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칸을 채운 독서 레터 03

by 최영훈

유명한 소설이나 영화 중엔 보거나 읽었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그런 작품 중 하나죠. 노벨 문학상도 수상했고, 영화화도 두 번이나 됐으니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저 또한 이 소설을 읽었다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기에 얼마 전 불쑥 이 책을 샀을 때도 다시 읽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읽으면서 깨달은 건, 이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거나 읽었다 해도 각색된 판본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은 후 영화도 “다시” 보려 했습니다. 분명 스펜서 트레이시와 안소니 퀸이 각각 늙은 어부 역을 맡은 두 버전의 <노인과 바다>를 다 봤다고 믿어왔기 때문이죠.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건 스펜서 트레이시의 버전이었고, 그마저도 아주 어릴 적에 봐서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는 걸, 영화를 다시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더불어, 이 소설과 영화가 우리 인생에 던지는 교훈이 많다는 것도 깨달았죠. 이 글 안에 관일이와 함께 나눈 교훈을 담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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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소설 속에서도, 또 영화 속에서도 늙은 어부는 후회와 미련을 끊임없이 쏟아냅니다. 먼바다로 나간 사람이 뭍에 두고 온 것, 가져오지 않을 것, 지금 있었으면 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후회하죠. 이 중 가장 많이 아쉬워하는 것은 함께 배를 탔었던 소년의 부재입니다. “소년이 곁에 있었으면”하고 반복해 말하며 소년의 공백을 아쉬워하죠. 그런데 주목해봐야 할 건, 후회에 사로잡히진 않는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있었으면 요긴하게 쓰였을 작살과 칼, 생선 위에 뿌릴 라임즙이 없는 것에 대해, 그것들을 미리 챙겨 오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만 금세 떨쳐내죠.


후회는 쓸모없는 감정입니다. 뒤를 향하는 감정이기 때문이죠. 후회는, 실질적으로도 상징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뒤에 남겨진 것을 향합니다. 떠나온 자리, 살아낸 시간 속에 두고 왔거나, 이미 상실된 것, 미쳐 지금의 현실까지 챙겨 오지 못한 무엇에 관한 감정이죠. (시간적, 공간적으로) 뒤에 있는 것을 지금 여기서 만날 방법은 없습니다. SF 영화에 나오는 텔레포트 기법을 사용하거나 시간을 뒤틀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게 해 준다는 시간의 지평선이 있는 블랙홀과 웜홀을 지나지 않는 이상 과거와 현재는 만날 수 없죠.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먼바다로 나가기로 작정하고 긴 항해를 한 사람은 뭍에 두고 온 것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합니다. 돌아가야 할 거리가 멀수록 후회되는 것과의 만남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죠. 시간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의 시간에 있는 사건과 사물일수록 후회의 대상으로서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물론 가까운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죠. 돌아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엔 앞에 놓인 인생이 너무 깁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루가 너무 소중합니다. 오늘 하루는, 85일 만에 걸린, 일생일대의 큰 물고기와 같기 때문이죠.


희망, 계속 싸울 수 있는 힘

후회가 시간과 공간상 뒤의 것, 지나온 것을 향하는 감정인 반면, 희망은 앞을 향하는 감정입니다. 앞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성된 것은 고사하고 준비된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희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무(無)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입니다. 후회와 미련, 아쉬움이 고통의 쓴 물을 머금고 있다면 희망은 그 쓴 물을 몰아낼 멀리서 오는 파도와 같습니다. 소설 속, 늙은 어부가 “고통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외칠 수 있는 것도 희망이 가진 이러한 힘 때문입니다. 또, 어부가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고, “희망이 없다는 건 죄악(P.98)”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죠.


부연하면, 희망을 버리는 것이 죄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살아내라고 창조되었고, 그 살아나감은 온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희망을 저버리는 건 누구에 대한, 외부에 존재하는 법의 위반으로 발생하는 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반하는 죄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인생을 스스로 끝내려 하는 것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인 것이죠.


그리하여, 희망은 견디는 힘, 싸워낼 힘이며, 궁극적으론 살아나갈 힘입니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마을과 멀어지는 것처럼 먼바다에 나갈수록 해안과 멀어집니다. 도움은 멀리 있고 재난은 코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손에 잡히는 것을 움켜쥐고 남아 있는 힘을 그러모아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켜내야 될 청새치의 살점은 이미 사라져 겨우 머리만 남았습니다. 그런 머리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상어가 물어뜯든 말든 신경 끄고 자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어부는 끝까지 싸웁니다. 포기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는 말이 <슬램덩크>에 나오지만, 원조는 <노인과 바다>입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선 이 말의 참 의미를 더 장엄하고 더 고독하며 더 치열한, 어쩌면 생의 마지막 승부의 순간으로부터 끌어올립니다. 그 끌어올린 것을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실패의 연속이어도 살아가야만 한다고, 절망이 예감되는 밤에도 희망을 품고 잠들어야 한다고.


전쟁과 전투가 승리에 대한 확실한 담보가 아니라 용기와 믿음으로 우선 실행되듯,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84일간 실패가 반복되어도 85일째에는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품고 맞이하는 것이 오늘이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물론 희망의 크기만큼 위험도 큽니다. 어부는 나름 준비를 많이 했습니다. 과거의 경험도 있으며 승리의 추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것입니다. 경험이라는 뭍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도전의 상대는 미지의 존재가 됩니다. 누가 더 유리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바다에서 한 번도 싸워본 적 없는 상대를 만났습니다. 미지의 장소에서 만난 미지의 적을 위한 준비는, 당연히 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다 합니다.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은 다 끌어올립니다. 소설 속 이 대사는 그 정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의 그 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그가 말했다. “난 여전히 늙은이야. 하지만 비무장은 아니야.”(P.98)

투쟁의 이유-인간의 존엄

희망이 끝까지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왜 싸우느냐죠. 전 이 소설을 다시 생각하며 시지프의 신화가 생각났습니다. 신화 그 자체와 카뮈의 책 <시지프 신화> 가요. 우선, 그리스 신화 시지프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시지프(Sisyphos)는 코린토스를 건설한 왕입니다. 똑똑한 게 지나쳐서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사악한 면도 있죠. 여행객과 방랑자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큰 죄는 제우스를 속인 죄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데리러 온 죽음의 신 타노스를 묶어두기도 했죠.


결국 엔 전쟁의 신 아레스까지 와서 타노스를 풀어주고 시지프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여하간, 이런 우여곡절 끝에 죽은 시지프는 벌을 받습니다. 아주 큰 돌을 지하세계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벌이죠. 동그란 돌을 산 정상에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가고, 시지프는 다시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가 그 돌을 다시 올려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무한반복의 형벌이죠.


알베르 카뮈는 이 신화의 주인공 시지프가 처한 운명을 인간의 운명과 같다고 봤습니다. 기안 84 아시죠? 그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 기억나나요? 바로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라는 말입니다. 전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카뮈와 사르트르, 그리고 실존주의를 떠올립니다. 자, 철학 그 자체에 대해서 깊이 말하기보다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죠. 혹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태어난 이후에, 아니 이성에 의한 의지는 훨씬 뒤에 형성됩니다.


두 번째 질문을 해보죠.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우린 모두 죽습니다. 다만 그, 때와 장소를 모를 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린 지구의 주인이잖아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 들어봤죠. 쉽게 말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아니 지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 그런 존재가 태어날 때도 자기 의지 없이 태어났는데, 존재의 소멸도 피할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인생의 처음과 끝이 자기 영역, 특히 이성의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시작부터 아주 위험한 테마를 던집니다. 선생님의 책은 좀 오래된 것이어서 번역이 좀 딱딱하니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옮겨보겠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시지프의 신화」, P.9(문예출판사, 1994년 판본)


자, 위험합니다. 카뮈의 말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그야말로 이런 시비를 거는 겁니다. “아니 인간은 모두 죽고 언젠간 죽는데, 지금 스스로 죽지 말아야 될 이유가 도대체 뭐야?”하고 따져 묻는 것이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철학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이라는 겁니다. 이 과업을 카뮈가 스스로 떠안고 쓴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물론 답을 합니다. 우선 카뮈는 정면으로 보라고 합니다. 뭘 정면으로 보라고 하는 걸까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태, 조리(條理) 없는 사태, 즉 부조리(不條理)한 사태를 정면으로 보라는 겁니다.


자 그럼,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뭐죠? 살아내는 겁니다. 카뮈는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눈가리개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성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현실과 싸우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다(P.75).”라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존엄성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과 싸우는 데서 발현된다는 것이죠.


절대 줄은 놓지 않는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죠. 산티아고는 자신의 존엄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피곤할 때마다 바닷물을 사용하여 회복합니다. 소설에는 없지만 영화의 첫 장면을 보면, 빈손으로 돌아온 그가 조각배를 정박시킨 후 해변을 향해 발을 내딛음과 동시에 손을 바다에 담가 물을 한 움큼 퍼내어 자신의 머리칼과 얼굴을 적십니다. 이런 장면은 청새치와의 싸움 중에도 반복됐습니다. 당연하게도, 힘들 때도 자고 싶을 때도 낚싯줄을 놓을 수 없습니다. 배를 떠날 수도 없습니다. 휴식은 줄은 잡은 채 이뤄지고 그의 편한 자세는 배 안에서 겨우 만들어집니다.


그에게는 끝까지 싸워낸 자신에 대한 존엄, 그 어떤 불안의 징후에도 굴복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자신의 결정에 대한 존엄이 있었습니다. 이 자신에 대한 존엄은 자신과 겨루었던 해저의 강자였던 청새치의 존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나와 타자에 대한 존엄, 투쟁 속에서 확인되는 인간의 존엄이 드러난 부분 중 하나가 산티아고가 회상한 팔씨름 대결입니다. 밤에 시작한 대결은 다음 날로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엔 어부가 이겼죠.


사실, 승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구경꾼들이 지쳐 잠들고 집에 가고 출근해도 끝까지 마주하여 대결하는 것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부를 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전력을 다한 사람에게만 승부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걸 어부도, 흑인도 알고 있었습니다. 소설 속 이 문장엔 인생이라는 승부에 나선 인간의 마음가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 거야.”(P.96)
“그들과 싸울 거야.” 그가 말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싸울 거야.”(P.108)


다시 말합니다. 산티아고가 바다에서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건 인간의 존엄이었습니다. 소설에서 거듭해서 나오는 사자와 같은 위풍당당함이죠. 그래서 우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봐야 합니다. 거대한 청새치의 뼈와 함께 돌아온 어부는 돛과 어구를 챙겨 오두막으로 돌아갑니다. 부두에도 거리에도 사람은 없습니다. 환영도 비난도 없습니다. 바다에 나가 일을 한 사람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챙겨야 될 것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뿐입니다. ‘집에 돌아가 쉰다.’ 그뿐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말이죠. 절망도, 희망도 살아있는 자의 몫입니다. 기왕에 살아있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면 희망을 품고 내일이라는 바다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소설엔 어려운 단어가 없습니다. 헤밍웨이는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단어의 사용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소설가 포크너와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을 정도죠. 분명 헤밍웨이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소설의 의미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또 다른 미국 작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도 이와 비슷하죠.


아흔 번 실패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라는 뻔한 말로 이 글을 끝맺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패는 안 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다만 실패했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만 알면 됩니다. 다시 도전할 용기만 있으면 됩니다. 어쩌면 이 소설이 지금은 다 이해가 안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선생님 나이 정도가 되면 다시 생각나서 읽고 싶어지는 소설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소설을 함께 읽고 깊이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