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을 채운 독서 레터 04
이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은 이 소설을 정치 스릴러를 읽듯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터 촘촘히 심어 놓은 여러 단서와 복선들을 후반부에 다 회수합니다.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와 코난 도일의 소설 속 주인공인 에큘 포와로와 미스 마플, 셜록 홈스가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는 외치는 마지막 부분처럼 이 소설의 후반부는 말 그대로 유종의 미, 대단원의 막이라는 표현이 어울렸습니다. 윈스턴이 돌고래 카페에서 진을 마시는 장면과 마지막, 눈물 흘리는 장면까지도 꼭 필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 다시 말하지만 한 편의 정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 대부분은 이 책을 힘들게 읽은 모양입니다. 특히 후반부, “그 책”의 내용에 대한 이해와 서사의 종결과 신어의 원리 사이에 빠져 있는 뭔가에 대한 상상이 부재하여, 이 소설의 결말에 대한 생각이 저와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저와 하나씩 작가가 준 단서들을 짚어가면서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여러 의미를 되새겨 보겠습니다.
“언제나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은 글 쓰는 사람들이다. 사실은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만 글 쓰는 사람이 된다.”(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P.32)
인용을 하며 이 단락을 시작합니다. 문학평론가이자 프랑스 문학 번역가인 황현산 선생님의 글입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는 백상현의 책 제목이 생각났습니다. 이 말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입니다. 생각은 다시 다른 책 제목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여성학자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 쓴다>와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지지 않기 위해 쓴다>로 말이죠.
윈스턴은 글을 씁니다. 사적인 글쓰기가 금지된 사회에서 사적인 글을 씁니다. 글쓰기는 왜 금지와 감시의 대상이 될까요? 황현산 선생님의 글에 답이 있습니다. 글은 사람과 공동체, 심지어 나라를 움직이고 권력자의 무릎을 꺾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아니, 어쩌면 최초의 수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사상 모든 혁명은, 실패한 혁명조차 하나의 선언으로 시작됐고, 하나의 문서로 진행됐으며 종결됐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정변, 즉 혁명이 되지 못한 쿠데타와 반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알다시피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조차 말과 글을 발판 삼아 독일을 장악했습니다. 그가 폭력과 광기를 도구로 사용한 건 그다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를 아는 독재자와 전체주의 국가들은 당연히 말과 글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혁명의 화염을 일으키고 반동의 화약고를 터뜨립니다. 결국 싹을 자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사적인 글은 공적인 글의 토대가 되고 사적인 기억은 공동체 기억의 씨앗이 됩니다. 개별적 글과 기억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올 때 그것은 역사를 바꾸는 급류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근현대사에서 이런 급류의 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권력자들을 봐 왔습니다. 빅브라더가 두려워했던 건, 이 급류의 시원이 될지도 모르는 한줄기 샘의 솟아남이었기에, 일기를 쓰는 윈스턴은 가장 위험한 반역자인 것입니다.
연대는 이어지는 것이고 유대는 이어짐은 물론이고 심지어 옷에 꿰매진 것처럼 심리적으로 밀착된 상태를 뜻합니다. 두 단어 다 연대감, 유대감처럼 감(感)을 붙여 그 상태의 정도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유대와 연대는 빅브라더와 같은 독재자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유대와 연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그 이음의 확장은 결국 자연스러운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고 그 자연스러운 공동체는 고유의 규칙과 관습과 문화를 만들어가기 때문이죠. 이 모든 걸, 우리는 역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역사가 여러 사람과 만나 더 큰 역사를 만들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 역사는 “큰 역사”, 그러니까 국가와 사회, 세계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역사와는 다릅니다. 미시사, 생활사, 민속사이고 백성과 시민의 역사죠.
당연하게도 이 작은 역사는 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요동칩니다. 거대한 강 위에 뜬 작은 쪽배와 비슷한 처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종 이 작은 역사는 큰 역사의 주인이 되기도 합니다. 본인들도 모르게 큰 역사의 일부가 되기도 하고 본인들의 의지로 큰 역사의 줄기를 바꾸기도 하죠. 역사에서 만나는 민란과 의병, 민주화 시위와 운동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독재자와 전체주의 국가에선 모든 사적 모임과 관계를 의심합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작은 독서 모임조차 감시를 했듯이 말이죠.
이런 관계와 모임의 근원엔 가족이 있습니다. 가족이 권력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면 모든 관계가 그렇게 됩니다. 관계의 학습이 시작되는 곳이 가족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파슨스의 가족과 윈스턴의 아내 캐서린을 통해 가족의 해체를 목격하게 됩니다. 분명 같이 살지만 거기 있어야 할 것이 없기에 그 가족은 “해체된 가족”이라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아무리 완곡하게 말해도 “변형된 가족”이라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감시하고 부부의 육체적 관계가 당이 원하는 출산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는 가정은 “정상”이 아닙니다. 윈스턴은 아내의 몸을 통해 소통의 불가능함을 절감합니다. 그건 비극입니다. 좌절은 만지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분명 만지고 있는 육체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전달되지 않을 때, 만짐을 당하는 사람이 아닌 만지는 사람이 좌절합니다.
조금 거칠게 요약하여 말하면, 기호학과 언어학은 기표, 즉 표현물과, 기의, 즉 표현되는 것의 관계를 일대일로 봅니다. 윈스턴의 동료인 언어학자이지 신어의 발명가(?)인 사임의 말은 이런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A라는 단어가 없으면 A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죠.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유명한 예를 들면, 이누이트족에게는 눈을 표현하는 열 개가 넘는다는 말이 있죠. 눈의 종류가 많으니 당연합니다. 반면 사막에 사는 사람에겐 모래와 관련한 단어가 많겠죠.
그렇다고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사라졌다고 해서 단어까지 사라지진 않습니다. 기록으로 보존을 하기 때문이죠. 민속학자들과 인류학자들, 그리고 언어학자들은 이 순간에도 사라지는 언어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채록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어느 한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도 어떤 형태로든 언어는 남을 수 있습니다. 결국, 소설 속 사임의 주장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렇습니다. 기억도 없애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걸 지칭하는 단어와 함께 그것에 대한 “기억”도 삭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삭제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아예 없었던 것으로,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던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우스갯소리로 “있었는데 없습니다.”가 아니라 “없어서 없습니다.”이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부부는 사랑으로 맺어진 적이 역사상 한 번도 없어야 <기억 전달자>와 <1984>의 부부 관계가 수용됩니다. 당연하게도 자녀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전달자>에서 아이까지 “배당”해줬던 것은 가족을 아주 안정적인 사회의 기초 단위로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도, 갈등도, 사춘기도, 부부 갈등도 없는 “늘 같은 상태”의 가족이 “늘 같은 상태”의 사회의 기초 단위가 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1984>에서도 기록과 기억, 역사와 감정이 없는 가족만이 그런 제국의 기초 단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윈스턴이 중대한 반역자인 또 다른 이유는 기억을 더듬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특정 사물에 대한 기억과 자신의 기억은 물론이고 2절과 후렴을 모르는 옛 동요의 가사도 끊임없이 떠올리려 하고, 심지어 알법한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빅브라더와 내부당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없는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 “없었던 것”의 “있었던 흔적”을 쫓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위험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을 바꿔 끼워야 합니다. 마치 컴퓨터의 하드를 바꿔 끼는 것처럼, 휴대폰의 유심침을 바꿔 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때문에 기억하지 말아야 할 기억을 가둡니다. 밀봉합니다. 묻어버립니다. 질시사 시킵니다. 이중기억이라는 단어가 그 표현이 주는 어감 이상으로, 인간에게 참혹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잊고 살면 살아진다는 말을, 어른들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걸 잊고 살고 살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의 어른들에겐 결국 “한”이 남았습니다. “한”이라는 단어는 “없었던 것”처럼 사는 것의 불가능함의 증거입니다. 유명한 노래 가사처럼 살면 살아질 수는 있지만 그 기억까지 없는 것처럼 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불가능함을 제국과 당은 공식화했습니다. 사라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기에 그리워해서도 안 됩니다. 기록이 없다는 건 묘도, 묘비도 없다는 것이며 당연히 추모의 날과 공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당연히 추모, 그 자체를 용납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또한 인간에게 참혹한 강요입니다.
그러나 근현대사에선 실제로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글을 준비하면서 아주 오랜만에 코스타 가브라스라는 영화감독을 “기억” 속에서 소환해 냈습니다. 그는 <Z>, <계엄령>, <의문의 실종> 같은 영화에서 폭압적인 시대에 사라진 사람, 혹은 사라진 진실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다룬 영화는 특히 남미를 배경으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70년대 중후반, 심지어 80년대 까지도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남미에선 이런 실종을 스페인어로 “데사파레시도스(Desaparecidos)”라고 합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선 1976년에 1983년 사이, 군사 독재 정권이 <국가 재편성 과정>이라는 미명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구금했으며 심지어 살해했습니다. 그 숫자조차 명확하지 않아서 적게는 1만 5천 명, 많게는 3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죠. 칠레에서는 악명 높았던 피노체트 독재 정권 시절에 약 3,200명 이상의 처형 및 실종자가 발생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부터 79년 까지,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이 대규모 학살을 벌였습니다. 이때, 후에 추산한 바로는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150만 명에서 3백만 명의 국민이 처형, 굶주림, 강제 노동으로 사망했는데, 대부분은 지식인, 도시인, 종교인이었습니다. 후에 이 사건은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1966년부터 1976년, 모택동이 죽기까지 중국에서는 문화 대혁명이라는 명목 아래 수백만에서 수천만명의 국민이 죽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설과 영화 <삼체>의 발단으로 사용되어 최근 재조명되기도 했죠. 이외에도 1992년의 보스니아 내전, 비슷한 시기의 르완다 내전 등에서도 종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사라졌습니다. 1948년에 집필된 이 소설의 내용은 불과 십여 년 뒤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했습니다. <1984>가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오브라이언의 말은 맞습니다. 신념을 지닌 채 죽은 사람은 혁명의 도화선이 되고 종교적 부흥의 밀알이 됩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 대부분은 순교했는데, 그 결과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됐습니다. 열사나 의사의 죽음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열기를 들불로 만드는 기폭제가 됩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름과 신념을 갖고 죽은 사람은 산 자의 기억에 남습니다. 산 자는 살아남은 자의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죠.
심지어 채무 의식을 갖기도 합니다. 선생님보다 더 젊은 세대는 어떤지 모르지만 선생님 세대의 일부는 우리 앞의 세대, 선배 세대에 대한 묘한 채무 의식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죠.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비로소 도래한 것은 1987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1989년에나 됐죠. 선생님 또래는 1991년, 혹은 92년에 대학을 갔습니다. 선생님은 또래보다 더 늦게, 95년에서야 대학을 갔죠. 그때는 이미 화염병도, 최루탄도 없었습니다. 운동권도 찾아보기 힘들었죠. 마르크스의 책은 금서 목록에서 빠졌고, 아예 금서라는 말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대신, 문화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유럽의 이론들이 파도처럼 들어왔습니다. 선생님은 그 수혜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이 땅에 민주화가 꽃피우기 위해 선생님이 한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X 세대라 불리며 학문과 문화와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향유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 당시 운동권 출신들이 정치인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서 종종 한심한 말을 하고 어이없는 짓을 해도 욕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힘듭니다.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처럼 나는 시대와 나라를 위해 뜨거웠던 적이 있는지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념을 가진 사람의 고통을 전시하고 이들의 죽음을 광장에서 행하는 것은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고문을 하여 이것저것 자백하게 하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 운동권 선배들이 그랬듯 대부분은 폭력과 고통에 굴복하기에 살아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권력자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바꿔 내보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배신도, 변절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사람 자체를 아예 바꿔버리는 겁니다. 단어를 삭제하고 바꿔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 역할을 101호가 합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곳의 역할은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윈스턴이 오브라이언을 향해 끝까지 반문하는 것에 감동했습니다. 일말의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는 그인 채로 나가겠구나, 하고 말이죠. 잠시 무난한 수감 생활이 이어질 때는 그 기대가 더 커졌습니다. 잠시 101호를 잊고 있었던 겁니다.
윈스턴은 101호에서 단숨에, 단박에 무너졌습니다. 쥐 한 마리에 속절없이 무너졌습니다. 그가 쥐에 대한 공포를 고백한 건 딱 한 번이었습니다. 줄리아와 은신처에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쥐야. (민음사 판본 P.202)”라고 말한 뒤 연이어 악몽처럼 그 공포를 묘사할 때입니다. 그 뒤로 화제는 바뀌었고 이야기는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텔레 스크린을 통해 윈스턴의 말과 표정을 본 당과 오브라이언은 확신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를 바꿀 수 있겠다고.
공포는 사랑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감정 중 하나입니다. 어떤 동물에게도 공포는 없습니다. 공포는 일어나지 않은 일, 마주하지 않은 대상을 상상하는 힘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힘은 과거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그 경험은 저장되어 종종 같은 사물, 동물, 혹은 상황이 발생할 때 소환됩니다. 그때와 다른 상황, 다른 나이의, 어찌 보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이 됐지만, 그 공포는 여전히 어제의 나를 그렇게 했듯, 오늘의 나를 움직입니다. 그 어쩔 수 없는 반응은 재채기처럼 터져 나오기에 막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한 번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프롤(무산계급)의 동네를 배회할 때도,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윈스턴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감시당해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가장 인간적인 반응인 공포가 한 사람의 사람다움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 이 부분의 역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한결같은 전체주의 국가, 사적인 감정과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에서 가장 사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뿌리에서부터 무너뜨린다는 것이, 101호의 무서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84>를 읽은 중학생 대부분이, 누워 있는 줄리아 앞에서 윈스턴이 “그 책”을 읽는 부분을 어려워하고 지겨워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조지 오웰이 당시의 세상을 향해 보내는 길고 긴, 아주 차가운 냉소입니다. 얼핏 읽으면 사회주의, 공산주의, 전체주의 국가와 정치 시스템만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행간을 더 들여다보면 조지 오웰의 비판과 독설은 좌와 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할 것 없이 당시 사회 전체를 향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전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떠올렸습니다. 몇 구절 옮겨보겠습니다. 그 유명한 첫 구절입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황광우 외, <레즈를 위하여 : 새롭게 읽는 공산당 선언, P.273)”, 이어지는 구절 역시, “그 책”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P.274)”, 이 구절이 있는 1장의 제목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입니다. “그 책”에서도 계급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죠.
재미있는 건 에리히 프롬이 <희망의 혁명>의 첫 구절로,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을 패러디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인용해 보겠습니다. “우리 한가운데서 망령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그 망령을 똑똑히 바라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오래된 유령이 아니다. 컴퓨터의 지휘 아래 최대의 물질적 생산과 소비에 온 힘을 쏟아붓는 완전 기계화 사회라는 망령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과정 속에서 인간 자신은 기계의 한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에리히 프롬, <희망의 혁명>, P.19)”
두 책과 구절 때문인지, 조지 오웰의 “프롤(무산계급)”에 대한 묘사는 에리히 프롬의 <희망의 혁명>과 <소유냐 존재냐>를 떠오르게 합니다. 두 책이 각각 1968년과 1976년에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조지 오웰의 소설이 예언서처럼 읽히는 것이 당연합니다. 작가는 “프롤”에게 희망이 있다고 얘기했는데, 그 행간을 들여다보면 그 희망의 증거는 없습니다. “프롤”들은 축구와 맥주, 가벼운 오락, 복권 등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지내죠. 이런 이유로 저 대사가 그들의 생활 태도와 문화에 대한 냉소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묘사는 사실 산업 혁명 이후 영국 사회 전반, 넓게는 유럽과 미국에 새롭게 등장하고 형성된 소위 “대중”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고향 땅을 떠나 런던, 리버풀, 맨체스터와 같은 메트로폴리스로 온 노동자들은 적게나마 소유하게 된 임금과 짧게나마 주어진 휴일을 사용할 방법과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들을 위해 스포츠와 가십을 주로 다루는 페니 프레스(황색 저널)가 등장했고 싸구려 종이로 만들어지는 탐정소설과 연애소설이 주를 이루는 페이퍼 백 시장이 성장했습니다. 영화 산업과 프로스포츠가 성장했으며 복권과 경마와 같은 사행 산업도 성장했죠.
이 과정에서 노동자로 대변되는 “대중”은 선동의 대상이자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르테가 이 가제트의 <대중의 반역>, 가브리엘 타르드의 <여론과 군중>, 귀스타브 르봉의 <군중심리> 등의 저서에는 당시 대중에 대한 이러한 우려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되어 전체주의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도 했죠.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그 전체주의와 독재자에 빠지게 된 대중의 심리를 추적합니다.
전, 책에 담긴 “프롤”을 향한 기대가 진짜 작가의 본심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신, 오히려 윈스턴의 순수함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닐까요? 일기장에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라고 세 번을 썼고, 골드스타인과 형제단의 실존을 믿으며 경직된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미각과 성적인 쾌락, 그 자체의 추구에서 사람다움을 찾으려 했던 그의 순수함을 말이죠.
그래서일까요? 이야기의 끝은 암담한 결말입니다. 빅 브라더를 사랑해 왔다는 깨달음 속에 눈물을 흘리며 끝납니다. 이후, <신어의 원리>가 나옵니다. 학생들 중엔 이 <부록>이 출판사가 쓴 부록이라고 생각하여 아예 안 읽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제가 읽은 판본은 새움출판사 판본으로 신어의 원리를 부록이 아니라 보유(補遺)라고 표현합니다. “빠진 것을 채워 보탬, 혹은 그런 것”이라는 뜻으로, 서적과 영화의 경우, “누락된 부분이 보유된 수정판”과 같은 표현으로 쓸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APPENDIX인데, 부록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보조자료, 추가 자료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경우엔 “채워 보탠”다는 뜻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새움 출판사 판본의 <역자의 말>엔 이 소설의 미국 출판 전에, “신어의 원리”를 두고 벌어진 미국 북 클럽과 조지 오웰 사이의 실랑이를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야기와 신어의 원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현존하는 미국 소설가 토마스 핀천의 해석도 곁들였죠. 그 논지는 명확합니다. 영어로 과거시제로 쓰인 <신어의 원리>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1984>의 의미는 달라진다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면, <신어의 원리>를 현재형(민음사 판본의 경우)으로 번역하면서 “부록”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설명서처럼 읽힙니다. 청소기나 스마트 폰의 설명서처럼 말이죠. 반면 과거 시제로 읽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진 어떤 언어에 대한 해설서처럼 읽힙니다. 이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언어에 대한 언어학자의 해설처럼 말이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신어의 완성 시점은 2050년이었습니다. 소설의 시점은 1984년이죠. 그 사이, 언제, 어디에선가 그 작업은 멈췄습니다. <신어의 원리>를 읽어보면 알 수 있죠. 제국이 지속됐다면 멈췄을 리가 없습니다. 세 개의 제국은 언제, 어떤 이유로 해체됐다고 봐야 합니다. “그 책”의 논리대로라면 하나의 제국이라도 존재한다면 세계는 그 제국의 힘으로 재편되어 그 손아귀에서 놀아날 테니까요. 제국이 흩어졌다면, 그러니까 과거 소련이나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처럼 해체됐다면 그 이유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당연히 단서는 없습니다. 이야기와 <신어의 원리> 사이에 공백만 있을 뿐입니다. 그 공백은 우리의 상상으로, 희망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미치코 가쿠타니의 <서평가의 독서법> 속에는 미국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링컨과 마틴 루터 킹의 연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와 같은 논픽션 및 기록물과 함께 <허클베리 핀>,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같은 소설이 대표적이죠. 이들 책의 서평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저자의 메시지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을 버락 오바마의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의 서평에서 뚜렷이 확인됩니다. 그녀가 직접 인용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 흑인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운동가들이 몽고메리와 셀마 사이의 행진 행사 50주년 기념 연설의 인용입니다. “셀마는 ‘미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믿음, 우리는 자기비판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믿음, 이어지는 각 세대가 우리의 불완전함을 보면서 이 나라를 우리의 가장 높은 이상에 더욱 가깝게 재건하는 일이 우리의 힘에 달렸다고 다짐할 수 있다는 믿음’의 표명이라고 주장했다.”
미국만 그럴까요? 미국만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국가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건 아무리 길게 잡아도 반세기가 안 됩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받아들인 건 소련이 해체된 1990년 전후입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제법 긴 프랑스조차 극우 세력의 득세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고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민주주의의 깃발이 보이지 않거나 자주 꺾입니다. 자본주의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치환한다면, 이 경제 시스템은 불과 몇 초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인류가 현재도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자본주의를 향해 갖은 애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실패와 오류를 보면서 좌절과 냉소를 하는 것은 쉽습니다. 등을 돌린 채 외면하는 것도 쉽습니다. 반면 더 나은 나라,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믿고 비판하고 행동하고 의지와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 것 같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나라도 그대로인 것 같으며 내 삶도 여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84년과 2050년 사이의 간극을.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변화의 가능성을 믿고 뭔가를 했기에, 그 누군가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기에, 그 여러 명이 유대와 연대했기에, 그 유대와 연대를 통해 행동을 했기에, 저 시간의 어딘가에서 변화의 변곡점이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1984>를 통해 조지 오웰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지지 않기 위해 글을 써라. 그날을 기다리며 글을 써라. 생각하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응시하라.'
이 어려운 책을, 저와 함께 읽어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