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서 읽은 책 04
일전에 얘기했듯이 동양철학은 환갑 이후의 공부거리로 남겨 놓았다. 물론 그 나이에 서양철학에 대한 공부가 완성된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독서는 공부가 아닌 놀이와 같은 것이어서 내 독서는 맥락도, 체계도 없이 흘러왔다. 그래도 그 흐름에 나름의 줄기라는 걸 찾는다면 하나는 라캉이 중심이 된 흐름일 테고, 하나는 들뢰즈가 중심이 된 흐름, 마지막 하나는 사르트르가 중심이 된 실존주의 흐름 아닐까. 문제는 이 흐름의 기원으로 더 거슬러 올라갈 생각도, 이 흐름의 끝을 향해 더 나아갈 생각도, 현재는 없다는 것. 그저 이 흐름 덕분에 쌓인,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꾸역꾸역 읽어나갈 생각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철학의 흐름을 여기에 새로 연다는 것은 욕심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는 동양철학, 동양적인 철학이 있다면 불교와 장자다. 앞에 언급한 학자를 비롯하여 그 학자들이 소개해준 레비나스, 라이프니츠, 심지어 니체의 책을 읽다 보면 묘하게 불교와 맞닿는 지점이 느껴진다. 이거다,라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강과 바다가 맞닿는 기수지역처럼 은근히 만나고 섞이는 지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또, 같은 맥락에서 장자와 도교도 그렇고. 그래서 동양철학을 읽는다면 장자부터 읽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강신주 아닌가. 박사논문을 무려 장자로 쓴 사람이자, EBS에서 장자로 강의까지 한 사람. 게다가 서양철학에도 일가견이 있고 영화에도 조예가 있으며 말빨과 글빨이 여간내기가 아닌 사람.
장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앞서 내가 언급한 학자들이 강신주의 소개로 장자와 만나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하고 다른 이야기를 같게 한다. 장자가 말한 망각과 비움의 본뜻,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타자와의 진정한 조우, 그 이후에 가능한 참다운 사랑의 본질이 장자의 철학을 중심으로, 서양철학의 추임새와 어울리며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결국엔, 서양철학이 추구해 온, 이데아라는 말로 대표되는 본질적인 무엇, 이성과 주체라는 단어로 함축되는 일자와 유아(唯我)적 사고까지 흔들리고 의심받는다. 그것이 해체되어야 비로소 타자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니, 어찌 보면 당연한 흔들림이고, 당연한 의심이며 당연한 물러섬이다.
5월엔 아이들과 카프카의 <변신>을 읽는다. 그 느닷없는 변화에 대해 아이들은 어떻게 해석할지, 마지막의 그 잔인함 외출에 대해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모든 해석은 열려 있고 그 열려 있음은 아이들의 수만큼 다양한 해석을 가져올 것이다. 모리스 블랑슈와 신형철이 인용한 밀란 쿤데라의 카프카와 <변신>에 대한 해석은 그저 참고 사항으로 잠시 다루려 한다. 내가 적게 말하고 아이들이 더 많이 말하는 것이 좋으니, 아이들이 질문할 때만 입을 여는 선생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 책에 말하는 것처럼 내가 비워놓은 자리를 아이들이 충분하고 넉넉히 채우리라 기대하며, 5월의 연휴를 보내고 있다.
사족이라면 사족인데, 이번에도 저자 서명이 있는 책을 샀다. 2014년, 5월 31일에, 저자 강신주는 김세나라는 독자에게 친히 책 안 페이지에 서명을 남겼다. 저자의 서명이 있는 책을 산 것이, 이번이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난다. 아마 네 번째, 아님 다섯 번째 아닐까. 여하간, 이 책은 의외로 장자 철학으로 나아가는 개론서로도, 장자를 통해 서양철학의 몇몇 개념으로 나아가는 입문서로도,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삶과 사랑과 타자를 대하는 방법론으로도 읽힐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