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 안톤 체호프

by 최영훈

유명한 소설 중엔 길지 않은 것들이 있다.

앞서 썼던 카뮈의 <이방인>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도, 카프카의 <변신>도 장편이라고 하기에는 그 분량이 짧다. 단편으로 유명한 소설가도 있다. 추리소설 공장장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단편 소설을 많이 썼고, 미국의 소설 기업가라고 할 수 있는 스티븐 킹도 단편 소설의 장인이라면 장인이다. 사실 코난 도일을 비롯한 20세기 초중반에 등장한 대부분의 추리소설 작가들은 단편에 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도 빼놓을 수 없고, 레이먼드 카버도 단편 소설의 대가들을 모아 단체 사진을 찍는다면 앞줄을 차지하지 않을까?


사족 같은 얘기를 먼저 하자면...

장르 소설가와 미국 소설가들이 단편 소설에 능한 건, 그들의 데뷔가 대부분 잡지였기 때문이다. 에스콰이어, 플레이보이(이 잡지는 야하기만 한 잡지가 절대 아니다.), 뉴요커와 같은 잡지에는 내가 좋아하는 조앤 디디온과 존 맥피 같은 저널리스트의 논픽션과 함께 폴 오스터, 레이먼드 카버, 스티븐 킹과 같은 이들의 단편 소설들이 함께 실렸다. 또, 코난 도일의 단편이 인기를 끌었던 <스트랜드 매거진>도 월간지였다. 반면, 한국의 작가들의 단편은 주로 문예지에 많이 실린 후, 취합되어 단편집으로 출간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만약 우리나라 작가들이 이렇게 대중적인 잡지에 단편 소설을 실을 기회가 더 많이 생기고 그렇게 데뷔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조금 더 빨리 데뷔하고, 뭐랄까, 좀 더 빨리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게 되지 않을까? 미리 써 본 사족이다.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안톤 체호프는 이러한 단편 소설의 현대화, 현대적 단편 소설의 원형, 혹은 전형을 만든 양반이다. 이런 이유로 한 번 읽어봐야지 하다가 잊고 있었는데 학원에 대략 120권가량 비치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현재 490권 정도 출간 됐다)중에서 <체호프 단편선>이 눈에 띄었다. 단편집이 좋은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잠시 짬이 날 때 읽을 수 있다는 것이고,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서사를 끝낼 수 있기에 끊어 읽을 시 발생하는 앞장의 서사와 복잡한 인물의 이름과 사정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흠, 두 가지 장점이다. 집이나 도서관이 아닌 곳에 읽기 좋은 이유다.


사실, 첫 번째 단편이 별로면 그다음 편으로 넘어가기 쉽지 않다(그래서 스티븐 킹이 대단한 것인지도). 이 책의 첫 단편,「공포」, 기가 막히다. 오페라를 보러 간 주인공이 불쑥 재채기를 한다. 뭐,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 침이 하필 앞에 앉아 있던 높으신 양반의 머리에 떨어진다. 다른 부서의 높은 양반이지만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 바로 그 자리에서 사과한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 않다. 사과를 안 받아 준 것 같다. 로비에서 다시 한다. 받아준다. 찝찝하다. 결국 다음 날 사무실까지 찾아간다. 사과 한마디를 하기 위해 민원인들의 줄에 끼여 기다린다. 높은 양반, 약간 불편하다. 사과의 도가 지나쳐서 희롱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까? 주인공은 불안하여 사과를 반복하고 높으신 양반은 이 과한 사과가 불편하여........ 결국 제대로, 버럭 화를 내버리고, 주인공은 그 순간 충격을 받아, 비틀비틀, 겨우겨우 집에 와....... 죽어 버린다.


이 극적인 이야기 뒤에 이어지는 소설들도 당연하게도 드라마틱하다. 훌륭한 인품과 학문적 역량이 있던 남편을 재미도 없는 그저 그런 남자로 취급하여 예술가들과 불륜을 저지르다, 갑자기 찾아온 남편의 죽음 후 자신의 과오를 돌아보는「베짱이」, 자신의 희곡을 읽어봐 달라는 무명작가의 낭독을 들어주다가 결국엔 그 작가를 죽여버리고 마는「드라마」, 한 여자의 고백을 받았으나 한순간의 실수로 연애를 시작도 못 해보는「베로치카」, 아름다운 여성에 대한 탐미적 묘사가 독 보이는「미녀」, 카프카의 <시골 의사>가 연상되는「거울」, 빌딩 외벽을 한 바퀴 도는 내기를 하는 스티븐 킹의 <The Ledge>가 떠오르는「내기」, 아끼던 사람의 죽음을 실감하기 전, 회복된 자신의 욕구를 먼저 자각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담긴「티푸스」, 지위에서 오는 권위와 그로 인해 타인의 압박,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는「주교」까지.


길고 긴 러시아식 이름과 당시에는 치명적이었기에 극적인 사건으로 사용되는 티푸스라는 병, 그리고 자동차 대신 등장하는 마차를 제외하면, 현대적이고 심지어 대중적이기까지 하다. 다들 조상으로 모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레이먼드 카버의 <풋내기들>과 <대성당>을 샀다. <대성당>은 그전에 두 번이나 읽었지만 산 건 처음이고, <풋내기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편집자가 난도질하기 전의 원본이니 읽어봤다면 읽어본 것이지만, 이 역시 궁금해서 샀다. 이 외에도 세계의 대중적인 작가들이 참여한 몇 개의 단편집을 구매했거나 구매 목록에 있다.


가끔,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단편 소설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좀 넣어두시라. 관심이 있는 작가가 있다면 단편, 혹은 중편, 또는 단편집을 먼저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유명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도 단편집이 들어가 있다. 카프카, 체호프, 헤밍웨이 등등. 그러니 고전의 무게가 두렵다면, 고전 단편부터 출발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