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일하시는 때
예전에 어떤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다. 자기 인생을 위하여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중이라면 아직 시련을 받아야 할 시간이 남아 있는 거라고...
내 인생을 위하여 내가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가??
누가 그 골치 아픈 일을 대신한다는 걸까?
내려놓음의 한 끗 차이가 여기에 있다. 내 인생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꼼꼼하게 살펴 진행을 해왔음에도 어디에선가 새는 곳이 있어 왔다. 그럴 때 동반되는 시련은 늘 감당하기 버거웠고...
내 인생이니까 늘 조급하고 불안하고 실수 없기를 바라는 거다. 좀 더 잘해 보고 싶은 마음... 그래서 하나님이 어찌하시는지 기다려볼 여유도 없이 서두르게 된다.
내 인생 문제 이외에 서두르는 다른 경우는 대체로 가족의 질병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이다.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남매들이 그랬다.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여서 더욱 그랬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 예수님이 충분히 고쳐주실 수 있는 병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출타 중이셨다. 옆에 계셨더라면 고쳐 주셨을 텐데...
과연 예수님이 옆에 계시면 고쳐 주실 수 있는 것을 멀리 계신다고 해서 고쳐 주시지 않으신 걸까?
우리는 그 조급함 때문에 자주 판단이 흐려진다. 두 자매는 마음이 급해졌다. 예수께로 사람을 보냈다.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어서 오셔서 고쳐주시라고...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들의 오라비가 죽었다. 난리가 났다. 예수님께 대한 원망이 말할 수 없이 솟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오빠인데 어쩌면 이러실 수 있어요? 우리 집에 오셔서 늘 우리와 함께 즐기셨잖아요? 우리는 가족과도 같은 관계가 아니었던가요?"
이쯤 되면 이성은 제자리를 찾기 어렵다. 실망은 넘치고 넘쳐서 불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때 오셨다. 두 자매는 자신들이 원하는 바로 그 시간에 오시지 않은 탓을 주께 돌리며 급기야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까지 진도가 나간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진짜 계획을 알아차리는 믿음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사흘 뒤에 오셨지만 때맞춰 오신 것이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간,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순간인 것을 그들은 몰랐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으로 잠들어 있는 나사로를 깨우신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다. 그분이 지체하신 것은 더 큰 기쁨과 약속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나사로를 살리는 이 최고의 이적은 그분의 사업과 신성에 대한 주장에 하나님의 인을 찍는 일이었다.”(DA, 529)
가족과도 같은 특별히 사랑하는 이들에게 이 같은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것이 그분의 계획이셨다. 돌아보면 때맞춰 내 인생을 찾아오셨던 예수님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은 죽을 것 같은 시련이었어도 지나고 나면 가장 적당한 그때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를 기억한다.
서너 해 전에 우리 가족이 겪었던 지옥과도 같았던 순간이 떠오른다. 괌 한인교회 목사로 있는 막내 동생이 위암에 걸려 돌아왔을 당시, 그때 그 시련의 감정이 마리아와 마르다가 겪었던 그 절박함과 좀 비슷하지 않았을지... 가족이 병이 들면 침착할 수가 없다.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니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시간과 해결 방법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모두에게 영광과 기쁨의 순간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때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요즘 코로나로 언택트 해야 할 시기에 괌 교회를 위하여 준비한 영상설교를 가족 모두에게 공유해준다.
동생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우리는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와
그분이 이루신 기적을 다시 한번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해 조급하고 불안하다면 말씀으로 돌아가
잠잠히 그분의 능력을 읽어볼 일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말씀을 의지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할 것이다.
그분은 언제든 때맞춰 오신다는 것을 믿는다.
절실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한번뿐인 인생일지라도
두 번 살도록 기회를 허락하신다. 아멘이다.
위기에 처하면 어김없이 나는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 되고 사탄은 이때다 하고 밀 까부르듯 나를 흔들어댄다. 교묘한 방법으로 나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는다. 내가 팔랑귀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사탄! 그런데 믿음의 묘미가 여기에 있다. 나약한 상태의 인간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12절 말씀)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니 감동이다. 역시 하나님은 나약한 인간을 위해서 결전의 순간에 꼭 필요한 안전장치를 걸어 놓으셨다.
현실을 바라볼 때 암담하지만 그 현실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 신다. 고통의 순간을 함께 하시며 순간마다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 때때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할 때엔 미리 준비해 주시고 때때로 마음을 바꿔 주기도 하시면서 이 시간들을 참아내게 하신다.
종종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내려놓고 싶은 것을 내려놓거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토록 원하였지만 그분의 방법과 그분의 시간과 그분의 일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알았을 때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다. 혹 뭔가에 쫓겨 서두를 때면 어김없이 하나님과의 동행이 깨지고 내려놓기에 실패하고 만다. 내가 앞장서게 되고 예수님은 내 한발 뒤에 계신다.
내 시간 안에서 내 방법이 우선이지 하나님의 방법을 묻거나 들으려고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뭔가를 간절히 받기 원한다면 그것을 받을만한 상태에 놓여야 한다. 그것은 깨달음에 대한 충성이고 순종이고 복종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든든한 하나님의 안전장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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