에바 부인’의 장으로 이어집니다. 피스토리우스가 속한 장이 바로 ‘야곱의 씨름’이죠. 앞서 성경을 얘기할 때 야곱을 빼놓은 건 지금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야곱에 대해 알아보죠. 야곱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동생입니다. 에서의 뒤꿈치를 잡고 나왔죠.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지파의 기원이 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 왕자>의 주인공 요셉은 야곱의 막내아들이죠. 야곱의 씨름은 창세기 32장에 나옵니다. 그 전의 스토리를 간략히 얘기하면 동생인 야곱은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후 다른 곳으로 장가를 가서 큰 일가를 이루죠. 이후 형 에서에게 용서를 빌고 화해하기 위해 선물 보따리를 잔뜩 들고 형에게 가는 길이었습니다. 거의 형에게 가까워졌을 때쯤, 형의 반응이 걱정됐던 야곱은 식솔과 선물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들판에서 야영을 합니다. 그때,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납니다. 성경에도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나타나서 밤새 씨름을 합니다.
이 씨름 대결을 청했던 사람은 자기가 금방 이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승부가 좀체 나질 않자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부러뜨립니다. 요즘 말로 하면 고관절인데, 그야말로 힘의 원천이죠. 야곱은 그 뼈가 부러져서 힘을 못 쓰는 와중에도 안 놔줬습니다. 직감적으로 이 사람이 하나님인 줄 알았던 것이죠. 축복하기 전엔 안 놔준다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죠. 야곱은 그곳, 하나님과 씨름을 했던 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칭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브니엘”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청소년들에겐 익숙하죠?
자, 다시 소설로 돌아가면, 소설에는 성경 속 서사가 없습니다. 축복의 서사가 없죠. 다만 씨름의 서사만 있습니다. 무엇과의 씨름인가요. 피스토리우스로 상징되는 기존의 종교, 문화, 예술, 철학, 지식과의 씨름입니다. 물론 피스토리우스는 데미안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라는 장에서 피스토리우스는 신학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교도인 배화교, 즉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도 말해주고 태고부터 인간이 갖고 있던 자기 발견의 능력을 깨워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현학적인 과시”처럼 느껴집니다. “이전 세계의 폐허를 뒤지는 고달픈 탐색의 소리가 거기서 들려왔다(P167).”라고 싱클레어는 독백합니다. 그리고 그의 꿈 이야기를 다시 해달라고 한 후, 그 꿈에서 “빌어먹게 골동품 냄새”가 난다고 말합니다. 피스토리우스는 과거의 그림자를 이고 온 구도자였죠. 그것으로는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미래로,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으로 말이죠.
망치
피스토리우스는 망치 역할을 했습니다. “나직하고 꾸준한 망치질로 내 마음속의 한 점을 계속 두드렸다.”라고 싱클레어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진짜 망치라면 한 번에 부서뜨려야 합니다. 니체의 망치처럼 말이죠. 니체의 책 중에서 망치가 나오는 대표적인 구절을 옮겨보겠습니다. 먼저 <우상의 황혼>입니다.
“여기서 한번 망치를 들고서 의문을 제기해 본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부풀어 오른 창자가 울려대는 그 유명하지만 공허한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 영원한 우상들을 이 책에서는 마치 소리굽쇠를 가지고 치듯이 망치를 가지고 치게 될 것이다.”, 니체, <우상의 황혼>, 서문 중에서(책세상 판본, 니체 전집 15, P.74)
다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입니다. 알다시피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입니다. 또, 융이 니체와 칸트를 탐독했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이죠. 헤르만 헤세 또한 작품에서 니체를 직접 언급합니다. 망치의 등장이 자연스러운 이유입니다.
“나의 의지, 나의 타오르는 창조적 의지는 언제나 새로이 나를 인간에게로 몰아간다. 그리하여 망치가 돌을 치도록 만든다..... 이제 나의 망치가 그 형상을 가두고 있는 감옥을 잔인하게 두들겨 부순다.”, 민음사 판본, P150.
피스토리우스의 망치는 낮고 반복적인 망치입니다. 반면 니체의 망치는 일갈(一喝)과 같은 망치입니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라는 카프카의 말에 나오는 도끼처럼 쪼개고 가르고 부수는 망치입니다. 피스토리우스의 망치는 낡았습니다. 골동품이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진정한 자신을 찾아 비상하는 존재를 깨우는 망치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카인의 징표와 공백의 자리
헤르만 헤세의 정치적 성향은 모릅니다. 다만 그가 당시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 단서를 이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에바 부인’ 장에는 데미안의 장엄한 대사가 있습니다. 196페이지에서 198페이지 상단까지 이어지는 연설에 가까운 대사죠. 그 대사 안에 ‘카인의 징표’가 무엇인지 힌트가 담겨 있습니다. 데미안은 당시 유럽을 “무한히 오래 묶여 있던 짐승”이라고 말합니다. 그 짐승이 자유를 얻으면 혼란이 오겠죠. 그의 말처럼 이십 세기 초반은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기 전까지, 20세기 초반엔 세계 곳곳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1905년과 1917년엔 러시아 혁명이 있었고, 이 책이 나왔을 무렵인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엔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일어나 독일제국이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그 사이 1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1932년엔 스페인 내전, 19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죠. 이십 세기의 전반기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습니다. 묶여 있던 짐승이 막 풀려났죠.
이 앞의 다른 대화에선, 이런 거대한 전쟁이 “석기시대의 신들을 청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계는 죽어 멸망할지도 모른다고도 하죠. 싱클레어는 걱정합니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이죠. 데미안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공간이 생기게 될 거야. 오늘날의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나면 말이야(PP.183-184).”라고 말이죠.
와해되는 이 시기, “무시무시한 발전의 움직임이 와서 문 두드릴 때” 거기에 응답하여 “함께 갈 얼마 안 되는 사람이 우리들”일 것이라고 데미안은 말합니다. 이어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표적이 찍혀 있어. 무서움과 증오를 일으켜 당시의 인류를 그 옹색한 목가로부터 끌어내 위험하게 넓은 곳으로 몰아가도록 카인에게 표적이 찍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이 대사를 한 후 시대마다 그 역할을 한 사람들을 나열합니다.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시저, 로욜라 등을 말이죠.
이 대사로 인해 카인의 징표는 개인의 차원에서 역사적 차원으로 전환됩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 또한 개인의 차원에서 역사적 차원,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죠. 카인의 징표를 가진 사람만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갈 수 있으며 그런 사람만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밀고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위험한 부분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히틀러와 나치가 니체의 초인을 자기 입맛대로 해석했던 것처럼, 이 부분에 등장하는 공백을 채울 새로운 의지와 카인의 징표를 가진 인물에 대한 해석 또한 그렇게 오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죠.
엔딩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열린 결말입니다. 장의 이름 또한 ‘종말의 시작’입니다. 끝도 아니고 시작도 아닌, 종말 안에 시작이 있고 시작 안에 종말이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성장 소설 대부분은 끝이 있습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주인공은 행복과 사랑을 찾고 악당은 패배하고 선은 승리합니다. 설령 누군가 죽었다 하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노래하며 내일을 기다립니다. 독설로 가득 찬 <호밀밭의 파수꾼>조차 가을학기에 대한 희망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 소설, 마지막 장의 배경은 전쟁터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겠죠. 데미안도, 싱클레어도 참전합니다. 싱클레어는 부상을 당했고, 데미안은 그를 구해주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갑니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습니다. 싱클레어도 어쩌면 회복과 동시에 총을 들어야 할지 모릅니다. 둘은 부름에 응답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난폭할지 몰랐을 겁니다.
<데미안>은 오래된 종교와 철학, 고루한 가치관에 묶여 있던 나에게 자유를 준 뒤 지난한 투쟁을 거친 뒤 고요한 참 나를 찾는 과정을 담은 소설입니다.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이분법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의성의 세계로 나아가 혼란 가운데 참 나를 발견하는 이야기죠. 물론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싱클레어도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이 혼란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를 찾는 것도, 찾은 나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사실, 나를 찾는 작업은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찾은 나를 어디에 묶어 둘 수는 없습니다. 묶어두는 순간 나는 골동품이 됩니다. 이전 세계의 폐허로 전락해 버리죠. 결국 나를 찾는 순간, 그 여정의 종말은 다른 여정의 시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조금 더 끌고 가면 그 끝에서 들뢰즈라는 학자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가 차이와 반복의 사상가였다는 점만 말하겠습니다. 그는 순간의 차이, 반복되는 것들 속에서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조차도 지금 이 순간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하는 나를 포착하고 다시 놔준 뒤 새로운 나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삶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알에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깨고 나오는 건 알 안에 있는 주체의 몫입니다. 그러나 서둘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주어진 학업을 성실히 하면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친구들의 말에 흔들리지 말고, 세상의 유행에 끌려다니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신,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감사히 맞으며 사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져보면 싱클레어도 그러지 않았나요? 남보다 더 깊이 공부하고 오래 생각하고 가끔은 나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나답게 성장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이 나를 찾는 여정의 첫 단추가 될 것입니다. 이 어려운 책을 선생님과 함께 읽어줘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이 정리가 여러분의 생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