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움가트너 - 폴 오스터

베란다에서 읽은 책 02

by 최영훈

누구에게나 청춘을 함께 보낸 작가가 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시절, 그 작가가 한두 명 존재한다. 나에겐 폴 오스터가 그런 작가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있고, 김훈도 있지만 “나만” 좋아한다고 착각하며 “나만”의 작가라고 오랫동안 생각하며 아꼈던 작가는 폴 오스터다.


<기록실로의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이 이후의 작품들은 읽지 않았다. 거의 이십여 년 간 폴 오스터의 신작을 읽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다, 재작년, 2024년에 그의 별세 소식을 알게 됐다. 찾아보니 이 맘 때쯤이다. 4월 30일.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다.


회상, 현재, 시작되는 이야기

1947년생인 그가 77세에 죽었으니,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바움가트너의 나이와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바움가트너는 철학자로 메를로 퐁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대학교수, 아내는 10년 전, 인근 케이프코드의 바다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다가 강한 파도에 맞아 허리가 부러져 죽었다. 그 이후, 준비되지 않았던 이별 이후, 바움가트너는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의 시간을 보낸다. 환지통 같은 시간들을.


250페이지도 안 되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이야기가 겹쳐진다. 두 사람의 만남과 연애 이야기, 아내인 애나의 유작들, 아내 쪽 가문의 이야기, 그리고 가장 흥미로운 바움가트너 집안의 미국 정착기, 그리고 바움가트너 새로운 사랑에 대한 도전, 마지막으로, 멀리서 찾아오는, 아내 애나의 작품을 박사 논문의 주제로 삼은 대학원생과의 소통까지. 아니, 진짜 마지막으로, 소설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그래서 열린 결말로 만들어버리는 우연히 나간 도로에서의 사소한 사고까지.


역사의 기록, 개인의 기억

폴 오스터의 소설을 왜 좋아했었는지, 생각해 봤다. 사소한 것들이다. 흔한 사람들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도시고, 사람이고, 사연이며 사랑이다. 그러나, 또, 고유하다. 한 사람 안에 온 가문의 역사가 응집되어 있고 한 가족 안에 한 나라의 현대사가 농축되어 있으며 지금 막 태어난 아기의 움켜쥔 손안에 이 세계의 미래와 운명이 숨겨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어느 날 느닷없이 엄청난 천부적 재능을 발견하거나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통로를 발견하거나 급작스레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폴 오스터의 주인공들은 흔한 존재로 살면서 특별한 가치를 발견한다. 물론, 그 덕분에 아주 환상적인 모험을 하게 되지만.


이 소설은 조금 결이 다르다. 오랜 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거리긴 하지만, 분명 이전의 그의 작품과는 다른 여운을 남긴다. 분명, 이전의 작품들은, 뭐랄까, 현재 진행형의 느낌이었다. 주인공이 사건을 만나서 인생이 달라지거나 우연한 선택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경로로 접어들거나,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전에 볼 수 없었던 애잔함이랄까, 애상이라고나 할까, 회상을 한 뒤 현재로 돌아오긴 하지만 그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는 이야기였다. “자,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느낌.


바움가트너가 할아버지의 고향인 우크라이나의 어느 마을을 찾아간 에피소드는 폴 오스터의 세계관을 압축하고 있다. 누가 지배하느냐에 따라 계속 이름이 바뀌었던 이바노프란키우스크라는 도시가 스타니슬라프였던 시절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 지역의 향토사학자가 들려준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도시에 살던 유대인들이 떠났다. 또, 그 이후, 전쟁의 포화를 피해 다른 주민들도 떠났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성공 이후인 1944년 7월, 소련군이 이 마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맞이했던 건 사람 대신 그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던 수백 마리의 이리 때였다. 그런 이야기다. 문제는 기록이 없다. 당시에 찍힌 사진에도 이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향토 사학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다고.


기억과 인생에 바치는 헌사

전해줄 이야기가 없다. 아니 거의 하지 않았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해서, 그 조상에 대해서, 난 딸에게 거의 말을 해주지 않았다. 좀 커서, 아이가 물은 뒤에야 약간의, 기본적인 정보만 얘기해 줬을 뿐이다. 기억할만한 것이 없어서 얘기해 준 것이 없었을 뿐이다. 가족과 개인의 역사는 기록이 아니라 기억으로 형성되기에 객관적인 역사와 어긋나곤 한다. 사회와 나라, 심지어 민족의 역사가 남긴 “기록”이 가족이 후대에 남긴 “기억”과 다를 때, 우리는 때론 “기억”의 손을 들어줘야 할 때가 있다. 기록은 때론, “승자의 기록”, “살아남은 자의 기록”인 경우가 많아서 “패자와 죽은 자”의 기록은 누락되곤 하므로, 그 패자와 죽은 자의 후손들의 기억과는 종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은 거시적이어서 미시적인 기억을 누락시키곤 하기에 실핏줄 같은 개인의 기억들이 역사의 “신체”에 피를 돌게 하기도 하므로.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은 폴 오스터가 모든 개인과 그 개인의 기억에 보내는 일종의 헌사일지도. 많은 사람을 기억하는 만큼 그 기억을 남긴 이들이 떠날 때마다 우리는 아파하겠지만 그 상실과 아픔의 기억조차 내 인생을 만드는 역사이니, 죽는 날까지 우리는 인연을 이어가야만 한다고,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거 아닐까. 일흔이 넘어서도 용기를 내어 청혼을 하고, 900킬로미터를 운전하고 오는 여자 대학원생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수리하고, 결국엔 작은 교통사고를 겪은 후 좀 전에 지나쳤던 어느 작은 시골집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한 거 아닐까. 그 문 뒤에 있는 사람과, 또 어떤 역사가 이어질지, 독자의 상상의 몫으로 남긴 채.


딸의 시험 기간을 앞둔 주말에는 집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서재를 딸이 차지하고 있어서, 베란다에서 책을 읽었다. 딸은 이 봄날을 어떻게 기억할까. 오늘 같이 날씨 좋은 월요일, 시험을 보는 딸의 기분은 어떨까? 시험이 끝나면 읽고 싶은 책이 많다고 했다. 딸은 뭐부터 읽을까? 언젠간, 폴 오스터도 읽어주길, 초등학교 1학년 때, 독감이 걸려,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때 자기의 병상 곁을 지키던 아빠가 읽던 책이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임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