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을 채운 독서 레터 05
책에 헌사된 책은 많습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탑>과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이어서, 얼마 전에 읽은 미치코 가쿠타니의 <서평가의 독서법>, 소피 카사뉴 브루케의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뒤마 클럽>,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 소설을 읽는 노인>이 생각이 납니다. 영화도 몇 편 생각나는군요. 원작 소설이 있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도 있고, 서점이 주요 배경인 <북샵>도 생각납니다. <굿 윌 헌팅>의 주인공의 집에 책만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 영화도 책에 바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화씨 451> 또한 책이 소재이자 주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소설로, 1953년에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사랑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특히 미국 청소년들이 학교 과제로 에세이가 나왔을 때 선택하는 인기도서 중 하나죠. 또, <기억전달자>, <멋진 신세계>, <1984>와 함께 디스토피아 문학의 걸작 중 하나로 분류되기도 하죠. 선생님 또한 이런 성격과 명성을 익히 알고 있어, 읽어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목록에 넣었고 함께 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작품의 명성은 허명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대중적인 명성이 책의 진가를 약간은 가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명성과 소문이 다 담아내지 못한 소설의 의미를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SF 소설과 영화는 일종의 예언서입니다. 물론 <듄>처럼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진 소설은 제외하고 말이죠. 현존하고 있는 나라와 이 지구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고 주 무대 또한 그렇다면, 작가는 지금의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많은 SF 작품에서 예언을 보게 되는 것이죠. 후대 사람들의 놀라움과 해석을 기다리며 작품 속 곳곳에 숨어 있었던 예언을 찾아보겠습니다.
우선은 숏폼 콘텐츠 시대의 예언이 담겨 있습니다. 소설 초반부, 왜 책을 태우기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로 인해 책이 축약되고 요약되며, 심지어 삭제되기 시작한 역사에 대해 말합니다. 요약과 축약은 그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요약은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소설의 경우 줄거리 위주로 재구성하는 것을 요약으로 보면 됩니다. 반면 축약은 저자의 후기에도 나와 있듯이 물리적 부피를 줄이는 것입니다. 출판사나 편집자가 임의로 판단하여 단어 등을 빼거나 줄이는 것이죠.
때에 따라선 축약과 요약이 필요합니다. 특히 요약의 경우, 문해력이 약한 초등학생들을 위해 인문 서적과 고전 소설 등이 아동용으로 요약되는 경우는 흔합니다. 심지어 최근에 우리가 함께 읽은 <데미안> 같은 소설도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책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경우, 훗날 원작을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소설의 요약본과 축약본의 경우 줄거리 전달에 중점을 뒀기에 원작을 읽으며 문장을 음미하고 행간을 읽으며 줄거리 너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작가가 후기에 직접 밝혔듯이 주인공의 긴 독백 속에 작가의 의미가 풍성히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 말은 결국, 축약본과 요약본은 맥락과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더불어 요약 불가능한 시의 경우엔 아예 삭제의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는 말도 되죠.
사실 축약과 요약으로 인해 가장 위기를 맞은 분야는 영화와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 분야입니다. 영화를 요약하여 해설하는 유튜브 콘텐츠의 경우, 전체를 보지 않아도 다 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잘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가 있습니다. 줄거리 전개에 꼭 필요한 장면과 대사만 발췌하여 구성하기에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 즉 Scene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죠. 대략 두 시간 분량의 상업 영화의 경우, 대략 100에서 120 Scene이 들어갑니다. 이걸 십 분 분량으로 줄이면 당연히 Scene도 1/20로 줄겠죠.
그러니 당연히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풍성한 의미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중요한 건 줄거리가 있는 영화는 그나마 줄일 수 있지만 줄거리보다는 아름다운 영상과 긴 대사를 통해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와 의미를 전달하려는 예술 영화의 경우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영화 시장은 어떻게 될까요? 요약되지 않는 영화, 서사가 없는 영화는 생산이 줄어들고, 종국에는 사라지게 됩니다. 책이 불태워지듯이 말이죠.
재미만 추구하는 이들은 자극을 추구합니다. 이들을 위해 뻔한 이야기만 제공됩니다. 뻔한 이야기는 현란한 장면과 말초적인 설정으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립니다. 이미 단순해진 대중은 쉽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쉽게 흥분하고 쉽게 가라앉습니다. 영화는 서사와 의미가 담긴 Scene이 줄어드는 대신 자극적인 컷으로 채워집니다. 작가가 인터뷰에서 예를 들었듯이 컷의 시간을 극도로 줄여서 관객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죠. 책 또한 베스트셀러만 남게 됩니다. 모국어로 쓰인 책은 쉬운 표현으로만 써지고 번역본 또한 쉬운 번역본만 남게 됩니다. 결국 평균 범주를 벗어나는 책,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없는 책들은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두꺼운 책, 복잡한 책, 어려운 책을, 그 내용은 쉽게, 분량은 얇고 가볍게 만들다 보면 앞서 말한 예술 영화와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쉽고 가볍고 얇은 책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작가가 남긴 두 번째 예언입니다. 결국 각 분야에서 대중화와 균일화가 발생합니다. 사전 지식이 필요한 수준 및 영역의 도서와 예술은 사라지고 즉각적으로 쾌감을 주는 것들만 남게 되는 것이죠. 이 상황이 악화되면 소위 고급문화, 엘리트 문화로 분류되는 것들이 소외당하고 차별받게 됩니다. 그 차별은 우선 시장에서 시작됩니다. 많이 팔리는 제품에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이 팔릴만한 제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팔리지 않는 책과 영화와 음악, 그 외 대부분의 고급 예술 및 문화 콘텐츠는 소수자가 되고, 결국엔 사라지게 됩니다.
그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유와 성찰, 진지한 비판적 사고입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진지충”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진지충”은 대화, 또는 의견을 주고받을 때 진지하게 임하는 상대를 낮춰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이죠. 물론 매사에 진지한 것은 문제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의사결정이 늦어질 수도 있고 매사에 긴장도가 높을 수도 있죠. 하지만 진지함,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존중이자 나와 타자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진지(眞摯)는 말이나 태도가 참되고 진실하다는 의미로 참 진자에 잡을 지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말 그대로 참된 것을 손아귀에 잡고 있다는 뜻이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참되지 않은 것, 진실하지 않은 것을 가려내야 하고, 가려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며, 그 능력은 결국 생각하는 힘에 기인합니다. 그 힘이 세상을 향할 때 사유라 할 수 있고, 그 힘이 자신을 향할 때 성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생각이 없으면 나와 세상을 제대로 판단할 수 없고, 그 판단이 없으면 당연하게도 진지함을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 성취가 실패한 공간엔 진짜를 닮은 거짓이, 진짜를 닮은 자극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 결과, 그 후에 닥쳐올 미래는 더 암담합니다. 소설에 나오듯이 사람들은 획일화됩니다.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에도 나오듯이 귀에 편한 음악, 생각할 필요가 없는 책들에 적응된 사람들은 상호 간 차이가 없어집니다. 의미가 차이에서 발생한다는 걸 감안하면, 사람들은 겉모습을 제외하곤 다 같아지는 것이죠. 이렇게 차이가 없는 사람들, 예외적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대중과 사회는 통치자가 가장 바라는 바입니다. 진실의 유무를 가리는 노력 없이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결과 사람들은 선동당하기 쉬운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엔 독재와 전체주의의 위협이 발생합니다.
이 예언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미국이라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국가에서 각기 다른 다양성을 자신의 개성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가꾸어 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다양성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 자유와 평등이라는 민주주주의 기본 원칙 위에 성립되고 수용됩니다. 특히 존엄성이라는 가치는 절대적이죠. 또 자유는 알 권리와 함께 표현의 자유로 연결되고 직업 선택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 행복 추구권 등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두 가지 가치는 각자를 평등한 존재로 그 위상을 정립시킵니다.
이런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정치인의 선언을 하나 꼽으라면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있습니다. 옮겨 보겠습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회의 평등을 종종, 결과의 평등으로 오해합니다. 과정의 공정 또한 그렇게 오인하죠. 정의로운 결과는 모두에게 같은 결과가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들인 수고에 맞는 결과를 의미하죠. 그러나 종종 다양성을 앞세운,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자기 몫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역사적 소외를 앞세워 오늘을 사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혜택을 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백인 남자가 주연을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흑인이나 동양인, 여자가 주인공을 해야 한다고 주합니다. 육식을 먹는 장면이 너무 많으니 채식주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극렬한 환경주의자들은 도로를 막고 시위를 하기도 하고 맥도널드에서 시위를 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수십 년 전에 나온 소설과 영화의 내용과 주인공을 문제 삼고, 그 작가와 감독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결국, 오늘날, 대중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기업들은 이 다양한 주장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창작자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작자들 또한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죠. 그 어떤 검열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자기 검열입니다.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모든 작품이 유사해집니다. 원만해집니다. 무난해집니다. 불편한 부분은 삭제되고 날카로운 부분은 다듬어집니다. 갈등은 줄어들고 서사는 완만해집니다. 당연히 캐릭터는 평범해지고 서사적 재미는 사라집니다. 이제 재미는 시각적 자극 차원에서만 제공됩니다. 가상의 나라, 가상의 괴물, 가상의 공간에서의 투쟁과 서사로 제공됩니다. 무거운 역사적 현실은 다루기 어려운 소재가 되어버렸고 남녀의 사랑은 딱 보기 좋을 때까지만 다뤄지게 됩니다. 사회 비판이나 종교적 문제는 금기시됩니다. 일종의 소프트한 전체주의적 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다양한 콘텐츠는 자유로운 상상과 깊은 생각으로부터 나옵니다. 이것들은 세상에 풍성한 의미를 전달하고 사람들은 나름의 의미를 포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삶의 의미는 그렇게 밖에서 주체로, 주체에서 밖으로 들고 나며 끊임없이 순환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타자, 공동체와 사회를 성장시키고 변화시키게 됩니다. 즉 의미 있는 존재가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들고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가 주체에게 의미를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죠. 반대로 물질과 자본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주체와 사회는 쌍방에게 그것을 무한 제공하면서 주체와 사회의 의미를 끊임없이 사물화 합니다. 그야말로 물신적인 세상인 것이죠.
책을 대하는 태도도 이렇게 극명하게 갈립니다. 작품으로 들어가 보죠. 주인공 몬태그는 의미가 사라진 일상과 종일 벽면의 TV에 매달려 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실종된 그 “뭔가”를 찾기 위해 책을 읽자고 합니다. 숨겨 놨던 책을 쏟아 놓은 뒤, “우린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이렇게 혼란에 빠진 우리, 당신과 수면제와 차, 그리고 내 일을 해결해야 한단 말이야.”라고, 아내인 밀드레드에게 호소하며 함께 책을 읽자고 합니다. 반면, 몬태그의 상사인 서장 비티는 책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후 책을 읽지 않고 있습니다. 책을 사랑하고 읽었던, 그래서 지금도 수천 권 이상 갖고 있으면서도 그 책을 읽지 않고 있죠. 그가 책을 읽는 세월 동안 그 나름, 인생의 파도를 겪었고, 그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내는 동안 책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책을 태우는 건, 일종의 복수인 셈이죠. 또, 수천, 수만 권의 책을 고이 모셔놓기만 하는 것도 복수이고요. 사라지는 책만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고 펼쳐지지 않는 책도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죠.
이 상반되는 두 사람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공 몬태그가 막바지에 만난 사람들은 각자가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책 한 권을, 누군가는 어느 책의 어느 장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곳곳에 흩어져서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죠. “표지만 보고 책을 평가해선 안 된다오.”라고 했던, 그 무리 중 한 명인 그레인저의 말처럼 머릿속에 책 한 권을 간직한 채 조용히 살고 있었죠. ‘난 인류를 위해 책을 저장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이야.’와 같은 자각이나 으스댐도 없습니다. 그저 도서관에 꽂힌 수많은 낡은 책들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죠. 언젠간 다시 도래할 시대의 손길을, 문명의 부활을, 갈망의 시선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전 몬태그, 비티, 두 사람 모두에게 공감을 하며 이 책의 후반부를 읽었습니다. 책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책 안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람, 둘 모두에게 말이죠. 우린, 엄밀히 말하면, 책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을 말릴 필요도 없지만, 책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람과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이 저마다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안을 채워나가는 것은 본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읽힐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라면 모두에게 공감받을 의미 같은 건, 혹은 인상을 남길만한 의미 같은 건 넣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선택이기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반면, 자신의 삶이 역사의 한 점, 혹은 티끌 같은 역할을 하고, 문명의 길고 긴 사슬에서 하나의 고리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책임과 운명을 예감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좋은 삶”, “더 나은 삶”, “더 나은 우리”를 찾아 책을 들춰 볼 테고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필요한 답을 간직한 존재이고자 할 것입니다.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선택이기에 존중받아야 합니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 몬태그의 마음을 흔든 건 책과 함께 죽기를 자처한 한 여자의 결연함과 의연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념의 표현이었죠. 의미가 상실된 시대, 신념이 사라진 시대에 그 사건은 일종의 서늘한 삶의 진실을, 인류와 역사의 진실을 웅변하고 있었고 그 웅변은 주인공의 마음을 흔들었죠. 물론 다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죠.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고 말했던 예수의 말은 물리적 귀가 아닌 마음의 귀를 말한 것입니다.
책을 외우는 사람들은 신념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자 인류가 자신에게 부여한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역사의 체인에서 단 하나의 고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주변인의 삶, 쫓기는 삶, 외부인의 삶을 받아들인 것이죠. 그래서 신념은 주체의 인식, 즉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확한 자기 인식은 외부와의 상호작용, 타자와 공동체, 더 나아가 보이지 않는 역사와 미래와의 상호작용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기억은 물리적 존재, 육체적 존재로서의 주체가 아닌 역사적 존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주체의 의미 확보를 위한 전제 조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린 앞서 읽은 <1984>와 함께 흔히 디스토피아 3부작이라고 부르는 <기억전달자>, <멋진 신세계>가 기억과 역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억을 묻고 조작하고 없애고 가치 절하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인간이 사유하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 앞선 세대와 도래할 세대의 고리 역할을 하는 현시대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 소설들이 묻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위해서,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이 사람다운 세상이 되기 위해선 사람이 어떤 존재로 살아야만 하는지 묻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음에 읽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또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질 것입니다. 거대한 질문과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이 글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