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을 채운 독서 레터 02
읽었지만 내용이 기억이 안 나는 책도 있고,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안 나는 책도 있습니다. 뭐, 둘 다 상관없습니다. 다시 읽으면 되니까요. 문제가 되는 건 기억의 오류가 있는 책입니다. 내용을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거나 읽지 않았는데 읽었다고 착각하여 읽지 않으려 한다면 문제가 될 수 있죠. 싯다르타는 후자에 속합니다. 우선, 전 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사제 계층의 청년이 삶의 답을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다시 세속의 길에 젖어 들어 살다가 부처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로.
물론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헤르만 헤세가 그렇게 뻔 한 이야기를 쓸 리 없죠. 사실 이런 구조의 이야기는 흔합니다. 서양의 문명인이 동양의 신비한 스승을 만나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세속에서 성공했지만 영혼의 공허함을 못 이겨 구도의 길을 떠난 이야기들 말이죠. <티벳에서의 7년>과 같은 영화도 대충 그런 이야기이고 얼마 전에 제법 유명세를 탔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와 같은 에세이도 전형적인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린 이런 이야기를 경계해야 합니다. 뭔가를 하면 원하던 답을 얻을 수 있다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인생은 수학이 아닙니다. 아니 수학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식을 하나 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이게 유일한 답이라고 말하는 모든 이들은 사이비 교주이거나 사기꾼인 이유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계속 변형되어 나오고 그 답 또한 계속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고,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며, 더 나아가 모든 사람에게 연민의 감정을 가져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입니다. 유대 민족의 바리새인과 비슷한 계층이죠. 참고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다섯 계급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계급조차도 규정되지 않아서 소위 불가촉천민인 찬달라, 그 위에 농업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수드라, 그 위에 자영업과 상공업에 종사하는 바이샤, 왕과 귀족 계층인 크샤트리아, 마지막으로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이 있습니다, 바라문은 브라만의 다른 발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고대 인도에서 생각하는 바라문 계급의 이상적인 인간의 삶은 梵行(범행)․家住(가주)․林棲(임서)․遊行(유행)의 단계로 이뤄져 있었습니다. 각 단계를 간단히 말하면 범행은 소년기의 학습, 가주는 결혼과 경제생활과 같은 사회적 의무의 이행, 임서는 은퇴하여 숲에서 홀로 생활하는 것, 유행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며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학습, 사회적 의무, 은퇴, 그리고 해탈을 위한 수행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도입부, 싯다르타는 그 계급 중에서도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심지어 외모도 좋았죠. 정신적, 육체적으로 완벽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범행 단계로 스승에게 배우는 중이었죠. 번창한 가문을 물려받을 아들이었죠. 고빈다라는 친구로부터는 존경을, 부모로부터는 애정을, 사회로부터는 인정을, 또래 여성들로부터는 흠모를 받았죠. 이보다 더 완벽한 삶이 있을까요?
그는 충실했습니다. 몸가짐은 완벽했고 종교 예식을 빈틈없이 수행했고 경전을 암송할 수 있었으며 매일 몸을 씻어 하루의 업보를 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 지도 계층의 삶이 이러합니다. 그 본질의 유무 판단 이전에 삶의 형태는 완벽하죠. 그 전통으로 모든 종교의 예식 안에 남아 있습니다. 당연히 같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싯다르타에게 찾아온 의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진리를 얻을 수 있을까? 차안의 세계 너머에 있는, 피안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걸까? 만날 수 있는 걸까?
쉽게 생각해 보죠. 형식이 곧 본질일 수 있을까요? 계급이 곧 사람의 본질 그 자체일 수 있을까요? 어떤 가문에서 태어나 어떤 모습으로 살면서 어떤 의식을 갖고 특정 예식을 하면 다른 계급의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진리와 지혜를 선취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성전 입구에서 이 예식을 우선순위에 두는 사람에게 각종 산짐승과 제물을 파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엎었습니다. 예수는 누구보다도 외식(外飾)하고 외식(外飾)하는 자들을 혐오했습니다. 형식과 겉치레, 그 둘 다를 싫어했죠.
예수는 물론이고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본질을 얘기했습니다. 더 나아가 철학 또한 그 본질을 향한 위대한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참여한 이 중 가장 거친 선원 한 명을 불러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실존주의입니다. 실존주의적으로 얘기하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합니다. 즉 살면서 실천하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 이 순간의, 실존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이 말은 지금 나의 실존은 순간, 획득될 뿐 영구적이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어쩌면 싯다르타의 초반부는 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럼, 사문은 어떨까요? 싯다르타는 모든 걸 버리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땠나요? 삶과 생계는 어떻게 유지됐나요? 그들은 공동체의 일원이 갖춰야 할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외계인이었죠. 외계인이라는 말은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내부의 이해와 규칙을 벗어난 존재는, 엄밀히 말하면 다 외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외계인은 혐오의 대상이 되지만 어떤 외계인은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전자의 경우엔 틀리다고 판단될 때, 후자의 경우에 다르다고 판단될 뿐만 아니라 그 다름이 고양(高揚)된 이성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상태로 인해 획득된 경우라고 추앙받을 때 존경받습니다. 그 다름의 성취 자체가 일상의 상실을 무릅쓴 것이기에,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더 추앙하죠. 아울러 일부 지역에서는 그런 “밖”의 존재, 일상적 가치를 초월한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 덕분에 공동체뿐만 아니라 평범한 이들의 안위가 유지된다고 여기기도 하죠.
존경받는 “다른 존재”, 사문들은 수행하고 공부하고 탁발합니다. 인도를 포함해 인근의 많은 나라에선 탁발승을 긍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군대를 가듯이 승려로 사는 것이 문화적으로 의무로 인식되는 나라도 있습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통과 의례라고 보는 것이죠. 물론 그런 통과 의례를 거쳤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답은 가진 사람만이 어른이 될 수 있다면 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죠. 앞의 단락에서 매듭짓지 못했던 말을 계속하면, 일상의 훼손을 무릅쓴 구도자를 존경해야만 할 필연적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우리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해서도 안 되듯이 같은 이유로 존경받아야 될 이유도 없습니다. 나와 다른 형태로 사는 사람은 단지 그것으로 충분하거나 그것이 자기에게 가장 잘 맞기에 선택했을지도 모릅니다. 마더 테레사의 자선 사업을 신랄하게 비판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자비를 팔다>를 읽어보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더 깊이 갈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싯다르타는 그 무리에서도 나옵니다. 그들에게 배울 만큼 배웠다고 판단을 내린 뒤 그들에게 배운 그 힘으로 사문의 리더를 제압한 후 나오죠. 상당히 재미있는 장면입니다.
싯다르타는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이 사는 세상으로 갑니다. 속세라고 하죠. 거기서 사랑과 경제를 배웁니다. 속세의 사람을 지탱하는 두 가지 힘입니다. 싯다르타는 이 두 가지를 그야말로 치열하게 배우고 완벽하게 성취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문의 과정을 통해 배웠던 고차원의 기술을 상실합니다. 명상하는 법, 침잠하는 법과 같은, 내면을 돌아보는 방법, 세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법을 잊어버립니다. 대신 도박을 합니다. 많이 먹습니다. 과음을 합니다. 돈을 벌고 씁니다. 사랑이 없는 성적인 관계를 지속합니다. 그러다 다시 그곳을 떠납니다. 그 이유가, 처절한 반성의 독백이 <강가에서> 장에 펼쳐집니다. 특히 마지막 145페이지에 147페이지에는 고백은 그의 여정의 요약이자 그가 그 여정을 통해서도 원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유의 처절하면서도 철저한 반성입니다.
바라문으로써 행했던 예식과 성스러운 구절이 오히려 그의 자아를 견고하게 했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런 교만한 마음속으로” 자아가 굳건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문들을 만나 “단식과 참회”로 그 자아를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어떤 스승도 어차피 자기를 구제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결국 세상에서 “쾌락과 권력에, 여자와 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타락한 인생의 그 무의미함을 견뎌”내다 못해 결국엔 그런 “삶의 종말”을 맞게 되고, 절망감에 빠지게 되어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모든 걸 두고 떠난 것이죠. 그는 강가에 다다라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싯다르타”를 강물 속에 죽입니다. 새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흘러가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끼죠.
고백하자면, 강이 처음 나왔을 때 전 그 강을 레테의 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은 이가 건너는 망각의 강을 떠올렸던 겁니다. 당연히 바주데마는 카론과 유사한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숲은 일종의 중간지대이고 강의 이편과 저편은 속세와 정토(淨土)를 구분하는 경계로 여겨졌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애초에 이 이야기를 그저 그런 성장 이야기라 기억하고 읽은 제게 강 또한 당연히 이런 기능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강은 경계의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물론 강의 이편과 저편은 감각과 사유, 물질과 생각, 피안과 차안의 세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립하는 세계에서 늘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이걸 손에 쥐면 저걸 손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죠. 심지어 양편은 서로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물질세계에서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 목적, 인생을 마무리할 때쯤엔 누구나 다다라야만 하는 경지라고 생각하죠. 정신세계를 더 고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선택의 강요는 내 밖에서도 오고 나 스스로부터도 옵니다. 이런 심리 때문인지, 서점에 그런 책들이 많습니다. <마흔에 만나는....> 시리즈 같은 책들이 대표적입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이 유행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세상과 사람에게, 물질에도 휘둘리지 말라는 책들이 많습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느 것도 약속하지 않는 책입니다. 철학은 자본주의나 물질세계의 대안제나 위로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든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만 합니다. 철학자도 밥은 먹고 사니까요.
우리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어도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데미안에서 카인의 징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던 것처럼 말이죠. 이를 위해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 없는 걸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싯다르타가 찾은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건 아닐까요? 그건 정말 이름이 있는 걸까요? 마지막 장에 다시 등장하는 고빈다처럼 흔들림 없는, 하나의 확정적인 답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싯다르타가 무엇을 찾았는지, 우리는 마지막 장인 <고빈다>와 함께, 그 앞의 <옴> 장의 몇 페이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깨달음을 준 이가 누구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바로 바주데마입니다. 바주데마는 한 가지 일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달인(達人)이라고 합니다. 달인은 끝에 다다른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삶을 산 사람은 긴 세월 바위를 향해 떨어지는 한 방울 물과 같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을 떨어져 결국에 바위에 구멍을 뚫어낸 물처럼 묵묵히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피안(彼岸)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찾아진 것도, 획득된 것도 아닌, 그저 다다른 것입니다.
더불어 강, 그 자체의 의미도 숙고해봐야 합니다. 강은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이자 합해지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오가면서 결국엔 자신과 만나게 되는 곳입니다. 강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불교 용어를 빌려 말하면 사정제와 오욕칠정, 삶의 기쁨과 슬픔이, 나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미래까지 모두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 강입니다. 바주데마는 그 강과 더불어 살면서 인생의 진리를 체득했죠. 찾은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몸으로, 삶으로 익힌 것입니다.
바주데마는 많은 사람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실어다 줬습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오직 그만의 방법으로 살아냈습니다. 이쪽의 사람들이 애를 쓰며 잡으려 하는 물질도, 저쪽 사람들이 갖은 방법으로 찾으려 하는 정답도 잡히지 않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고 낮이 있으면 밤이 있으며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우리의 삶 또한 이쪽의 가치와 저쪽의 가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이어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 어느 것도 내 것이다, 이것만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싯다르타가 아들을 쫓는 걸 막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헤세가 말하는 깨달음, 도는 삶에 있습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닙니다. 한 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 사람만이 얻는 것이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도에 달합니다. 주성치의 영화 <소림축구>와 <쿵푸허슬>에도 이런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인이라는 개념에도 같은 의미가 담겨 있죠. 하나의 일에 깊이 몰입하여 평생을 바친 사람은 결국 인간이 다다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도의 끝과 조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생의 답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강처럼 말이죠. 그러나 많은 이들이 물을 얼려서라도 순간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두껍게 얼은 강도 그 아래는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결국, 그런 시도는 좌절되고 맙니다. 또, 강은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다만 흐를 뿐입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주데마는 강의 소리를 들으라고 했습니다.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불교의 말 중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다리가 있는 아래쪽을 잘 비추고 돌아보라는 말이죠. 선종에선 이 말에 자신이 서 있는 자리와 행동에 집중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현법열반(現法涅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좀 거칠게 요약하면 지금 여기, 이 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상태에 다다르라는 것이죠. 어쩌면 스님들이 함께 힘을 모아 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불자들과 함께 김장을 하는 울력을 하는 것도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과 도를 실천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수행이고 깨달음의 과정인 것이죠.
배가 없을 때 강을 건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수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얕은 강은 걸어서 건널 수도 있겠죠. 하지만 물이란 것이 좀 특이해서 어느 높이 이상이 되면 차라리 물에 푹 잠겨, 수영을 하는 것이 이동에는 훨씬 빠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이동은 강을 건너는 것도, 강을 거스르는 것도 아닌 강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겠죠. 그러기 위해선 강이 흐르는 방향을 알아야 합니다. 또, 비가 많이 와 강이 사나워졌는지, 아니면 잔잔한지도 파악해야 합니다. 둘 다, 보고 들어야 합니다. 강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들여다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P.206
헤세의 마음은 어쩌면 더 대사에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설 <싯다르타>의 내용을 요약할 수는 있어도 읽을 때의 감동과 깨달음을 다 나눌 수 없습니다. 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읽어 나갈 십 대 소녀인 아진이를 생각했습니다. 이 책이 어려운지, 쉬운지 그 여부 보다 지금 읽고 훗날, 그러니까 지금의 제 나이쯤 되어서 다시 읽을 때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게 될지 궁금했습니다. 그 감동의 차이를 오롯이 느낄 오십 대의 아진이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알베르 카뮈가 생각이 났습니다.
알베르 카뮈는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섬>에 헌사를 바치면서,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 보게 되는 저 알지 못하는 젊은 사람을 진정으로 부러워한다.”(알베르 카뮈, <섬을 읽고>, 장 그르니에, 『섬』, P.27 (덕우출판사, 1989년 판본) 고 했습니다. 제 마음이 딱 이랬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아니 복잡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선은 젊었을 때 읽었다면 전 이 책의 깊이를 이 정도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후반부, <옴> 장에 나오는 강이 전하는 소리와 그 물결을 보고 깨닫는 장면과 바주데마가 입적(入寂)의 순간 - 스님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고요함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 을 스스로 정한 뒤 그 장소를 찾아 숲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읽으면서 결코, 울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알맞은 순간에 <싯다르타>를 만났습니다. 덕분입니다. 이 어려운 책을 함께 읽어준 아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